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티콘
제니 페이건 지음, 이예원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난 실험이다. 늘 그랬다. 이건 기정사실이자 내개 할당된 자유이자 엄연한 팩트다. 난 감시 대상이다. 학교에서나 사회복지사와 면담하는 자리며 법원이나 경찰서 유치장에서는 물론이고, 거기서 그치지도 않는다. 언제고 저들은 사방에서 날 감시한다. 나무에 오른 날 감시한다. 난 떡갈나무 가지 중 제일 길고 튼튼한 가지를 골라 매달린 채, 내 평생의 소원과 꿈들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몇 시간이고 버틸 수 있다. 저들은 휘영청 걸린 달과 눈싸움을 하는 날 감시한다. 

 

 

감시당하는 우리 사회를 고발하다

 

소설은 청소년 보호시설 '파놉티콘'에 배치된, 폭력과 마약에 절어버린 열다섯 살 소녀 아나이스 헨드릭스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거친 욕설과 다소 듣기 거북한 비난들이 난무하는 이 소설은 어떤 문학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2012년에 데뷔한 제니 페이건(사진)은 될성부른 작가들의 등용문으로 여겨지는 워터스톤즈 서점의 '워터스톤즈 일레븐'에 이름을 올렸다. 또 2013년 최고의 젊은 영국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파놉티콘(판옵티콘)'이란 C자형 원형감옥이다. 이는 1700년대 후반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레미 밴담이 설계한 감옥이다. 이 감옥의 특장은 감시자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모든 수감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지만, 수감자들은 감시자를 결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이곳에 후송되어 49호실에 배치되어 이동하는 아나이스의 눈에 비친 모습은 이러하다.

 

건물 전체가 곡선형을 이룬다. 정확히는 알파벳 C자 모양이고, 그 곡선을 따라 건물 맨 위층에 굳게 닫힌 검은색 문이 여섯 개나 있다. 그 바로 아래층과 그 밑에 층에도 똑같은 문이 여섯 개씩 나 있는데, 문마다 하얗게 칠했고 하나도 빠짐없이 활짝 열려 있다. 여기선 소등 전에는 문을 절대로 닫는 법이 없다고 들었다.

 

파놉티콘

 

아무튼 이런 특성 탓에 감시를 받지 않을 때조차도 수감자는 스스로 감시받는다고 여기게 된다. 이 양식에 맞춰 건축된 수용시설에 주인공인 아나이스가 입소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녀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아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처지의 청소년들이 대개 그렇듯 그녀 또한 여러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나쁜 어른들을 만나고, 험한 일을 겪고, 폭력과 약물에 길들여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나이스는 정작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경찰관을 공격한 혐의로 파놉티콘으로 후송된다. 수용된 파놉티콘 내에서도 소녀는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연대를 형성하고 몰래 들여온 약물을 복용하는 듯 제멋대로인 듯하지만 정작 자신의 알몸을 감출 권리조차도 얻지 못한다. 항상 감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이미 영국 최고의 사실주의 영화감독 켄 로치에 의해 영화화하기로 결정되었다.

 

 

    

 

열다섯 살 소녀 아나이스 헨드릭스는 스코틀랜드 정신병원에서 태어나 여러 위탁 가정을 거쳐 폭력과 마약에 빠지게 된다. 경찰관을 공격한 혐의로 어린 범죄자들의 보호시설인 파놉티콘으로 호송하는 경찰차 뒷좌석에 앉은 그녀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세상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한다. 첫 인상이 벌써 뭔가 억울한 사람과 사악한 교도관들의 만남이라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파놉티콘에 도착한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

 

딱 질색이다. 신변 인수, 낯선 장소, 직원들, 서류철. 땅굴이도 있어서 그 안에 기어들어 가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면 나무 위에 지은 집이라든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브렌다 선생의 안내를 받아 3층으로 올라갔다. 여자 아이 3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49호실은 층의 한가운데 방이다. '콧수염'은 양쪽 뺨에 갈색 선을 나선형으로 세 걔씩 그렸는데, 눈은 크고 갈색이다. 귀걸이는 안 했고 머리가 길다. 이름은 '타시'다. 야구모자를 쓴 '커트 머리'는 배때기에 칼자국 투성이며, 골반에 살이 튼 걸로 봐서 애 엄마인듯하다. 이름은 '쇼티'다. 그리고 '아일라', 이렇게 3명이다. 앞으로 자주 부딪힐 인물들이다.  

"방문은 항상 열어두는 걸 원칙으로 한다, 아나이스. 대신 옷을 갈아입을 때는 당겨서 일부 닫을 수가 있어. 안은 아무도 못 들여다봐. 물론 감시탑이 있기야 하지만 거긴 아무도 없거든. 야간 간호사 선생님이 근무 중일 때를 빼고는. 그리고 간호사 선생님은 유사시에 중앙 잠금 장치를 이용해 시설 내 문을 전부 잠글 수 있어. 거주자 안전을 위해서!"

아나이스가 옷을 벗던 동작을 멈추자 브렌다가 고개를 젓는다. 이는 속옷까지 다 벗으라는 신호인 셈이다. 그녀는 팬티를 벗어 비닐봉지에 던진다. 그런데, 이 방은 전에 있던 방보다 작다. 복도에서 다시 탕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까 그 남자앤가 보다. 난간을 아주 후려 팰 기세다. 파놉티콘에는 남자애들도 있다. 물론 여자애들과 함께 방을 사용하지  못한다.

"남자애들 방은 대부분 2층에 있어서 문 왼편에 서서 갈아입기만 하면 아래층에서 옷 갈아입는 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도록 방문을 열고 지내는 게 여기 규칙이다. 여기 파놉티콘에 비밀이란 없거든"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다들 감시받길 원하는 것처럼 군다. 누군가가 밤낮 안 가리고 자길 쳐다봐줬으면 하는 것 같다. 온라인에 사진을 올리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자기를 맘대로 들여다보게 놔두잖아! 심지어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까지 그리고 또 실제보다 뽀샤시하세 광이 나는 척 굴지. 어떤 사람들은 아예 서너 군데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게시물을 올린다.

그뿐인가. 직장에서는 상사가 감시하지, 버스에서는 카메라가 감시하지, 하물며 기차 안에서도, 부츠 매장에서도 오죽하면 감자튀김 가게 앞에서마저 카메라한테 감시당하며 산다. 그리고 집에 가면? 구경할 사람이 누가 있는지 보러, 누가 자길 보고 있는지 확인하려 어김없이 또 온라인 접속을 한다!

감시탑을 한참 동안 쳐다보면 꼭 벌레처럼 보인다. 창에 반사된 해가 황금빛 홍채처럼 작게 빛날 때면 특히 그렇다. 어젯밤처럼 달이 깃들면 창백한 눈동자를 하고서 줄곧 사람을 좇는다. 층층이, 방방이, 모두가 저 창에 반사된다. 심지어 아나이스 자신도 저 안에 깃들어 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올려다본다.

지금 그녀는 3층 층계참에 앉아 있다. 가부좌를 틀고 고무공 던져 받기 놀이를 하는 중이다. 공은 곱슬머리 남자애한테서 뺏었다. 브라이언이라는 사이코다. 이 공놀이에서는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받아야 한 번으로 치는데 벌써 170번째다. 공을 떨어뜨리면 돼지가 죽을 거란 뜻. 돼지는 바로 그녀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경찰관을 지칭한다. 

돼지가 죽으면 날 열여덟 생일까지 철통보안 중경비시설에 처박힐 거다. 그다음은 감옥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멀쩡히 버틸 리가 없지. 열여섯 살까지도 버티기 힘들걸. 그때쯤엔 벌써 죽었을 테니. 그럼 아나이스, 돼지, 테리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탁됐던 집에서 만난 제이크 녀석, 목에 줄을 맨 제이크까지 한데 다시 뭉치는 거지. 황천 가기 전 마지막 유치장에서 포커나 치고 앉았을 불쌍한 우리 신세. 공이 어느새 완벽한 리듬을 이루며 척 하고 손에 붙는다. 벌레 눈들이 지켜보고 있다. 저놈의 감시탑, 얼굴을 박살내달라고 아주 애원을 하네.

 

아나이스는 태어나서 일곱 살 때까지 스물세 군데 옮겨 다니다가 입양이 됐고, 열한 살 때 거기서 나와서 지난 4년간 스물일곱 번 옮겨 다녔다.

 

늘 같은 악몽을 꾼다. 상습적으로 마약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이런 악몽에 자주 시달린다고 한다. 아나이스는 여전히 마약을 끊지 못하고 있다. 경찰관 폭행 사건도 그렇다. 그녀는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도 분명 마약에 취한 상태였을 것이다. 꿈에서 저들은 바늘 끝보다도 작은 점 같은 아나이스를 키운다.

극미한 세균 조각에서부터 그녀를 배양해갖곤 방호복과 마스크로 무장하고 현미경에 날 올려놓고 관찰한다. 바보 같은 노래가 갑자기 떠오른다. 이게 무슨 노래였지? 테리사가 불러주던 동요지. 여자아이들은 설탕과 향신료, 세상의 온갖 달콤한 것들로 빚어 만들었다는, 지랄 같은 노래.

 


"그럼 아나이스는 뭘로 빚어졌다고 봐야 할까요?"
"설탕과 설사지 뭐겠어요"
"아니, 농담이 아니에요. 아나이스를 뭘로 만든 거죠?"
"세균요. 죽은 외계 괴생물체에서 채취한 세균에서라고요. 됐어요? 그럼 이제 당장 꺼져!"

 

소설 속에서 아나이스는 여러 어른들을 만난다. 위탁가정에서 만난 어른들과 경찰관, 그리고 법 집행인들 등등. 대체로 질이 나쁜, 세상의 더러움을 모아놓은 것 같은 어른들의 모습이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그것이 곧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반항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하루하루는 더 나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희망의 싹 같은 것이 보인다.

 

그녀는 파리에서 온 프랜시스 존스로 신분을 세탁한다. 그녀는 실종자 명단 벽보에 붙은 얼굴이 아니다. 이제 그녀는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다. 이제 다 끝났다. 더 이상 실험은 없다. 면담도 없고, 파일도, 중경비시설로의 직행도, 사람을 패는 일도, 사람에게 된통 당하는 일도, 감방에 갇히는 일도 없다.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오늘 시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