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왜란과 호란 사이 - 한국사에서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
정명섭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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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시인인 홍세태가 쓴 <김영철전>이라는 전기소설이 있다. 난과 난 사이에 태어나 거친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김영철의 고난과 회한은 연이어 난리를 맞아야 했던 17세기 조선 민중들의 고초와 겹친다. … 김영철이라는 평범한 사람이 한 인간의 삶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겪은 탓은 결코 스스로에게 있지 않다. 그저 그가 살던 나라가 그릇된 선택을 내려 전란에 휩싸였고, 그럼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조선사의 반복된 비극

 

이 책의 저자 정명섭은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기업 샐러리맨을 거쳐 바리스타로 일했다. 파주출판도시의 카페에서 일하던 중 우연찮게 글을 접하면서 작가가 되었다. 역사와 추리를 좋아하며, 좀비와 종말을 사랑한다. 2013년 제1회 직지소설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2016년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NEW 크리에이터상을 받았다. 

역사 추리소설 <적패>를 써내면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다양한 장르의 글을 두루 집필하고 있다. <직지를 찍는 아이 아로>,  <남산골 두 기자>, <미스 손탁>, <로봇 중독>(공저), <대한 독립 만세>(공저), <이웃집 구미호>(공저) 등 청소년 소설과 <불 꺼진 아파트의 아이들>,  <사라진 조우관>, <어린 만세꾼>,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아라!> 등 동화를 쓰며 어릴 적 꿈을 이뤄가고 있다. 그 외 저서로 <폐쇄구역 서울>, <별세계 사건부>, <명탐정의 탄생>, <유품정리사>, <한성 프리메이슨> 등이 있다. 여러 앤솔러지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미스터리작가모임과 무단(무경계 작가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우리들은 과거지사를 역사관련 기록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의 38년 간의 과거 일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기간 중에 발생된 일을 참조하기 위해서 조선 후기 시인 홍세태가 쓴 <김영철전>을 참고로 하고 있다. 김영철전은 전란으로 인해 고난과 애환을 겪은 김영철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는데, <유하집柳下集>에 실려 있다고 한다. 당연히 이 기록물의 진실성을 전제로 저자 정명섭도 이 책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침략을 하기 전에는 불길한 조짐을 무시했고,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했고, 결국 무기력하게 항복하거나 겨우 패배를 모면하는 데 급급했다"(7쪽)

 

 

아동대兒童隊를 모집하다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전에 겪어보지 못햇던 길고 참혹한 전쟁이었다. 한족에는 잔인한 왜군이 잇었다면, 다른 한쪽에는 굶주림과 질병이 있었다. 1594년 <선조실록>에 처음 등장한 아동대兒童隊는 훈련도감에서 모집했는데, 주로 조총을 다루는 포수로 편성되었다. 나이가 어려도 조총은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이기 때문에 급료로 주는 쌀이 적어 유지가 쉽다는 점도 아동대를 모집하는 데 한몫했다.

 

"조선시대에서 징집 연령은 16세였고, 성인식 관례도 대략 15세에 치렀다. 다라서 '아동대'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그보다도 어린 아이들이 분명하가. 아마 10대 초반이었을 것이고, 더 어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들에게 조총을 가르친 교관은 조선에 귀순한 일본인, 즉 항왜降倭들인 여여문呂汝文산소우山所于였다. 약 200명으로 편성된 아동대는 편을 갈라 시험을 쳐서 고과를 매겼다. 그렇다면 아동대엔 어떤 아이들이 들어왔을까?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다고 해도 자식을 전쟁터로 내몰 부모는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들어온 아이들은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고아 또는 전쟁통에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다른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설 <왜란과 호란 사이 38년>의 주인공은 홍한수로 1595년 5월, 훈련도감에 그 얼굴을 드러낸다. 그는 오랫동안 굶어서 어깨뼈가 앙상하게 드러났고, 몸으로 제대로 씻지 못해서 몸엔 부스럼이 덕지덕지 나있다. 계미년생(1583년)인 그는 동갑인 전영갑을 이곳에서 만난다. 전란통에 부모와 헤어져 한양으로 흘러들어왔지만 먹고살 길이 막막하던 차에 훈련도감에서 아동들을 모아 군대를 편성한다는 얘기를 듣고 최소한 굶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동대문에 위치한 훈련도감으로 몰려든 것이다.

 

선조 28년(1595년) 12월, 압록강. 주인공 홍한수는 훈련을 받은 조총을 바짝 끌어안은 채 남부주부이자 사절단을 이끄는 신충일을 따라나섰다. 훈련도감의 아동대는 대부분 해체되었지만 홍한수처럼 솜씨 좋은 포수는 훈련도감 소속으로 남았다. 눈바람이 부는 압록강을 건너자 바람은 다소 가라앉았다. 지금은 여진족 길잡이를 따라나선 길이었다. 엿새 동안의 여행 끝에 신충일과 홍한수는 누르하치의 본거지인 불아납성에 도착했다.

 

누르하치의 먼 친척이자 장수인 동양재의 안내로 별채에 자리잡고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동양재는 조총이 궁금해 여러가지 질문을 했다. "작은 것도 맞출 수 있느나?", "투구도 꿰뚫을 수 있는가?" 등등. 한편, 조선군에 대한 논평을 구하자 동양재는 예전에 연회 자리에서 나열한 군사들을 목격햇는데, 화살 깃은 다 떨어지고, 촉도 없는 모습이 허약해 보였다고 평했다.     

동양재의 얘기를 듣던 홍한수는 문득 훈련도감의 늙은 포수에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어느 해인가 왜국 사절단이 길가에 도열한 병사들의 창을 보고 너무 짧아서 쓸모가 없어 보인다고 비아냥거렸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긴 창과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이 쳐들어왔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누르하치의 여진족들은 조선을 전혀 겁내지 않았다.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실체  

재조지은이란 원래 죄를 지어서 처벌받아야 하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는 은혜를 가리킨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재조지은이란 명이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해준 일을 일컫는다.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선조는 대신들과 함께 의주까지 피난을 갈 정도로 전전긍긍했다. 반면에 선비들과 백성들이 똘똘 뭉친 의병은 왜군과 죽음을 불사하는 혈전을 벌이면서 이 땅을 지켰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했던 정경운이 쓴 <고대일록>을 보면 명군明軍이 조선에서 얼마나 지독하게 약탈을 했는지가 적나라하게 나와 있다. 하지만 선조는 자신의 훼손된 권력을 지키기 위해 명을 추켜세우고 의병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러면서 관념적이었던 사대관계는 현실적이고 동시에 맹목적으로 변해갔다.

 

명의 지원병 요청을 둘러싼 광해군과 대신들 간의 갈등은 정국을 주도하던 대북大北 내부의 분열을 불러왔다. 여기서 대북이란 세자책봉 문제로 소북小北과 대립하던 정치 집단으로 광해군을 지지했다. 하지만 당시 선조는 소북이 지지하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가뜩이나 소수이며 과격파였던 대북의 분열은 정권을 지탱할 마지막 기둥을 무너뜨렸다. 명 황제가 직접 지원병을 보내라는 칙서를 보냈기 때문이다. 마침내 1618년,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하면서 지원군이 조직되었다.

 

도원수 강홍립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2월 19일을 시작으로 2월 22일 전군이 압록강을 건너갔다. 하지만 억지 전쟁터로 가는 조선군의 진군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엇다. 더구나 군랼의 보급이 계속 지체되는 바람에 병사들은 압록강 도강 이후 지독하게 굶주렸다. 행군은 후금군이 쌓아놓은 나무에 막혀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앗다. 2월 25일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 추위로 동사하는 병사들이 발생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지휘관 유정은 군량 보급시까지 대기하겠다는 강홍립의 제인을 거절했고, 자신의 군량을 나눠주지도 않았다.

 

 

비운의 개혁군주 광해군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시대마다 달랐다. 조선시대 내내 폐위된 자젹 없는 군주이며 무능하고 포악하다는 평이 따랐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평가가 바뀌었다. 즉 선견지명이 있고,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로 바뀐 것이다. 광해군은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반대하고 궁궐의 증축에 지나치게 힘을 기울였다. 재위기간 내내 옥사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렸다. 그럼에도 광해군이 후금과 명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시도한 점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중립외교는 큰 난관에 봉착, 명은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추종했기에 광해군의 선견지명은 여기까지였다.

 

광해군은 국익에 따라 냉철하게 선택해야 할 국정 방향을 설득하는 대신 조롱과 비아냥으로만 일관했다. 명분을 앞세우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대신들을 백면서생이라고 조롱했고, 사르후 전투의 패전에 대해선 그럴 줄 알았다면서 비아냥거렸다. 대신들을 국정의 파트너로 보지 않고 무지몽매한 존재들로 매도하며 냉소로 일관한 것이다. 후금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명의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면 천하의 주인이 바뀔지 모른다고 내다본 탁월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그러한 선견지명에 동조하는 세력을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다. 광해군이 가진 이러한 한계는 집권세력인 대북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면서 인조반정으로 이어진다.

 

"반란이 성공한 것이 아니라 광해군이 실패한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이 축출되고 새로운 세상이 왔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공신들 간의 권력 다툼과 역모나 누명이 판을 쳤다. 이런 와중에 홍한수를 포함한 훈련도감 포수 일부는 북방으로 차출되었다. 후금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기에 그들의 동태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북방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켜 후금의 침입을 막자는 주장이 제기됨에 따라 인조의 명에 의거 북방 수비 병력들이 차출되었다. 

 

홍한수는 여여문을 도와 포수 훈련에 힘을 썼다. 부원수 이괄이 있는 영변엔 팔도에서 올라온 병사들이 지독하게 훈련을 받앗다. 추운 겨울이 찾아오자 훈련이 줄어들엇다. 시간이 남아돌자 병사들은 고향 생각에 젖어들엇다. 홍한수는 어렵게 구한 삼해주 한 병을 들고 여여문을 찾앗다. 술잔을 주고받건 홍한수가 조선이 압록강을 넘어 후금을 친다는 소문이 있다면서 이를 여여문에게 되물었다. 이에 술잔을 내려놓은 여여문이 고개를 저었다.

 

"조선은 늘 자신들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임진년에 여기로 건너왔을 때 함경도 쪽에서 여진족과 싸운 적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도 감당하기 힘든 자들이다. … 조선은 임진년 때만 생각해서 전쟁이 나면 높은 산속의 성에 틀어박혀서 싸울 생각만 하더구나. 왜군이었다면 그 방법이 먹히겠지만 후금군에게는 소용이 없다"

 

"왜 그렇습니까?"

 

"왜군의 목표는 땅을 빼앗고 군량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충지를 점령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했다. 하지만 후금은 그러지 않아. 아마 조선이 산성에 틀어박히면 그냥 가던 길을 갈 거다"

 

 

인조 5년(1627년) 1월 22일 평안도 안주성

 

후금군은 얼어붙은 청천강을 건너서 안주성을 포위했다. 성벽에 올라간 홍한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후금군의 대열을 보고선 입이 쩍 벌어졌다. 안주성을 빈틈없이 포위한 후금군은 조선군의 항복을 종용했다. 안주목사 남이흥은 역관을 통해 결코 항복하지 않겠다는 소리를 외치게 했다. 이에 대한 후금군의 반응은 역관의 표정을 어둡게 만들었다.

 

"내일 공격해서 우리를 모두 죽이겠답니다"

 

다음날 아침, 후금군은 새벽안개를 뚫고 공격해왔다. 안주성의 조선군은 후금군을 향해 조총을 쏘고 화살을 날렸다. 화포에서 날아간 포탄이 후금군 대열 한복판에 떨어지면서 수십 명을 한꺼번에 쓰러뜨렸다. 이길 수 있겠다는 희망은 잠시, 새벽안개가 걷히자 눈 앞에 전개된 수많은 후금군을 목격한 뒤 안주성민들은 절망에 빠졌다. 공격이 재개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홍한수도 정신없이 조총을 쏘아댔다.

 

한낮이 지나자 후금군의 사다리가 성벽에 걸렸다. 후금군의 침입 기세에 조선군은 압도당하고 말앗다. 성 안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쏟아져 들어오는 후금군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안주목사 남이흥은 문루에서 후금군에 대한 공격을 지휘하다가 안주관아로 퇴각했다. 홍한수도 그를 뒤따라 관아로 들어갔다. 

 

적진에는 조선사람들도 보였다. 나라가 백성을 버린다면 백성도 나라를 버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족들과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누고 안주성으로 왔던 홍한수는 그래도 안주목사가 남이흥이라는 사실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지만 그는 제대로 습진習陳을 하지도 않고, 사소한 일에 부하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홍한수는 남이흥이 길길이 날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남이흥이 탁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라고, 나라고 왜 그러고 싶지 않았겠나.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네"
"습진을 하려고 하면 조정과 권신들이 보낸 기찰꾼들이 달라붙었네. 그러면 얼마 후에 조정에서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말이야"

 

남이흥의 말에 어이가 없어진 홍한수는 그 이유를 물었다. 이괄의 난 때문에 조정에선 변방의 장수가 진법 훈련을 하기만 하면 이를 의심하고 훈련을 하지 말도록 했다는 것이다. 장수가 조금만 움직여도 의심을 하니 어떻게 군사훈련을 할 수 있겠느냐는 말에 홍한수는 분통이 치밀어올랐다. 남이흥 목사는 공신임에도 말이다.

 

 


 

일어나지 않는 의병, 등을 돌린 백성

 

후금군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자 인조는 의병을 일으켜 이에 대비하라고 김장생을 양호호소사로 임명했다.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이자 서인의 혈통을 잇는 율곡 이이의 제자이다. 김장생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자 호소하자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김장생은 의병을 이끌고 전주로 향햇다. 여기엔 소현세자가 이끄는 분조가 머물고 있었다. 이후엔 눈에 띄는 의병 활동이 전무했다. 특히, 북인의 근거지였던 경상도에서 심했다.

 

심지어 의병에 가담하지 말라는 익명서가 곳곳에 나붙었다. 임진왜란 때엔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는데 30여 년이 지난 정묘호란 때에는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해 모집해야 할 정도로 분위기가 식어버린 것이다. 물론 정묘호란이 벌어진 기간이 대단히 짧은 탓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민심이 돌아선 것이다.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은 이때의 분위기를 자신의 저서인 <속잡록고서續雜錄>에 이렇게 남겨놓았다.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비난을 하거나 욕설을 퍼붓고 화를 내기까지 한다. 그리고 의병에 가담하지 않으려고 온갖 핑계를 대고 한 사람도 나서지 않으니, 인심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국운이 다한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전술

 

임진왜란을 경험하며 조선은 활을 버리고 조총을 쓰기 시작했고, 30여 년이 지난 병자호란 무렵에는 조총의 품질이 일본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조총은 기병이나 궁수에 비해서 양성하는 비용이 적게 들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재정난에 시달리던 조선에 여러 모로 적합했다. 특히 별다른 훈련을 하지 못하는 속오군에게 적합한 무기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시간 동안 상대해야 할 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여진족은 왜와 여러 모로 달랐다. 여진족이 운용하는 군의 상징은 기병이다. 이들은 돌파력이 뛰어났다. 여진족은 특정 지역을 점령하는 대신에 약탈을 한 후 바람처럼 돌파해나갔던 것이다. 조선군과 마주치면 곧장 말을 몰아서 돌격해오기에 그 기세에 엄청난 공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기마병인 팔기군은 활로 명중시키기도 어려웠다. 화포도 마찬가지였다. 부정확하고, 재장전 시간이 오래 걸려서 돌파당하기 일쑤였다.

 

 

삼전도에서 항복한 인조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한 인조는 완벽한 친청파로 변신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선비들이 나라를 망쳤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나라를 고통으로 빠트린 이들은 다름 아닌 임금과 정책을 결정한 대신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라가 비극을 맞은 데 대해 책임지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상의 주인공 홍한수나 김영철 같은 민초들이 겪은 고통과 고난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였다. 병자호란이 터지자 포로로 잡혀서 심양에서 노예가 되었다가 주인집을 탈출, 북경과 만주를 거쳐 조선으로 귀국한 안추원을 조정에서 고향인 개경으로 보내지만 이미 오래 전에 부모가 죽고 일가친척들이 뿔뿔이 흩어져 먹고살기가 힘들자 다시 그는 북경으로 돌아가려고 압록강을 건너다가 적발되는 일도 발생햇다.     

 

 의주부윤은 37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안단을 묶어서 청으로 돌려보낸다. 외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결박된 채 청으로 끌려가던 안단은 조국이 자신을 죽을 곳으로 몰아넣는다고 울부짖었다. 환향녀라고 불리면서 평생을 손가락질 받은 여인들의 사연은 아예 기록조차 남지 않았다. 다만 절개를 잃었으면서도 죽지 않고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왔다는 사관의 거친 붓놀림 속에 가느다랗게 흔적만 남길 뿐이다.

 

 

 

후손인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

 

 

김영철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김영철의 사연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여상如常했다. 수많은 김영철들과 홍한수들은 잠시간의 안식도 없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휘말려 평생을 휘둘렸다. 그렇게 행복해지는 것이 법도에 어긋나는 시절을 견디면서 아픔을 습관처럼 겪었다. 그리고 김영철의 비극적인 삶은 병자호란 때 민초들에서 끝나지 않고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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