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으로 보는 세계사 - 자르지 않으면 죽는다!
진노 마사후미 지음, 김선숙 옮김 / 성안당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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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유럽을 석권한 나폴레옹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나폴레옹은 혼란에 빠진 프랑스에 혜성처럼 나타나 난국을 수습했다. 하지만 그 인기를 이용하여 '제1통령'이라는 지위의 임기를 없애 버렸다. 일단 '종신'이 되자, 그가 '황제'가 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 없었다. 그다음 나폴레옹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끊임없이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국민을 동반한 파멸이었다. - '본문' 중에서 

 

 

지금까지 반복되는 숙청의 역사

 

책의 저자 진노 마사후미는 1965년 나고야에서 출생, 입시학원 가와 이주쿠(河合塾) 세계사 강사로 활동하며 세계사 전문 온라인학교 '세계사닷컴'을 운영하고 있다. 오랜 기간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 효과를 낼 수 있는 학습법을 연구하고 개발,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역사 전도사'로서 방송, 강연, 집필, 게임감수 등 다양한 활동도 펼치고 있다. 저서로는 <세계사 극장> 시리즈,  <패권을 읽으면 세계사를 알 수 있다>, <세계사를 읽으면 일본사를 알 수 있다>,  <최강의 성공철학서 세계사>, <전쟁과 혁명의 세계사> 등이 있다.

 

 

 


죽이지 않으면 당한다

중국의 역사는 '숙청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중국인에게 '숙청'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에 숙청에 대한 죄책감이 없다. 좋은 예로 한평생 나라를 돌며 '인덕仁德'을 펼쳤던 공자孔子는 중국에서 '성인군자의 대표'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그런 그가 노魯나라 대사구大司寇가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숙청'이었다.

 

즉, 부임한 지 7일 만에 곧바로 당대 대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소정묘少正卯를 뚜렷한 이유 없이 죽이고, 이도 부족해 중신들마저 죽였다. 또, 제후 회맹會盟(제나라와 노나라 연맹)에서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배우와 광대까지 죽이라고 명했다.

 

죽이지 않으면 당한다!

 

중국사를 보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후 안정기로 향할 때면 반드시 거치는 일이 있다. 바로 '숙청'이다. 왕조 탄생의 어두운 민낯을 숨기려는 의도에서 일 것이다. 목숨을 걸면서까지 왕조 탄생에 일조한 건국의 소위 일등 공신들을 몰살시켰다. 더구나 후환의 싹을 없애고자 공신 가문은 '삼족三族' 심할 경우 '구족九族'까지 멸족 滅族시켰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장기간의 전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혼다 다다가쓰, 이이 나오마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 소위 '도쿠가와 18신장神將'을 숙청했다. 메이지 유신을 추진한 메이지 천황도 기도 다카요시,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등 유신의 일등 공신들을 거의 대부분 몰살시켰다.  

 피부색으로 인종을 숙청한 아리아계 민족

백인종인 아리아계 민족은 지금부터 4,000년 전까지 오랫동안 아시아 대륙의 중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초원 지대에 살던 유목민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2,000년경 지구의 기후가 한랭건조로 바뀌면서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이들의 '생명선'과도 같은 푸른 초원이 급속히 사라졌기 때문에 굶주림이 찾아왔다. 하는 수 없이 이들은 살던 땅을 단념하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 민족 이동을 시작했다.

 

동쪽으로 이동한 민족이 현재의 인도계(북인도)이고, 남쪽으로 이동한 민족이 이란계이다. 그리고 서쪽으로 이동한 민족은 현재 유럽계 민족을 형성했다. 이때 이들은 그땅에 먼저 거주하고 있던 유색 민족을 마주하고 되었는데, 이들은 안정적인 삶을 확보하고자 피부색이 다른 민족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인종차별의 시작'이다.

 

이를테면 인도에 정착한 아리아계(당시엔 백인종)는 원주민(갈색 인종)과 접촉하면서 곧 '바르나'라는 차별 제도(후에 카스트 제도로 발전)를 시행했다. '바르나'는 '색(피부)'이라는 뜻으로, 이 무렵부터 이미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했음을 보여준다. 현재 인도인은 북쪽으로 갈수록 피부색과 생김새 모두 코카시안(백인종)에 가깝고, 남쪽으로 갈수록 피부색이 검고 생김새도 몽골로이드(몽골계)에 가깝다. 

 

하지만 유럽에 정착한 아리아계는 그렇게 심하게 인종차별을 실시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먼저 인도에 침입했던 아리안의 경우를 살펴보자. 번창했던 고대 인도 문명은 이미 쇠퇴한 상태였지만 토착 세력인 갈색 인종(드라비다)의 항거는 만만치 않았다. 이는 결국 정복을 완성한 아리안들에게 인종 차별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반면에 유럽은 인도와 상황이 달랐다. 지리적으로 피레네, 알프스, 발칸 등 세 산맥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어서 문화적인 면에서는 남쪽 지중해 연안(현재의 남부 유럽인 이베리아, 이탈리아, 발칸 반도 주변)과 북쪽의 중앙부(현재의 동서 유럽인 프랑스, 독일, 동유럽 제국 주변)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아리아계는 지중해의 넘쳐나는 교역품과 고도의 시스템화된 문명을 목격하고선 토착 세력의 피부색을 감히 차별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교인들의 무슬림 대숙청

 

6세기까지 그 세력이 미미했던 이슬람은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 한구석에서 어느 날 등장, 20년 만에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고, 8세기 초엔 서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까지 세력을 넓혀 나갔다. 이에 무슬림은 유럽의 동쪽(동부 지중해 연안)과 서쪽(이베리아 반도)에서 협공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이슬람은 새로운 이교도의 땅을 얻더라도 기존 세력을 박해하지 않았다. 즉 그리스도교 교인들의 삶을 보장했다.

 

세월이 흘러 기존 유럽인에게 유리한 상황이 마련되자 유럽인들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십자군 원정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시리아, 레바논,이스라엘 등 당시 레반트(동방)로 불리는 지역을 되찾은 후 가장 먼저 행한 일이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심지어 아무런 죄도 없고 저항하지도 않은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8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가 무슬림에게 함락되었다가 재정복으로 인해 다시 그리스도교 교권에 복귀하자, 무슬림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리스도교 국가에 잔류한 무슬림을 '무데하루'라고 불렀는데, 이들에게 개방과 추방 중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함으로써 결국엔 개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개종인지를 묻는 '종교 재판', 고문, 재산 몰수 등을 통해 무슬림의 씨를 말렸다.

 

 

 

 

가볍게 읽는 숙청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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