구체적 소년 만화시편 1
서윤후.노키드 지음 / 네오카툰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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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만화로 그려지는 일을 상상했지만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 막연하게나마 그려본 일은 있었지만요. 구체적인 장면으로 시를 읽어가는 일을 해보게 되어 기쁩니다. 이 소년들을 영영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기다림에 사활을 걸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수색하거나 싸움을 지속하거나 방공호의 담요를 찾아 나서는 소년들의 뒷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모두 나였고, 그들은 내가 되는 일을 부정했습니다. 부족했고 작았습니다. - '시인의 말' 중에서

 

 

시詩와 만화의 만남

 

시인 서윤후는 1990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쭉 자랐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2009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2016년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을 출간했다. 제자리로 돌아와 잘 살고 싶어서 자꾸 여행을 떠나는데, 번번이 다짐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더욱 자주 떠날 궁리를 한다. 현재는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첫 시집을 내고 많은 사람에게 빚을 지고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의 마음과 문장

 

만화를 그린 노키드는 대학에서 만화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2008년 <고혈압소년 저혈압소녀>로 송채성 만화상 추모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인디애니페스트 파노라마 섹션에 <칠판독백>을 출품하고 상영했다. 지금은 일러스트, 만화, 전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미난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책 <구체적 소년>에는 서윤후 시인의 첫 시집인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에 수록된 시 10편과 미수록된 시도 10편이 담겨 있다. 각각의 편은 <만화>―<시 전문>―<시인의 코멘터리>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과 만화가는 한 수 한 수 읽고, 보고, 느끼고, 사색하기를 바라며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남극으로 가는 캠핑카

 

시인 서윤후는 다른 모든 예술창작자들이 다 그렇듯이 '내 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다가 이 시를 통해 그 실마리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과거 옥탑방 고시원에 틀어박혀 친구였던 구현우 시인과 매일 시를 썼는데, 오랫동안 그렇게 지냈지만 참 좋았었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이 시가 바로 자기 것을 찾아가는 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 시를 잠깐 음미해보자.

 

우리는 미끄러지는 대로 달렸다.

출발을 위한 시동인지, 도착을 위한 시동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소음만 남아 있는 이곳에서 낭만은 사라진 역사.

 

구구절절 떠들어 보자. 우리들은 껴안고 잤다.

불쾌한 숙면은 안락한 체온을 나눠줄 테니, 이제 모두 그림엽서를 쓰자.

크레파스는 한 자루뿐이어서 자기 전에 모두 그림자를 그렸다.

 

아무도 읽어 주지 않는 연재를 시작했다.

우리는 집배원이 없을 때 편지도 곧잘 썼다.

말을 걸어주지 않아도 먼저 대답하게 되었고, 도달하는 일만 남았는데

 

- '남극으로 가는 캠핑카' 중에서

 

고시원 쪽방에서 생활해본 사람은 '불쾌한 수면'이라는 상황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특히, 두 사람은 얼마나 오랫동안 많은 습작을 했는지, "넘쳐나는 편지와 엽서들 때문에 돌아누울 바닥도 사라져가는 갬핑카. 노래를 부르며 출발했던 온기는 어디에 있을까. 이 남극을 다 녹이기에도 충분했던 체온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탕과 해변의 맛

 

시인의 연애관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연애는 자신밖에 모르는, 즉 연애를 거의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이 시를 쓸 때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는 연애를 꼭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시절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열렬한 열망을 사랑으로 인식한 듯하다. 

 

파도의 디저트가 되네 하나밖에 모르는 맛으로 사탕처럼 둥글게 앉아 녹아 가는 연인들

철썩이는 파도가 핥아 가네

발가락부터 녹으며 조금씩 둘레를 잃어 가는 사랑이여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던 연인들이 전투적으로 질투하고

비로소 세계는 달콤해지고 온화해지네

- '사탕과 해변의 맛' 중에서

 

사랑에 대해 그는 '전투적 질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달콤하지만 이 달콤함을 갖기 위해 남에게 상처를 줘야 하는 그런 숙명적인 상태를 생각한 듯하다. 지금 당장은 단 맛을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또 다른 사람에게 이 달콤함을 빼앗길 수 있는 그런 제로섬 게임 같은 걸로 말이다.

 

 

구체적 소년

 

"자꾸 새로워지길 원하는 매표소, 거짓말은 노인들에게 암표가 되어 팔려 나갔고,

앵무새 없인 할 수 없는 마술에 이미 거리를 떠도는 소년들은 모자에 동전을 구걸했다

세계의 모든 고요는 이미 매진이다 소년에겐 더 이상 할 수 있는 침묵이 없다"

 

시를 쓰는 행위에 대해 시인 서윤후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라고 표현한다. 즉 이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 중에 귀한 것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화에 등장하는 소년 마술사, 새로운 마술, 환호하는 관중들을 보노라면 우리들은 새로움에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닐까 싶다. 어차피 이미 있었던 익숙함인데 말이다.

 

    

 

 

우물관리인

 

이 우물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지킬 필요가 없다

 

길어 올린 것이 너무 많아 마을은 자꾸 어둠
얼굴 없이 얼굴을 부르는 이름들 사이
나는 우물을 지킨다

 

빠져 죽은 구두가 떠오른다 벗겨 주세요 이 젖은 발들로부터
도망가게 해 주세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혈기 왕성하던 나의 사십대 시절, 임원으로 부임했던 한 상장기업은 전형적인 전통적 기업이었다. 회사 총수의 한 마디에 토를 달지 못하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그런 경영 방식이었다. 회사의 재무구조는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는데, 지나친 투자의 결정, 특히 부동산의 매수는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담당 임원으로 이를 거부했다. 당시 총수로부터 들은 말, 그래서 나는 이 우물을 떠났다. 이 시가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할 줄이야.

 

 

서윤후(좌), 노키드(우)

 

 

그래픽- 포엠, 새로운 콜라보

 

詩시와 만화, 추상적인 시와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만화의 조합 낯선 새로운 시도임에는 틀림 없다. 하지만 두 작가들의 콜라보는 그리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만화가인 노키드는 서윤후 시인의 시집을 읽고 이미 그 속으로 흠뻑 빠지고 말았다고 말했듯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메시지의 전달에 있어서 형태가 문제가 되랴. 앞으로도 이런 시도는 많이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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