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집 짓기 - 이별의 순간, 아버지와 함께 만든 것
데이비드 기펄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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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에 근육질로 남아 있는 아버지의 팔은 지금은 주름이 졌고 피부가 푸석푸석하다. 그렇지만 내가 있는 그대로 보려 할 때도 아버지의 팔은 여전히 예전 모습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하얗다. 하지만 그 머리털이 내 눈에서 내 마음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흰색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억센 팔, 곱슬곱슬한 밤색 머리털. 이것들이 내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은 기본적인 진실이고, 세월의 배신은 여전히 나를 놀라게 한다. 기억은 사실보다 강한 법이다. - '유전병' 중에서

 

 

죽음과 화해하는 법

 

책의 저자 데이비드 기펄스는 기자, 작가, 교수. 미국 오하이오의 애크런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애크런 비컨 저널Akron Beacon Journal〉의 기자이자 칼럼니스트였으며 MTV 만화시리즈 〈비비스 앤 버트헤드Beavis and Butt-Head〉의 작가로도 활동했다. 그의 글은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에스콰이어〉 등 다양한 매체에 실렸다. 현재 애크런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며 글을 쓰고 있다.

 

은퇴한 토목 기사인 아버지와 함께 엉뚱하고도 기발한 착상으로 자신의 관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돌입한 저자는,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함께 관을 만드는 3년 여의 시간 동안 어머니와 가장 친한 친구를 암으로 잃고, 마음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이미 두 번의 암 치료를 견뎌낸 아버지에게마저 암이 재발하고 만다. 온통 죽음으로 둘러싸인 날들을 보내며 저자는 죽음과 늙어감, 삶과 인생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이별의 순간, 저자가 아버지와 함께 만든 것은 자신의 관뿐만이 아니다. 1095일 동안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앞으로 아버지 없이 혼자 해나가야 할 일들에 대해 배운다. 죽음과 상실,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지혜를 배운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저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걸 매순간 깨닫는다. 그렇게 아들과 아버지는 묵묵히 '관의 시간'을 보내며 자신들의 관계를 재정립해나간다.

 

 

 

"우리는 매일 살지만,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떠난 후에도 곁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우리를 살게 한다. 이 느낌은 소중한 이를 떠올릴 때마다 각별한 마음으로 되살아난다. <영혼의 집 짓기>는 삶뿐 아니라 죽음도 함께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 오은(시인)

 

솔직히 관 짜기는 저자에겐 현실적인 프로젝트라기보다는 섣부른 구상에 더 가까워 보였다. 약간 걱정스럽기도 했다. 나중에 자존심 때문에 발을 빼지 못하는 일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흐지부지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기에 그런 걱정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사실 저자가 진짜로 원했던 것은 아버지와 함께 뭔가를 만든다는 행위 자체였다. 분명한 상징성과 우주적 무게감을 지닌 관이기는커녕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새집이 되었든, 보이스카우트에서 개최하는 모형 자동차 경주 대회용 차가 되었든, 혹은 책꽂이가 되었든 간에 그런 것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러다 관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어느 목요일 밤, 심근경색이 어머니를 덮쳤을 때, 이는 마치 어머니가 죽음이 자기에게 잘 맞는지 확인하려고 옷을 입득이 한번 몸에 걸쳐본 자기 확인의 도 다른 모습인 것처럼 보였다. 어너미는 회복하는가 싶더니 다시 악화되었고, 조하졌다 나바졋다를 반복, 3주 동안 병마와 전쟁을 벌였다. 어느 시점에 약간 기분이 나아진 모습으로 형 랠프에게 이렇게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내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거 기억하지? 그런데 아니야. 난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어머니는, 우리 중 누구도 확실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점점 더 의식이 더디게 깜박거려서 말을 할 때면 실제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앵무새처럼 흉내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점은 아마 사실이겠지만, 저자는 그걸 믿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에서 저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사랑해요"였고, 그때 어머니가 눈을 뜨고 눈빛을 반짝이며 "사랑해"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난해 여름부터 조금씩 달리기를 해왔다. 이걸 시작하는 대부분의 중년들처럼 그 또한 얼마간 그 어떤 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 달렸다. 이번 경우, 그가 달아나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암이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암이었고, 지금은 존과 아버지의 암이었다. 아무리 달아나려 해도 한 가지 사실만은 피할 수 없었다. 저자는 영원히 살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몸을 더 잘 관리해야 하며, 그 같은 인식 아래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건강했다.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저자는 어머니의 죽음, 친구의 죽음, 그리고 자기 젊음의 죽음이 자기 자신에게 뭔가를 가르쳐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그걸 기대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진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죽음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라는 깨달음인 듯싶다. 슬픔은 부서진 잔해殘骸의 혼돈 상태다. 오직 삶만이 패턴을 되찾을 수 있고, 그것도 나름대로 좋은 시절에만 가능하다.

 

그 오랜 상실의 계절로부터 그가 기억하는 것은 하루하루가 가능한 한 빨리 지나가기를, 상실의 시기가 지나가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이런 바람 때문에 자기 자신의 삶도 마구 흘러간다는 사실을 그는 간과했던 것 같다. 그는 결코 상실감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패턴의 일부가 될 뿐이다. 

우리는 더듬거리면서 무계획적으로, 무모하게 세상을 알아가고 우리 자신을 알아간다. 하지만 인생을 오래 살다 보니 우리들은 자기 자신이 저지른 실수들을 알아가는 일에, 그리고 그 실수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밝은 빛 속에서 고민에 빠지는 일에 갈수록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그 실수들에는 정보가 가득했다.

 

 

저자가 만든 관은 어디에?

 

어머니와 친구의 죽음을 거치면서 저자는 얼마간 죽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편인데, 반면에 아버지는 낙천적으로 살면서 죽는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 저자가 공들여 만든 관은 아마도 현재 다른 용도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혹 책장으로 사용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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