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징비록 - 역사가 던지는 뼈아픈 경고장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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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도자들이 한 행태를 저들 대한민국 지도자들이 버리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망한다. 찬란한 문화전통과 애민정신으로 무장한 성리철학과 슬기로운 성왕이 조선을 지배했는데, 그 조선이 망했다.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선은, 1밀리미터도 오차가 없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망한 것이다. 두 번 망하지 않기 위해, 200년 아니 500년 전부터 이 나라 지도자들이 헛디딘 땅들을 찾아 징비를 해볼 작정이다. 미래를 위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 ''프롤로그' 중에서

 

 

 

 

대한민국을 징비하다

 

 

책의 저자 박종인은 1992년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주로 여행을 담당했다. 2015년부터 '박종인의 땅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역사 기행 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같은 제목으로 TV조선에 역사 기행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 잘못 기록된 역사를 땅에 남은 흔적을 통해 확인하는 TV 시리즈이다. 지은 책으로 역사 기행 <여행의 품격>과 글쓰기 가이드 <기자의 글쓰기>, 인물 기행 <한국의 고집쟁이들>, <행복한 고집쟁이들>, <골목길 근대사>(공저), 여행 에세이 <내가 만난 노자>, 인도 기행서 <나마스떼>, <우리는 천사의 눈물을 보았다>(공저)와 한국 여행 가이드북 <다섯 가지 지독한 여행 이야기> 등이 있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었는데, 제1부(운명의 1543년)에서는 당시의 조선과 일본은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비교한다. 즉 일본의 열다섯 살 어린 영주는 모든 재산을 털어서 서양의 우수한 무기 철포를 일본 전역에 보급하는 반면, 조선의 명종과 선조는 귀화한 왜인과 대마도주에 의해 제 발로 굴러들어온 총을 제작하기는커녕 창고에 처박아버리고 마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들에게 문호 개방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제2부(닫아버린 눈과 귀)에서는 어떻게 일본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가는지를 소개하고, 이에 반해 성리학이라는 학문에 매몰된 조선의 지배계층은 서원書院을 설립, 오히려 상공업商工業을 억압하고 과학을 무용화시키는지를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제3부(근대의 서막, 종말의 서막)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대처를 비교하면서 무기력하게 망해가는 대한제국의 말로를 보여준다. 

 

 

 

 

'눈 뜬 놈이 이긴다'

 

큰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선원만 100명이 넘었다. 생김새도 기이했고 말도 통하지 않았다. 동승했던 명나라 유생 오봉은 이들이 서남만인西南蠻人 상인들이라 했다. 이틀 뒤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가 이들을 만났다. 이들 손에는 두세 자짜리 작대기가 들려 있었다. 작대기는 가운데가 뚫려 있었다. 바위 위에 술잔을 놓고 그 작대기에 눈을 대고 겨누니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나며 잔이 박살났다. 은으로 만든 산도 무너뜨리고 쇠로 만든 벽도 뚫을 것 같았다. 도키타카는 "보기 드문 보물이로다"라며 거금을 주고 두 자루를 사고 화약 제조법도 배워 가보로 삼았다. 열다섯 살이던 도키타카는 "모든 이가 원하는 것이니 내 어찌 이를 혼자 숨겨두겠는가"라며 기슈에 있는 승병 장군 스노기노보에게 보냈다. 한 자루는 대장장이인 야이타 킨베에게 하사해 역설계를 명했다.

 

이는 일본에서 벌어진 일이다. 1543년 9월 23일부터 며칠 동안 다네가시마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실로 여기서 말하는 작대기는 100년 전 유럽에서 발명된 화승총, 아쿼버스였다. 41살의 대장장이 야이타는 철포를 분해, 자체 제작에 돌입했다. 하지만 나사가 문제였다. 이런 부품에 무지했던 터라 국산화의 길은 불가능했다. 이에 야이타는 자신의 외동딸을 포르투갈인 기술자에게 바치며 기술을 전수받았다. 일본의 첫 국제결혼 사례이다.  


조선에도 철포가 찾아왔었다. 일본보다 12년이나 늦은 1555년 5 월 21일, 비변사가 명종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대마도 사람 평장친은 동래에 와서 자기를 조선이 받아주면 총통 만드는 법을 전수하겠다고 하자 다음날 사간원이 명종에게 "총통을 주조해야 하는데 철재가 없으므로 버려둔 큰 종으로 총통을 주조하게 해 달라"고 건의했다. 삼 정승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불교 신봉자인 명종은 딱 부러지게 "오래된 물건은 신령스러우니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물건을 부수어서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답변했다. 당시는 왜구가 호남을 침탈한 '을묘왜변' 때였으므로 정말 한심한 나라의 지도자가 아닐 수 없다.

1589년 7월 1일, 대마도 사람들이 경복궁을 방문해 선조에게 조총을 바쳤다. '대마도주 평의지 등이 조총 수삼 정을 바친 것이다. 우리나라가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그날 평의지는 공작새 한 마리도 선물했다. 조선 정부는 공작새는 남쪽 바다 섬에 풀어주고 조총은 무기고에 집어넣었다. 그 총으로 사격을 했고 분해를 했고 청소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냥, 아무도 모르게 무기고에 집어넣었다. 아이로니하게도 3년 뒤인 1592년 임진년, 도요토미의 조총 부대가 조선 땅을 일순간에 유린하고 말았다.

 

역사적으로 전쟁 발발 100년 전까지 조선은 무기 강국이었다. 화약도 만들고, 화기도 만들면서 왜구를 경계하는 그런 나라였다. 1479년 일본에 통신사를 보낼 때 기술 유출을 우려해 '화약 장인'의 동행을 금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첨단 군사국가였다. 이후 조선은 무기에 대해 무관심했고, 반면 일본은 필요성을 절감했던 탓에 유럽으로부터 화약과 철포를 수입해 자제 제작함으로써 무장화까지 성공했던 것이다. 이런 차이는 결국 나라 지도자와 지배계층의 통찰력 부족 때문인 것이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은 임진왜란이라는 대형 전란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비리를 삼가하자는 가르침을 담았다. 물론 임진왜란 발발 당시 영의정이란는 직책을 맏았던 고위 관료 류성룡이기에 책임론에선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 다시는 이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만큼은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이 명심하고 간직해야 할 점이라고 본다.

 

저자 박종인도 이런 점을 기저에 갈고 1543년에 벌어진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조선과 일본을 비교해 나간다. 한편,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유럽인의 사고를 지배했던 천동설天動說이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지구가 움직인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년)라는 지동설地動說로 바뀌면서 대항해의 시대는 더욱 가속화됨으로써 일본에 도착한 포르투갈인은 최초로 일본에 총포를 제공한다. 당시 조선은 성리학이란 통치이론에 매몰된 왕과 지배계층의 사대주의 추구로 인해 단지 외국 문물을 '오랑캐의 것'으로 폄하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으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은가 말이다.

 

"비록 조총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쏠 때마다 다 맞힐 수가 있겠습니까?"

 -신립

 

특히,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는 신립은 류성룡의 충고(조총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천혜의 요새인 문경 새재를 방치하고 충주 달천변 진흙탕에 배수진을 쳤다가 팔천 여명의 정예부대를 몰살시키고 자신도 탄금대에서 투신, 생을 마감했다. 탄금대에 세워진 그의 기념탑은 전승기념이 아닌 실패 기억탑인 셈이다. 지도자의 그릇된 판단자신은 물론이고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렇게 전란으로 인해 풍전등화 위기에 처한 조선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이순신, 권율, 김시민 등의 군사 지도자와 의병 및 승병 등의 목숨을 건 항전 덕분에 결국 나라와 백성을 보전했지만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 탓에 국토와 민심은 황폐화되고 말았으며 이후에도 나라의 지도자와 지배계층이 크게 각성하지 못했기에 조선의 국운은 점점 쇠퇴해 마침내 대한제국의 말로라는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책을 마감하고 있다.         


황제라 친한 고종의 대한제국 때인 1902년 5월 30일 아침 경운궁 함녕전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다음날 아침 또 잔치가, 밤에 또 잔치가, 6월 1일 아침과 밤 또 잔치가 열렸다. 잔치는 6일, 18일에 또 열렸다. 19일 밤에는 제국 영빈관인 대관정(현 프라 자호텔 뒤편)에서 '각 공사, 영사와 신사를 청하여 기악으로 잔치를 벌였다' 궁궐 잔치에는 평양, 선천, 진주와 서울에서 무용과 음악을 맡은 기생 80명이 동원됐다. 매천 황현에 따르면 궁내부에서는 잔치를 위해 프랑스제 촛대와 밥그릇을 구입했다.

그 해 굶주린 경기도민들이 파주에 있는 인조릉 장릉 송림을 침범해 나무껍질을 모두 벗겼다. 왕릉을 지키던 병사들은 이를 막지 못했다. 송림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 죽은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다.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식 공식 명칭은 '어극 40년 칭경예식稱慶禮式'이다. 11세에 왕위에 올라 40년이 된 것이다. 기념식은 10월 18일로 예정됐다. 하지만 여름부터 창궐한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어서 행사는 거듭 연기됐고, 그해를 결국 넘겼다. 1902년 8월 10일, 칭경예식사무소가 의정부에 보낸 공문에는 칭경행사 비용이 100만 원으로 나와 있다. 당시 대한제국 총예산은 758만 5,877원(세출 기준)이었으니, 나랏돈 13.2%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 얼마나 황당한 낭비인가 말이다. 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세 가지 사건

 

1543년 3월 21일, 유럽 - 지동설 발표

1543년 9월 25일, 일본 - 철포 수입

1543년 날짜 미상, 조선 - 서원 설립 

 

 

 

 

대한민국 징비의 열쇠

 

 

개방교류, 다양성대중의 각성. 이 네 가지 단어에 임하는 지도자의 자세가 한 나라 백성을 고난으로 이끌었고 한 나라 백성을 부강한 나라로 이끌었다. 유럽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게 서기 1543년에 벌어진 세 가지 사건과 21세기 대한민국을 연결하는 '징비懲毖의 열쇠'다. - '에필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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