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 작은 기억들
주제 사라마구 지음, 박정훈 옮김 / 해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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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을은 아지냐가라고 불린다. 포르투갈의 여명기 이래 늘 그곳에 잇다. 하지만 찬란한 이력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잇지 않다. 오직 마을 옆을 지나는 강만 그대로다. 그 강은 수없이 둑을 넘어 범람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강줄기의 방향이 달라진 적은 없다. - '본문' 중에서

 

 

기억 속에 박혀 있는 작은 이야기

 

책의 저자 주제 사라마구포르투칼 작가로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22년 포르투칼 중부 지역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3세 때 수도 리스본으로 이주했다. 고등학교만 마치고 용접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69년에 공산당에 입당반정부 공산주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 1975년에 국외로 추방되었으며 그 후로는 생계를 위해 번역가 언론인 등으로 활동했다. 신사실주의 문예지 [세아라 노바]에서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79년부터 전업작가가 되어 소설, 시, 일기,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썼다.

 

1947년 <죄악의 땅>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후 19년간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않고 공산당 활동에만 전념하다가, 1968년 시집 <가능한 시>를 펴낸 후에야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79년 희곡 <밤>으로 포르투칼 비평가협회가 뽑은 올해의 희곡상을 받았다. 1982년에 포르투칼을 배경으로 한 환상적인 역사소설 <발타자르와 블리문다>를 발표해 명성을 얻었고 이후 같은 해에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포르투칼 펜클럽상과 리스본 문학상을 수상했다. 1992년에는 포르투칼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영화화 되었다.

 

 

책의 무대는 자그마한 마을이며, 책의 내용은 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자전적 이야기가 에세이 형식으로 펼쳐진다. 즉 아지냐가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사라마구는 18개월 때 리스본으로 이사를 한 후, 두 마을을 왕래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네 살 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형 프란시스쿠(폐렴으로 사망, 성탄절 전야에 매장됨)를 회상하면서 이른바 '가상기억'에 대한 개념을 탐구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겨울 새끼 돼지들이 추울까 봐 침대로 데려왔던 일을 떠올리며 그들에 대한 애정을 새삼 느낀다. 사라마구는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해독하며 문학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처녀적 어머니가 물을 길러 마을 분수에 갔다가 아버지가 사귀자고 한 말을 들은 뒤에 마음이 온통 어수선하고 요동치던 일이 있었다. 그날 물 항아리를 이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몸을 숙여야 한다는 것도 그만 잊고 말았다. 정신이 온통 딴 데 팔린 것이었다. 항아리와 상인방이 부딪치는 순간에 모든 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항아리 파편, 흩어진 물, 할머니의 야단, 아마도 사건의 원인을 알았다면 웃음. 내 인생도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부서진 물 항아리와 함께"(168쪽)  

 

아지냐가와 리스본의 아름다운 풍경, 가족, 친지, 이웃과의 이야기, 자신의 성인 '사라마구'의 유래, 질투와 같은 감정, 성적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이야기 등이 담겨 있는데, 작가의 오래전 기억을 끄집어낸 이 책은 어린 시절부터 단어와 이야기에 매료되어 세계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난 한 대문호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셈이다.

 

 

 사마라구의 어머니

 

 

책은 저자의 회고록이다. 다른 점이 잇다면 단지 출생에서부터 16살 때까지의 기억만을 담고 잇다. 그리고 차별성이라면 연대 순으로 기록한 게 아니라 기억의 선착순으로 글을 써냐려간다는 점이다. 10년이 좀 넘는 시간 동안 열 개의 집을 옮겨 다녔다. 그러다보니 책의 후반부에선 전반부의 일부 기억이 틀렸다고 교정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작가의 소년기 기억이 성인이되고 노인이 되어도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준다.

 

"도미틸리아와의 일화가 벌어진 때를 열한 살 무렵이었다고 잘못 기록했다. 실제 내 나이는 여섯 살 무렵이었고, 그녀는 여덟 살 무렵이었다"(167~8쪽)  

 

작가의 픽션은 환상적인 서사, 대담한 사건 등으로 유명하다. 이를테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눈이 멀거나,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멈추면서 아무도 죽지 않는 일들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 책은 전혀 다른 형식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즉 작가가 꾸며낸 픽션이 아니라 생생한 실제 이야기이자 작가의 삶 그 자체이며, 소년기의 에피소드 모음이다.

 

 초등학생 시절의 사마라구

 

"내가 작은 소년이었을 때의 작은 기억들. 단지 그것을 기록한 것이다"(50쪽) 

 

작가의 전체 인생을 다룬 전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년기의 작은 기억들을 통해 우리들은 작가와 매우 가까워졌음을 느끼게 된다. 소년 사마라구의 천진함, 어리석음, 기쁨, 고통, 두려움 등은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 그것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우린 누구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마치 못을 박아 놓은 것처럼 떼어내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카발레이루스 길의 집은 악몽에 시달렸던 시기와 관계가 깊다. 꼭대기 층에 있는 집까지 가려면 늘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올라야 했다. 그 시절 나는 잠들었을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늘 악몽으로 괴로워했다. 밤이 당도하는 것만으로 공포는 시작되었다.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몰려들고, 어느 구석에 자리 잡은 괴물 하나가 발톱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악마의 몸짓이 나를 공포의 늪으로 몰아넣곤 했다" (79쪽)

 

 

 

노작가가 우리들에게 전하려는 지혜 

 

이 책을 읽어내려 가는 동안 우리들은 모두 소년 소녀가 될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푸른 도마뱀의 시절로 돌아갈 것이다. 마치 초성능의 타임머신을 탑승한 것처럼. 책의 마지막은 "나는 두번 다시 푸른 도마뱀을보지 못했다"라는 문장으로 장식한다. 책장을 덮는 순간, 우리들은 팔십대의 노작가가 전하는 말, "너였던 소년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두거라"를 되새겨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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