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억을 보라 - 비통한 시대에 살아남은 자, 엘리 위젤과 함께한 수업
엘리 위젤.아리엘 버거 지음, 우진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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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위젤홀로코스트(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증언과 고백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때 겪은 참극에 대한 특별한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르침을 전파했다. - '머리말' 중에서 

 

홀로코스트 이야기, 우리 모두 목격자가 된다

 

이 책의 저자 아리엘 버거는 15세 때 처음 엘리 위젤을 만나서 20대를 그의 학생으로 보냈으며, 30대를 그의 조교로 보냈다. 작가이자 화가, 교사로서 영성과 창의성, 사회 변화를 위한 전략을 통합하는 연구를 계속해왔고, 엘리 위젤의 유대인 연구 및 분쟁 해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책 <나의 기억을 보라>의 독자들이 엘리 위젤의 학생이자 목격자가 되도록 안내한다.

 

먼저 엘리 위젤(1928-2016)은 누구인지를 살펴보자. 그는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작가, 교수, 인권 활동가, 홀로코스 생존자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3월, 헝가리를 점령한 독일의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하여 가족들과 함께 게토로 이주했다가 다시 그해 5월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이때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 중 90%가 사망했으며,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세 명도 살해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부헨발트 수용소로 옮겨져 가스실에서 죽게 될 운명이었으나, 1945년 4월 미군에 의해 부헨발트 수용소가 해방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해방 직전에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그의 왼팔에는 수감자 번호 A-7713이 문신으로 새겨졌다. 종전 후에는 프랑스의 고아원으로 보내진 뒤 1948년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 철학, 심리학을 공부했다.

 

전쟁 후 10여 년간 홀로코스트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으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설득으로 1958년에 회고록 <밤LA NUIT>을 프랑스에서 출간했다. <밤>은 1960년 미국에서 영어로 번역, 출간된 후 10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전 세계 3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196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그는 1976년부터 보스턴 대학교 인문학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세계 각지의 폭력과 억압, 인종 차별과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내 메리언과 함께 '인류를 위한 엘리 위젤 재단'을 설립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 후로도 남아프리카, 니카라과, 코소보, 수단 등지에서 벌어진 폭력과 집단 학살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등 '강력한 인권 옹호자'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또한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 기념관 설립을 주도하고, 뉴욕 인권 재단의 창립 이사로 일하면서 전 세계 인권 증진을 위해 정치 지도자들과 교류했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이 생전에 보스턴 대학교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세계 각지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대화하고 토론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엘리 위젤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이나 인권 문제뿐 아니라 기억, 믿음과 의심, 광기와 저항, 말과 글을 넘어서는 예술 같은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면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세상의 아픈 곳을 치유할 수 있을지 학생들과 자주 이야기했다.

 

지식의 배반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실제 생활 사이의 괴리감에 대한 저자의 의문들은, 위젤이 이야기하는 규범적 교육에 대한 비판과 통하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위대한 문학적 개념이나 거창한 철학적 전통이 광신주의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수 없다면, 그리고 종교조차 (수많은 역사가 보여주듯 광적인 설교에 휘둘려 신앙의 이름으로 온갖 잔혹한 짓을 저지를 만큼) 쉽게 타락할 수 있다면, 도덕적 명확성을 지키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엘리 위젤은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이 세상을 광기로부터 구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교육이 도덕적, 그리고 윤리적 타락을 이겨내도록 해주는 뭔가 숨겨진 주요 요소가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가르치는 교사로서 위젤 교수는 이제 이 숨겨진 요소를 찾아내는 연구에 평생 천착한다. 이 요소만 찾아낸다면 지식은 다시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되고, 그 지식이 쌓여 증오가 아닌 공감과 동정의 행위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과학자처럼 자신의 글쓰기와 사색을 통해, 특히 강의를 통해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고 마침내 그 숨겨진 주요 요소를 찾아내 이름을 붙였다. 바로 기억이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딸이자 작가이기도 한 론다 핑크 위트먼이 2013년 아이비리그 대학교들을 방문해, 학생들에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본적 질문들을 했다. 학생들의 대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학생들이 역사적 사실에 무지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런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았을 때 아무렇게나 대답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홀로코스트가 언제 일어났는지 묻는 질문에 1800년이라고 대답한 학생도 있었다.

또한 유대인 희생자들의 숫자에 대해 처음에는 대충 300만 명이라고 했다가, 잠시 눈치를 보더니 3억 명이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사례는 비단 나치의 유대인 학살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인간의 도덕성이 한없이 추락한 특별한 사건들, 예컨대 1970년대 캄보디아 학살, 1992년 유고슬라비아 분열과 인종 청소, 1994년 르완다 대학살 등 다른 수많은 학살과 인종 청소, 그리고 분쟁이 홀로코스트와 마찬가지로 잊혀가고 있다.

 

"우리는 그런 망각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어느 날 오후 위젤 교수의 연구실에서 저자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특별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운동홀로코스트 부정 운동에 대해 최근 발표된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보고서를 언급했다. 위젤 교수는 마치 자신도 마땅한 해결책을 알지 못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이내 말했다.

 

"역사란 좁다란 다리이며, 우리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충격적인 사실들을 계속 기억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실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 실제로 어느 정도 잊어야 하는 일들도 있지요. 그저 기능적 측면에서 보더라도요. 그런데 만일 우리가 정말로 그냥 잊어버리려 한다면 역사는 결국 되풀이되고 말 겁니다." 

 

우리도 이야기꾼이다

"우정이란 나에게 종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종교지요. 누군가 우정에 열광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우정 극단주의자가 되는 경우도 없을 테니 그저 서로에게 아주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위젤 교수는 또 말했다. "여러분이 나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는 만큼 나 역시도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배워 나갑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꺼운 마음 한편으로 부담감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중에야 이 간단한 이야기가 학생들을 그저 수동적으로 배우기만 하는 위치에서 능동적 기여자로 바꿔주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젤 교수의 그 말은 모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배움의 장을 만들어내는 핵심 원칙인 셈이었다. 탈무드에도 "송아지가 젖을 먹고 싶어 하는 만큼이나 어미 소도 젖을 먹이고 싶어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런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기도 했다. 학생들이 질문이나 호기심이 없고 아예 뭘 알고 싶은 생각마저 없다면, 교사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교사와 학생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며, 일종의 교육 생태계를 함께 만들어 나간다.


"과거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이야기를 써가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아무도 알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공감과 갈등

2차 세계 대전 동안 유대인 대학살을 경험했지만 엘리 위젤은 매일 자신의 갑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학생들에게 자신을 모두 열어 보였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의 꿈과 희망에 귀 기울이고 신앙과 우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말했다.

 

"사랑도 가능하고, 희망도 가능합니다. 나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강의를 합니다. 도덕적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먼저 마음을 열면 학생들이 마음을 여는 일이 가능해지거든요."

 

양심을 속이지 않고 살아가는 법

 

다음 주 강의 시간, 위젤교수는 학생들에게 지금까지 읽은 내용이나 강의 시간에서 다룬 문제에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함께 나눠보자고 제안했다. 먼저 키가 크고 두꺼운 안경에 금발의 레게 머리를 한 학부생 데이브가 질문했다. "교수님, 언제부터 인권 문제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시게 되었습니까?"

 

"글쎄요, 일단 나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꽤 오랫동안 언론인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디시어로 발행되는 신문의 기자로, 그다음은 이스라엘 계열의 신문사에서 일하며 기사 한 편당 원고료를 받았지요. 그렇게 일을 하며 가장 좋았던 건 개인적으로 가보기 힘든 곳들을 신문사 비용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여러 곳에서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분쟁과 압제, 그리고 어떤 비인간적 행위가 벌어지는지도 알게 되었고요. 인도의 빈민, 베트남의 난민,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1975년부터 5년간 캄보디아를 통치하며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급진 공산주의 혁명 단체) 희생자, 중앙아메리카에서 박해받은 혼혈 원주민까지. 이미 아는 사실들을 또다시 확인하고 한 번 본 일들을 연거푸 보면서, 그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낱 기자에 글이나 쓰는 사람일 뿐인데 말이지요."

"그렇다면 일단 내가 확인한 사실들을 기사로 쓰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글들은 훗날 여러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고요. 더 나중에는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여러 주요 매체에 필요할 때마다 특별 외부 기고자로 많은 글을 싣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나 작가처럼 도움을 원하는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접촉해, 말과 글을 통해 현실을 바꾸고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했지요."



 

"때로는 가진 것이 말과 글뿐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말이나 글이 일종의 증언이 되고, 단순히 추상적 관념에 그치지 않는다면 분명 그 안에 힘이 있지요. 비록 기자 생활을 그만둔 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세계 여러 곳을 둘러보고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목격자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 메시지에는 분명 힘이 실리지요."

위젤 교수는 어떤 노력과 행동으로 도덕적 자격을 얻었는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당시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 <밤>을 출간한 그는 분명 고통과 생존이라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일찌감치 얻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 자격은 다른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얻은 것이기도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여러 분쟁 지역을 방문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자격은 비로소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저 말만 앞세우며 대중 앞에서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직접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목격자가 됨으로써 '권력 앞에 진실을 이야기하는'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 무게감을 실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만 가지고 세상 앞에 나서고 또 나섰다. 그의 도구란 그의 눈과 그의 마음과 그의 글이었다. 1986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까지 그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학자이자 작가, 사회 활동가였으며 그 어떤 단체나 조직 혹은 후원자를 대표하지 않았다. 노벨상을 받은 후에는 엘리 위젤 인권 재단을 설립해 처음으로 실질적 후원 단체를 갖게 되었고, 주요 신문 지면에 광고를 실을 수 있는 자금도 확보했다. 또한 다른 노벨상 수상자들과 지속적인 만남을 갖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완전한 자유와 자율적 책임 아래 독립적으로 활동한다는 원칙을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종종 언급하며 자신은 백악관이나 국제 연합에서 이야기할 때도 어느 작은 유대인 마을에서 온 예시바 학생이었을 때처럼, 어떤 단체나 위원회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오직 말과 글로 싸우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언어와 그 한계 

"우리는 언어가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원래 내보이고 싶었던 뜻을 그대로 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요. '굶주리는 어린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소득 불균형'이라고 돌려서 말합니까? 그냥 '죄 없는 가족이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세요. '인종 간 갈등'이라고 말하지 말고요. 정치에서도 문학에서도, 그리고 물론 교육에서도 이런 원칙이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언어를 왜곡한다면 진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습니다."

위젤 교수에게 말이나 글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저자는 이해했다. 그가 강의 시간에 노래를 부르기로 결심한 것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었으리라. '전하고자 하는 뜻을 잘 전달했습니까? 그러지 못했다고요? 그렇다면 말이나 글로써 할 수 없는 일을 노래 한 곡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나은 불꽃을 피워 올리자

 

정말로 열정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열정을 잃어버렸고, 더 이상 그런 열정을 찾지 않는 풍조마저 생겨났다. 그런 열정 대신 그저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오락거리를 찾게 되었다. 명심하라. 나치도 공산당도, 그리고 크메르루주도 모두 열정으로 가득 찬 집단이었다.

 

그들에게는 이상이 있었으며,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소망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내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국민은 민족적 순수성, 계급 간 투쟁의 종결, 역사의 새로운 시작과 종교적 지배권 등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불꽃이 있었다. 그런 자들과 싸우는데 미적지근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보다 더 나은, 더 뜨거운 불꽃을 피워 올려야만 한다.

 

 

망각은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

 

위젤은 당시 강의실에 앉아 있었던 학생들에게, 그리고 지금 책을 손에 쥔 독자에게 똑같이 강조한다. 역사의 참극이 되풀이되는 걸 막기 위해 역사의 목격자가 되어 기억하고 또 증언하라고 말이다. "망각은 우리를 노예의 길로 이끌지만 기억은 우리를 구원한다. 나의 목표는 언제나 한결같다. 과거를 일깨워 미래를 위한 보호막으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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