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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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는 다른 스물한 개 메이저 아르카나의 앞과 뒤에 오는 카드다. 숫자가 없으니 0번도, 22번도 될 수 있다. 카드 속 남자가 어디론가 걸어간다. 봇짐을 어깨에 메고 있다. 뒤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발톱으로 엉덩이를 할튀어 대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가 손에 든 막대기는 지팡이처럼 몸의 중심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이 카드는 모든 성장 서사의 시작과 끝맺음을 상징한다. - ‘숫자 없는 아르카나:바보’ 중에서





총 22개의 타로 카드로 각 챕터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타로 카드를 잘 모른다. 그리고 그간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친절한 베르베르 씨 덕분에 조금은 알 수 있게 된 느낌이랄까. 아무튼 책의 내용은 작가 베르베르의 다섯 살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인 셈이다.


책의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작가 베르베르의 일상은 글쓰기로 연결된다. 마치 로마제국의 전성기에 모든 길은 로마로 연결되었던 것처럼. 어쩌면 글쓰기로의 연결은 당연한 것이리라. 왜냐하면 그는 글쟁이이니까 말이다.


유년기 ~ <벼룩의 추억>(단편소설)

청소년기 ~ <오젠의 수프>(학교신문)

청년기 ~ <개미>(관찰기록)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작가의 대표작인 <개미>는 작은 곤충 개미를 관찰한 기록으로, 출판을 위해 120여 차례나 글을 수정했다고 하며, 그의 첫 작품인 <벼룩의 추억>은 불과 여덟 살에 완성한 단편소설이기에 천재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어서 그의 나이 열다섯에 친구와 함께 만든 신문 <오젠의 수프>는 이를 배포한 지 불과 며칠 만에 3천 부가 소진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마치 프랑스인이 매일 아침에 빵과 함께 즐겨먹는 수프처럼 말이다. 이런 주요 이력을 통해 책 속엔 베르베르의 삶과 경험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책 제목에 대한 답으로 베르베르의 성실성을 감안한다면 글쓰기를 계속할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겠다.


“다 끝났어, 넌 죽은 목숨이야.”

- ‘열네 살. 한밤의 소동’ 중에서


이는 1975년 8월, 코르시카 섬에서 열린 여름 캠프에 참가했을 때의 사건을 소개하는 장면 중의 하이라이트 부분 대사로, 현지의 식당 주인이 무전 취식을 하고 도망친 잡범의 일행으로 착각하여 식당 화장실에서 물통에 물을 받아 급히 야영 텐트로 향하던 열 네살 베르베르의 목덜미에 총구를 겨누고 내뱉은 말이다.


정말 아찔한 순간을 가감없이 글로 표현하고 있다. 마치 스릴 넘치는 단편영화 한편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역시 베르베르는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짧은 순간에도 손전등에 비친 상대방의 손에 들린 총의 모양과 크로뮴(원소번호 24번, 과거엔 크롬으로 불리었음) 도금의 총신을 목격하고선 제법 가격이 비싼 소장용 총임을 파악한다. 마치 형사 콜롬보의 피의자 감식을 방불케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집중력과 뛰어난 관찰력이 바로 <개미>라는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범인이 결단코 아님을 알았던 식당 주인의 아들이 “쏘지 말아요, 아빠, 그 사람이 아니에요!”라며, 급히 이를 제지하는 바람에 베르베르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뒤로 한 채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 베르베르와 함께 온 캠프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이곳을 탈출하자고 외쳤다.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귀뚜라미 울음소리, 짙은 백리향 향기 등은 잠간 동안의 호사였던 셈이다.


조부모님 집에서 방학을 보낼 때 베르베르는 아침에 정원에 나가 개미를 관찰했다. 그는 정원에서 온종일 딸기와 토마토 묘목 사이를 오가는 개미 떼를 말이다. 유독 개미에 천착한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개미는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개미를 관찰하던 그는 몇 마리를 포획해서 유리병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뚜껑에 구멍을 뚫어 공기가 통하도록 했다. 병을 들여다보다가 체포된 개미가 불씽해 보이면 다시 포획한 장소에 풀어주었다. 개미들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세계는 우리 인간들이 처한 조건을 생각하게 했다.


‘혹시 우리도 생살여탈권을 쥔 어떤 거대한 존재에게 관찰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그 거대한 존재가 외계에서 온 어린아이거나 초보 신이라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렸을 적 물고기, 거북, 햄스터 등 여러 반려동물들을 길렀던 베르베르는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롭게 관찰한 대상이 개미들의 도시였다고 한다. 유리병에 갇힌 주인공 개미들이 탈출을 시도하는 이야기를 상상하고 그림으로도 그렸다. 여덟 살 하고 6개월에 쓴 여덟 장짜리 이야기가 바로 <개미>의 첫 버전이었던 셈이다.


이밖에도 들려주는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 속의 인물과 사건은 모두 그의 소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전미연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오롯이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을 중심으로 펼쳐질 수 있을까’ 정말이지 감탄할 수밖에 없다. 


즉 베르베르와의 인연이 깊거나 스쳐 지나듯 만난 다양한 존재들은 각각 소설 속의 등장인물로 환생했던 것이다. 예컨대 둘째 아들 뱅자맹을 돌보느라 잠 못 들던 수많은 밤은 작품 <잠>이 된다. 이런 식이다. 그의 삶 자체가 곧 소설이 된 셈이다.


흔히 천재는 게으름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천재 베르베르에겐 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 매년 10월에 신간 도서를 발표하기 위해 그는 글쓰기를 중심으로 엄격하게 짜인 일과를 수십 년째 지속해 왔다.


30년간 아침 8시부터 12시 반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쓰는 동안 소설이 된 삶, 삶이 된 소설

베르베르가 보고 듣고 읽고 겪는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수만 시간을 이루고, 원고지 한 장 한 장이 모여 수십 권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타고난 이 시대의 이야기꾼 베르베르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끝없는 창조력은 글로써 빛을 발한다.


벌써부터 곧 출간 예정이라는 장편소설 <꿀벌의 예언>(1, 2권)이 너무나도 기대된다. 개미라는 곤충을 집요하게 관찰해서 발표했던 장편소설 <개미>(전 5권)보다 더욱 관심이 간다. 왜냐하면 과학관련 전문기사 내용 중 “꿀벌의 종말은 인류의 종말을 예고한다”는 놀라운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5만 시간 가까이 글을 쓰다


베르베르는 지금까지 2만 2천 번의 일출을 경험했고 5만 시간 가까이 글을 쓰면서 정신을 통한 세계의 탈출을 만끽했으며 무엇보다 조나탕, 뱅자맹, 알리스, 이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행운을 누렸다. 그는 에필로그에서 ‘다시 할 수만 있다면 삶의 순간순간을 더 음미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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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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