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이야기 1 - 전쟁과 바다 일본인 이야기 1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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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찾아온 우연을 행운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야말로 실력입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두 위험한 순간마다 우연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진정한 실력은 그 우연을 놓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행운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 부문 이상으로 경제, 군사면에서 실력을 발휘하여 우연을 행운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경제, 군사 부문은 17세기 이후의 한반도 주민이 한반도와 바깥 세계를 바라볼 때 취약한 부분입니다. - '들어가며' 중에서

 

 

16~ 17세기 일본의 전환기를 살펴본다

 

이 책의 저자 김시덕은 고려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국문학 연구자료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HK 교수로 재직 중이다. 16~20세기 동부 유라시아 지역의 전쟁사가 주 연구 분야로, 특히 임진왜란을 조선, 명, 일본 간 국제 전쟁으로 바라보는 작업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문헌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에 근거해 전쟁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력을 살피고 역사의 흐름을 추적해왔다.

일본에서 펴낸 박사학위논문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는 2011년 외국인 최초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받았고, 2015년에는 한국 동방문학비교연구회의 석헌학술상 대상작으로 선정됐다. 이 연구는 2016년에 <일본의 대외 전쟁>으로 번역 출간되었고 2017년에 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 밖의 주요 저서로는 <그들이 본 임진왜란>, <교감· 해설 징비록>,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전쟁의 문헌학>, <서울 선언>, <갈등 도시> 등이 있다.

 

이 책은 총 다섯 권으로 구성될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6장으로 구성된 책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 관점을 다룬다. 첫째, 인간 세상에선 때로 법칙보다 우연이 더 크게 작용하며, 둘째, 인간 개개인의 삶에선 노력 이상으로 행운이 중요하고, 셋째, 정치 분야 이상으로 경제와 군사 분야가 인간 세계를 전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는 일본의 근세사에 해당하는 16~17세기를 소환한다. 일본 국내의 통일 전쟁 과정, 유럽 국가들과의 교섭, 가톨릭의 영향력, 그리고 조선과 한반도의 정세 등을 담고 있다. 조선사에서의 큰 불행인 임진왜란이 발생한 시기이며, 일본과 조선의 격차는 바로 이 시기에 크게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항해시대

 

책은 네델란드 이야기로 시작한다.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는 1602년에 설립되었는데, 이 회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타이완과 파푸아뉴기니에 이르기까지 인도양의 패권을 차지한 무역 회사이자 전투 집단이었다. "전투 없이 거래 없다"는 캐치프레이즈가 이 회사의 태도를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영국, 프랑스, 벨기에, 독일 등 유럽 문명국들이 지금까지 견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업과 무기라는 두 개의 칼을 앞세워 동인도회사가 인도양을 휩쓸고 동중국해에 이르렀을 때 중국은 명,청대였고 일본은 전국시대였다. 다른 인도양 지역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이들은 중국과 일본에게 군사적으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동인도회사는 타이완 남부에 거점을 마련하고 일본 규슈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히라도와 나가사키에 극히 제한된 무역 거점을 마련했을 정도였다. 

 

일본은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오사카 전투(1614~1615년)를 거쳐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섰는데,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의 군사력을 압도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중국과 일본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무역에 치중했다.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일본의 은銀이 바로 그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챙겨주었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 일본의 상황은 아메리카·아프리카와 중국 대륙의 중간 정도였다. 일본은 아메리카·아프리카처럼 분열 상태였지만, 유럽 세력이 본격적으로 일본에 접근하기 시작하는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분열에서 통합으로 서서히 방향이 전환되어 간다. 그 계기는 유럽 세력의 일본 접근을 상징하는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년)가 1549년 일본에 상륙한 사건이다. 그는 46년 동안 인도, 중국,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1540~1550년대 일본은 전국시대에서 통일로 향하던 시기여서 분열보다는 통합으로의 열망이 컸고, 센고쿠 다이묘들은 수많은 전쟁 경험을 통해 유럽의 신무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유럽 세력을 몰아내는 것 이상으로, 자신들이 일본을 지배하는 데 불만을 품은 백성과 불교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필요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일본을 포함한 동중국해 연안 지역에 나타난 유럽 세력의 핵심은 군사 집단이 아니라 선교사였다. 한마디로 일본은 실력과 운에 의해 간신히 유럽의 군사적 진출을 막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실력보다 행운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재수 좋은 과부는 넘어져도 오이밭에 넘어진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조총과 사격술을 가르치는 포르투갈인

 

 

16~ 17세기 일본과 카톨릭

 

유럽 세력이 동중국해에 가져온 조총과 십자가, 즉 신무기와 새로운 종교 가톨릭을 중국과 일본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오다 히데노부(오다 노부나가의 장손)(1580~1605년, 세례명 페드로), 임진왜란 때 외교 교섭에 관여한 나이토 다다토시(1520~ 1626년, 세례명 조안), 저명 의학자 마나세 도산(1507~1594년, 세례명 베키오르 또는 멜키오르) 등 당시의 유명인사들이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연히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도구가 바뀌면 생각이 바뀐다. 인간 개개인과 마찬가지로 인간 집단으로서의 사회 역시 깨달음보다는 오히려 강한 외부 충격에 의해 바뀌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변화는 반드시 긍정적이거나 미래 지향적이지 아닐 수도 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 따르면, 청나라가 만주 이주를 금지하는 봉금령을 해제하고, 러시아와 조선의 국경이 맞닿게 되자 조선인들은 새롭게 열린 만주와 러시아로 건너가 악착같이 일하며 정착했으므로 한반도 주민의 민족성은 결코 게을러서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새로운 기술의 탄생은 이렇게 인간 사회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 17세기 일본의 경우, 전 세계의 기축통화가 된 일본 은銀을 대량 생산하게 된 것은 조선의 발달된 은 제련 기술이 일본으로 전래된 덕분이고, 상업출판이 융성하게 된 것 역시 조선과 유럽의 인쇄술이 일본에 전래된 덕분이었다. 즉 기술이 들어오면서 사회 시스템이 바뀌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정신과 물질적 조건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일본은 한국과 매우 다른 역사적 경험을 지녔다. 그 경험의 차이가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부분이 16~17세기 남중국해 연안에서 전개된 일본인의 활동, 그로부터 촉발된 유럽과의 접촉이다. 이런 차이를 못 본 척하고 한자 문화권이니, 유교 문화권이니, 왕인 박사니 하며 한국과 비슷한 것만 찾아서는 결코 일본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일본이 중국과 비슷한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481~1495년 간 재위했던 포르투갈의 제13대 국왕 주앙 2세가 인도 항로를 개척하면서부터였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에 도착,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캘리컷에 도착함으로써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가 열렸다. 포르투갈은 1510년 인도 고아를 점령, 1511년 동남아 해상 항로의 핵심지인 이슬람 국가 말라카 왕국을 점령했다.

 

당시 포르투갈은 동남아에서 '왕실의 영광, 복음, 재물'을 찾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재물'이란 특히 정향, 육두구, 메이스 등 3가지 향신료를 가리킨다. 대량 생산지가 바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사이의 말로쿠제도였다. 그래서 포르투갈 세력들은 말라카 왕국을 제입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말라카는 태국, 명나라, 버마 등지에서 수입한 대포와 자체 제작 대포 등으로 2개월 정도 버티었지만 비밀리에 포르투갈과 내통한 내부 이슬람 세력으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다.  

가톨릭과 조총이 일본에 도착했다. 기계 제작은 글자로만 기록하거나 전달하는 게 한계가 있어서 사실상 불가능하다. 포르투갈인 왜구가 조총을 직접 가지고 와서 일본인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준 것은 그런 의미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임진왜란 직전에 쓰시마 측에서 조총을 선물로 주었으나 조선이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처럼 한 국가의 지도자가 외래 문명과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 나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최근에는 '신국설神國說'에 매몰된 일본에서도 유럽 가톨릭의 자료를 통해 16~17세기 일본을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마치 고대 중국을 연구할 때 땅속에서 갑골문자나 백서, 죽간, 목간 같은 출토 문헌이 나오기 전에 제작된 문헌과, 막대한 양의 출토 자료를 활용하는 20세기 후반 이후의 연구 내용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출토 문헌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지 않은 <주역> 해설서를 읽는 것은 헛된 일이 될지 모른다. 백 년 뒤의 세계인들은 지금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고대 중국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말라카는 유럽 세력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일본이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단순한 행운일까? 말라카는 일본보다 훨씬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해서 일 것이다.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의 향료 무역을 지배하려면 핵심 교역지인 말라카를 당연히 지배하고 싶을 것이다. 또한 무력 상대로도 만만해 보였을 것이고 말이다.

 

 

 

 

바보야, 군사력이 문제다 

 

유럽 해양세력이 볼 때 일본은 무역의 상대로서는 매력적이었지만 무역 거점은 아니었다. 태평양을 이용해 무역 루트를 만든 스페인도 거점 확보를 위해선, 자체적으로 무장되어 있는 일본보다는 저항이 약한 필리핀을 차지하는 것이 훨씬 손쉬웠을 것이다. 말라카와 일본 두 나라의 운명은 지정학적 위치가 달랐기 때문에 말라카는 식민지가 되고 일본은 살아남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이 왜란에 시달리고 구한말 일제에 의해 식민지가 된 것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고 차근차근 진행되어 온 해양세력 일본의 대륙진출 욕구와 한반도의 허약한 군사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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