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론 - 리더는 일하는 사람이다
이한우 지음 / 쌤앤파커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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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공자(孔子)를 공부하다 보면 놀라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그의 탁월한 글쓰기 능력이다. 그동안 동서양 철학의 대가들이 쓴 책들을 두루 보았지만 공자만큼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2000년도 더 이전에 살다 간 공자를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그는 분명 말도 잘했을 것이다. 공자의 글이 도덕적인 이야기만을 한다거나 심오한 철학적 명문이라서만은 아니다. 그의 글이 향하는 방향이 일관되게 일이 되게 하는 곳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다. - '글을 시작하며' 중에서

 

 

군자는 일이 되게 한다

 

이 책의 저자 이한우일이 중심이 되는 군자학 연구에 독보적인 성과를 낸 국내 최고의 권위자이자 저술가로,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및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뉴스위크]와 [문화일보]를 거쳐 1994년 [조선일보]로 옮겼다. 2002~2003년 논설위원을 지낸 후 문화부 기자로 학술과 출판 관련 기사를 썼으며 문화부 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논어등반학교 교장으로 1년 과정의 논어 읽기 강좌를 비롯한 다양한 원전 강독 강의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군자 리더십을 설파하고 있다.

 

요즘 세태를 보노라면, 일부 친여권 성향의 자칭 언론인이라는 사람, 친여권 대변인 역할을 하는 정치인, 여권의 핵심 인물들, 청와대 주요 인사들, 심지어 대통령까지 이들이 내뱉는 말들은 우리들을 홍수 속에 빠뜨려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과연 이들은 생각을 한 후 이런 말을 하는건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리더가 내뱉는 말에는 이에 합당한 이유가 다 들어있다. 그래서 어떤 형식이로든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공적인 말은 일이 되게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할 말은 반드시 하되, 불필요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제대로 된 말하기다. 여기서 말 대신 글을 집어 넣어도 마찬가지다. 즉 할 말은 반드시 쓰고 불필요한 말은 단 한 구절도 쓰지 않아야 한다. 지금 세상은 감추려해도 감출 수 없는 그런 소통의 장이다. 각종 형태의 미디어를 통해 거의 실시간 급으로 우리 대중들에게 모두 공개된다.

 

말은 이렇다. 모두 일과 깊이 얽혀 있다. 말이란 일이 되게 만드는 간절함이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이에 저자는 군자가 행하는 말은 필요한 일이 성취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면서 시 時와 장소, 상대방을 잘 가려서 말을 해야 하는 것도 결국엔 이 때문임을 강조하면서 우리들에게 인류의 영원한 스승 공자를 소환한다. 공자는 신중하며, 지혜롭고, 현명하게 일이 될 수 있도록 이끄는 사람, 즉 능력 있는 사람을 군자로 칭송했다. 다시 말해 일이 되게끔 하는 사람이 바로 군자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선이 선한 것을 가리고, 허위가 진실인 양 조작을 일삼는 오늘의 정치 행태는 결코 국민들의 더 나은 삶, 공정과 정의를 표방하는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소위 '그들만의 리그'만 만들고 광신도 집단만을 양산하는 꼼수의 행태에 불과할 뿐이다. 며칠 전에 발생한 사건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아산시의 전통시장에서 한 반찬가게 여주인이 요즘 경기가 어떠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현실성과 진정성을 담아 "거지 같다"는 답변을 했다고,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집단들은 이 여인이 행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온갖 행패를 부린다. 그럼에도 정작 나라의 지도자라는 대통령은 이런 부당한 행동을 지적하지 못하는 그런 일을 수행하고 있다. 정말 개탄스럽다.

 

이 시대에 우리들은 다시 새롭게 공자를 읽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속에 진정한 리더십의 진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만 하는 선비와 일이 되게끔 하는 군자를 잘 분별하지 못하는 이런 혼란한 시대엔 진정한 군자상이 필요해서다. 그래서 저자는 공자의 행동과 말 속에서 일이 되게 만드는 말(글)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이를 소개하고 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너무도 오래전의 이야기다. 오늘날 사장과 직원의 관계로 생각해보자. 사장의 말은 직원들이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을 향해 전력질주하도록 만들고, 반면 직원의 말은 사장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맞춘다. 물론 이는 공적인 관계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반면에 사장이든 직원이든 사사로운 관계에서의 말은 확연히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주제는 공적인 영역에서 사용하는 군자의 말에 중점을 둔다. 여기서 말하는 군자란 일종의 인간 유형이다. 임금 중에도 군자다운 임금과 소인 같은 임금이 있고, 신하 중에도 군자다운 신하와 소인 같은 신하가 있다. 이를 오늘날의 회사에 도입하면 군자다운 사장과 소인 같은 사장, 그리고 군자다운 부하와 소인 같은 부하가 있을 수 있다. 

 

어렵디 어려운 <주역周易>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자는 이를 <계사전>을 통해 풀이한다. 배반, 불신, 군자, 소인, 위선, 무례 등 여섯 가지 키워드를 담고 있는데, 주역이 단지 인생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의 말을 통해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 볼 수 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앞으로 배반할 자는 그 말이 부끄럽고 마음속에 의심이나 의혹을 품고 있눈 자는 말이 갈라져 산만하다.

좋은 사람은 말이 적고 조급해 하는 사람은 말이 많다.

거짓으로 좋은 척하는 자는 그 말이 이리저리 떠다니고 지켜야 할 바를 잃은 자는 그 말이 비뚤어져 있다.   

 

군주란 그 나라의 규모가 크든 작든 모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다. 이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바로 교만이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어설픈 만족감이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려 하지 않는다. 귀찮고 번거롭고 지겹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 지도자에게는 새로운 길을 인도해줄 스승과 같은 신하[師臣]가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옛 뛰어난 이들의 애씀이나 애쓰는 법을) 배워서 시간 나는 대로 그것을 익히니

진실로 기쁘지 않겠는가?"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어버린 지도자에게 꼬이는 것은 아첨하는 신하뿐이다. 신하를 스승으로 둘 수 있는 마음가짐은 바로 겸손이다. 황희 정승을 스승과 같은 신하로 가까이 했던 세종은 호학군주 好學君主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이라고 불렀던 정조는 결코 호학군주라고 할 수 없다.

구차함은 대체로 모자람보다는 지나침에서 생겨난다. 사안에 적중하면 구차함은 사라진다. 그러면 구차함이 없도록 말을 하기 위해서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 말은 생각에서 나온다. 따라서 생각에서부터 상황과 자신의 처지 그리고 바른 생각을 갖추려고 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평소 이 문제에 노력을 쏟지 않았을 뿐이다.

 

나라나 조직에서의 말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직언이다. 그런데 저자가 <논어>를 오랫동안 강의하면서 강조하는 말 중 하나가 '직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대부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내용상의 직언, 직간과 방식이나 행태로서의 직언, 직간은 다르다. 이 점을 구분하지 못하면 그 말이 광직(狂直)해지고 자칫 자신의 몸만 망치게 된다.

 

조선시대 때도 간언을 잘못했다가 신세를 망친 인물들이 한둘 아니다. 지금도 이런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조선엔 임금에게 간하는 일을 주업무로 다루는 사간원이 있었다. 책임자는 대사간(정3품 당상관)이고 그 아래로 사간(종3품), 헌납(정5품), 정언(정6품)을 거느렸다. 이들이 활동하는 일이 '언론言論'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간하는 일로 인해 수시로 고초를 겪었다. 이 시대의 언론사들은 과연 어떠한가, 어용 대변인인가, 아니면 촌철살인의 필력인가?   

 

오간

 

정간正諫~ 곧이곧대로 간하는 것(직언, 직간, 강간)

장간戇諫~ 눈치 살피지 않고 간하는 것

강간降諫~ 겸손한 문체나 태도로 할 말은 하는 것

휼간譎諫~ 고사나 시구를 빌어 은근하게 간하는 것

풍간諷諫~ 휼간과 비슷하면서 더욱 에둘러 간하는 것 

 

조선 성종 때부터 성리학, 그중에서도 주자학이 주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말이 중시되는 것에 비해 일은 경시되었다. 그 이후 점점 일의 이치를 알아서 일을 잘 풀어가는 유자로서의 군자는 점점 퇴색하고 뒷짐을 진 채 다른 사람의 일을 평론하고 비판하는 유자로서의 선비가 조선 사회에서 주류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조선의 선비는 엄밀히 말하면 군자도 아니고 소인도 아닌 어정쩡한 위상을 갖게 되었고, 군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본래 공자가 생각했던 군자는 어떤 사람인가? <자로>에 나타나는 공자의 말을 살펴보자. 아래와 같다.

 

"군자는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니, 기쁘게 하기를 도리로써 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부리면서도 그 그릇에 맞게 부린다.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워도 기쁘게 하기는 쉬우니, 기쁘게 하기를 도리로써 하지 않아도 기뻐하고, 사람을 부리면서도(한 사람에게 여러 종류의) 능력이 완비되기를 요구한다"  

 

공자가 자하에게 되지 말라고 했던 소인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람을 부리면서도 그 그릇에 맞게 부린다" "사람을 부리면서도 능력이 완비되기를 요구한다"라는 말이다. 이는 둘 다 일[事]과 관련된 언급이다. 즉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킬 때 그릇에 맞게 부리는 것이 바로 공자가 말한 관(寬), 즉 너그러움이다. 공자는 이런 관이 없는 리더는 리더가 아니라고 했다. 마치 효도하지 않는 자식은 자식이 아닌 것과도 같다.

 

따라서 군자는 아랫사람 한 사람에게 여러 능력이 다 갖춰져 있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관이고 ‘그 사람을 그 그릇에 맞게 부리는 것’이다. 즉 공자는 군자를 말할 때 반드시 일을 이치에 맞게 처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주희는 공자를 지웠고 그 탓에 군자 또한 우리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주희를 물리치고 공자를 다시 소환하는 것은 일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임과 동시에 리더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이다.

 

의에는 책임이 따르지만, 논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여론輿論조사가 여의輿議조사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우리 조상들은 이 점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논정부論政府라 하지 않고 의정부議政府라고 했던 것이다. 의는 일을 하기 위해 하는 말이고, 논은 그저 주장을 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당연히 의가 논보다 중요하다. 일이 말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일이 먼저다

 

선비가 꼬장꼬장하다면 군자는 유연하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일이 풀려가는 것을 앞세운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주장에만 급급한 선비형 인물들이 너무 많다. 시국 토론회를 보면 말은 넘쳐나지만, 일이 되게 하려는 토론인지 의심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촉새 같은 인물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양보도 할 줄 알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토론 주제에 대해 넓은 이해를 가지는 것이 토론의 본디 목적인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 줌도 안 되는 알량한 지식이나 도덕을 과시하려는 행동은 애초에 남들과의 화합이나 공존 자체에는 아예 관심도 없는 무가치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대에 궤변만 늘어놓는 자칭 지식인이라는 사람과 나라를 다스리는 리더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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