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선비의 서재에 들다 - 고전에서 찾아낸 뜻밖의 옛 이야기
배한철 지음 / 생각정거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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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밖에도 역사의 원천은 무수하게 존재한다.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학문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사대부들은 개인 문집 등 방대한 저작물을 양산해냈다. 시와 수필, 상소, 행장, 비문 등 형식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정치, 제도, 과학, 역사, 세태, 풍속 등 다루는 분야도 실로 광범위하다. 이들 저작에는 실록에서 다루지 않은 사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고, 더러는 내용이 전혀 다른 경우도 많다. 양반 사대부만 기록을 남긴것도 아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경제가 발전하고 이에 따라 신분제도가 완화되면서 일부지만 여성은 물론, 중인 이하의 하층민들도 기록물을 생산하여 우리의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 '머리말' 중에서

 

 

실록 밖의 기록물에서 찾은 감춰진 역사

 

이 책의 저자 배한철은 구미 출신으로 1995년 〈매일경제〉에 입사했다. 정부 부처를 출입하면서 정책 기사를 주로 써왔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경영학으로 내리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저널리즘이 유명한 미국 미주리대학교에서 방문연구원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의 오랜 꿈은 역사학도였다. 당시에는 역사가 단순히 연대를 나열하고 사건이나 제도를 암기하는 지루한 과목이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국사 선생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수업을 진행함으로써 그를 매료시켰던 것이다.

 

2012년 우연찮은 기회에 문화재 관련 취재를 맡으면서부터 묻어두었던 역사학도의 꿈을 마음껏 펼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와 네이버에 한국사와 고미술, 고전 등을 주제로 다양한 칼럼을 쓰고 있다. 역사는 재미있어야 한다고 믿으며, 이를 위해 오늘도 고전과 문화재를 찾아 기자수첩을 들고 박물관과 종갓집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사 스크랩>(2015년 세종도서 선정),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2016년 이달의 읽을 만한 책 선정, 2017년 세종도서 선정) 등이 있다.

 

조선 왕조는 '기록의 나라'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는 명예로운 기록물을 남겼다. 즉 조선은 왕이 죽고나면 왕이 재위했던 기간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왕조실록으로 후손들에게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가치를 알아본 유네스코는 <조선왕조실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했는데, 이는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0여 년 동안 시간순으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한, 1893권 888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역사서다. 이를 역사학계에선 '정사正史'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비교적 객관적인 사료로 평가받는 '정사'만이 올바른 내용일까? 소수의 사관들이 저술한 이 기록물이 과연 형평성에 기울지 않고 정확성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을까? 당파로 나뉘어 정치적 대립과 갈등을 표출했던 시대상을 감안해 볼 때 자기 편에게 유리한 내용을 다루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예로 저자는 임진왜란 대 전소된 경복궁을 거론한다. 실록은 한양에 침입한 왜군들이 궁궐을 약탈하고 불태웠다고 기록한다. 반면에 조선 중기의 문신이 저술한 <송와잡설>에는 왕이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자 백성들이 몰려나와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고 말한다. 진정 올바른 역사는 무엇인가? 이 책은 48권의 고전에 기록된 우리의 역사를 들춰내고 있다. 

 

 

    

 

 

세종의 황당한 돌출행동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세종은 궁궐에만 머물며 집현전 학사들과 한글 창제에 몰두했을까? 그렇지 않다. 세종도 밖에 나다니길 좋아해서 한 달 이상 궁궐을 비우기 일쑤였고, 술에 취한 날이 많았다. 믿기지 않은가? 선조 때의 문신 박동량의 야사집 <기재잡기>에 따르면 세종은 친히 안성, 평택, 용인, 여주, 이천, 경기 광주 등지로 사냥을 다녔는데 한 달이 지나서 환궁했다가 이튿날 또 떠나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당한 돌출행동도 있다. 죽천 이덕형은 <죽창한화>에서 세종이 형 효령대군의 증손녀를 지방의 한미한 집안 선비와 강제로 결혼시킨 비화를 거론한다. 세종은 여러 대군, 왕자들과 함께 제천정(한남동에 있던 정자)에서 잔치를 벌였다. 마침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강을 건너느라 강어귀가 꽉 찼다. 세종은 그들 중 유독 의관이 남루하고 얼굴이 수척한 한 유생을 불러오게 했다. 세종은 예를 다해 선비를 맞고 이름을 물었다. 선비는 "영남의 현석규"라고 답했다.

 

세종은 주위를 둘러보며 "여기 누가 혼기를 맞은 여식이 있소"라고 물었다. 형인 효령대군이 나서 "제 손자 서원군에게 혼기가 찬 딸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세종은 "만일 사위를 얻으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효령대군은 "가문이 대등하지 못하다"고 거절했지만 세종은 "영웅이나 호걸인 선비들이 초야에서 많이 나왔으니, 이 선비집 아들과 정혼하도록 하시죠"라고 고집을 피워 결국 혼인이 성사됐다.

 

다행스럽게도 현석규는 훗날 세조 때 별시 문과에 을과(3등급 중 2등급)로 급제, 이후 정2품 우참찬까지 벼슬을 했다고 한다. 과연 세종의 안목이 남달라서 백 보 밖에서 우연히 한번 본 사람을 영웅이나 호걸로 판별할 수 있었을까? 결코 믿을 수 없는 행동이다. 명문가의 훌륭한 자제들도 많았을텐데, 왜 시골뜨기를 강압적으로 사위로 삼게 만들었는지 세종의 진의를 알 길이 없다. 

 

 

선조는 반전 종결자였다

 

조선사에서 선조만큼 무능한 왕은 없다. 정치적 판단에서 오류를 범해 임진왜란을 자초했던 왕이었으며, 왜군이 한양까지 올라오는 상황이 생길 것 같으니까 광해군에게 임시 왕을 임명하고 자신은 도성과 궁궐을 버리고 명나라로 피난길에 나선 군주였다. 학교에서 이렇게 국사 공부를 받았으니 이게 전부인 줄 알고 있다. 하지만 선조의 뜻밖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많다.

 

심노승의 <자저실기>에 따르면, 명나라에서 '동방문사東方文士'로 칭송받던 차천로가 젊은 시절 과거시험 감독으로 참여해 고향 사람의 답안을 대신 써주었다가 들통나고 말았다. 더구나 이 사람은 장원으로 뽑혀서 상황이 심각했다. 선조는 차천로를 함경도로 축출한 후, 북병사에게는 따로 "재주가 아까우니 잘 대우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선조는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었다. 율곡 이이는 "(선조가)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외모가 깨끗하고 빼어나다"고 묘사했다. <석담일기>에 따르면 선조는 학문을 즐겨 웬만한 학자들보다 학식이 높았다. 명종도 하성군(선조의 왕자 시절)을 볼 때마다 "덕흥(선조의 친부, 명종의 이복형)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며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선조는 '도학군주道學君主'를 자처하면서 경연에 나오기를 즐겼다. 경연에서 던지는 질문이 날카롭고 깊이가 있어 강관들도 강의를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박순은 시강하고 나오면서 "임금은 정말 영명한 군주"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석담일기>는 서술했다.

 

 

반석평은 재상가의 노비였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의 조상으로 유명한 노비 반석평의 일화도 소개한다. 반석평은 재상가의 노비였다. 비록 신분은 천했지만 성품이 바르고 영특했다. 재상은 그 재주를 아껴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글을 가르쳤으며 반 씨 성을 가진 부잣집에 입양시켰다. 반석평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이 정2품 지충추부사에 이르렀다.

 

반면, 재상집은 재상이 죽은 뒤 몰락한다. 반석평은 재상의 자식들을 거리에서 만나자 마차에서 내려 절을 올렸다. 반석평은 그러면서 나라에 글을 올려 국법을 어기고 벼슬에 오른 죄를 스스로 실토하면서 처벌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를 오히려 의롭게 여겨 후하게 장려하고 국법도 파기했다. 이에 대해 유몽인은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지 곰곰히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나라의 인재는 중국의 천분의 일에도 못미치는 데도 이들 가운데 신분이 천한 자는 벼슬을 못하게 견고하게 막고 있으니, 이는 사대부들이 편협하고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낮에는 존경받는 정승, 밤에는 희대의 호색한

묵재 홍언필(1476~1549년)과 인재 홍섬(1504~1585년)은 '부자父子 영의정'으로 명성을 떨쳤다. 인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묵재 홍언필은 재물을 멀리한 원칙주의자였다. 자식들조차 옷을 갖추지 않고서는 만나지 않을 만큼 법도를 엄격히 지켰다. 선조 때 영의정을 3번이나 중임한 아들 홍섬 역시 경서에 밝았으며 가풍을 이어받아 검소하기까지 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고금소총>에는 이들 부자의 전혀 다른 모습이 소개된다. 호색한好色漢인 홍섬은 여종들과 무분별하게 어울렸다. 한여름 밤 여종들이 방에 흩어져 자고 있었는데 그는 알몸으로 자신의 방에서 몰래 나와 평소 눈여겨보았던 여종을 찾기 위해 여종들의 방을 살금살금 기어다녔다. 인기척 소리에 잠이 깬 아버지 홍언필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리고 "아들이 장성한 줄 알았더니 이제 막 기어가는 것을 배운 모양이구나"라고 소리쳤다. 깜짝 놀란 홍섬은 놀라 달아났다. 색을 밝히는데 벼슬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모자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

 

한국드라마가 넷플릭스와 손을 잡고 전세계를 대상으로 동시 개봉한 사극형 좀비물인 <킹덤 시즌1>은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드라마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뜻밖에 해외팬들의 반응은 극중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모자에 주목한다는 반응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신분차별이 명확했기에 사용하는 모자도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가히 조선은 '모자의 나라'였다. 식사를 할 때도 겉옷은 벗더라도 모자만은 반드시 썼다. 그런데 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덕무의 <앙엽기>의 한 대목이다. "갓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나룻배가 바람을 만나 기우뚱거릴 때 조그마한 배 안에서 급히 일어나면 갓 끝이 남의 이마를 찌르고 좁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에는 남의 눈을 다치게 하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난쟁이가 갓 쓴 것처럼 민망하다. …(중략)… 역관들이 연경에 들어갈 때 요동 들판을 지나가다 비를 만나면 양태는 파손되어 달아나고 모자만 쓰고 가니...."

 

모자를 중시하는 풍습이미 고려 때도 존재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은 "고려인은 모자를 쓰지 않은 맨머리를 죄수와 다름없다고 수치스러워했다. 무늬가 들어간 비단 재질의 두건을 소중히 여겨 두건 하나의 값이 쌀 한 섬에 달했다. 가난한 백성은 이를 마련할 길이 없어 죽관竹冠을 만들어 썼다"고 기록했다. 풍습은 생활양식이기에 폐해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건강식으로 평가받는 한국의 쌈

 

드라마와 K-POP으로 촉발된 '한류'라는 문화 코드가 이젠 한국음식, 한복, K뷰티 등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문화란 국경이 없는 무형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이미 우리나라의 사료에 따르면, 중국의 사신들은 한반도로 다녀가는 걸 선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 좋고, 공기 좋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을 수 있으며, 금수강산으로 풍치도 뛰어났으니 말이다. 

 

세계인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한국인의 은 독창적이면서도 건강에도 좋은 식품이다. 우리의 쌈 문화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상추는 쌈 문화의 대표주자이다. 상추라는 말은 채소를 날 것으로 먹는다는 뜻의 '생채生菜'에서 유래한다. 고구려인들이 상추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한치윤의 <해동역사>에는 고구려의 상추씨가 중국에서 인기 절정이었다고 서술한다.

 

"고려국 사신이 오면 수나라 사람들이 채소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후하게 쳐줘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했는데 지금의 상치다. …(중략)… 고구려 사람들은 생채로 밥을 싸 먹는다"

 

 단원의 <풍속도첩> 중 '점심'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체험기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1851~1921년)는 자신이 모셨던 명성황후고종을 비롯한 여러 왕실 인물들의 비화를 소개한다. 그녀는 기독청년회YMCA와 연세대학을 설립한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이자 명성황후의 주치의였다. 사실 그녀는 조선인들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는 그녀의 저서 <상투튼 사람들과 한께한 15년>(1904년)에 소개되었다.

 

"조선인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노동자이다"

 

고종 32년(1895) 위세를 떨치던 콜레라가 잠잠해지던 10월 8일, 경복궁에서 엄청난 참극이 발생한다. 그날 새벽 언더우드 부인은 대궐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불길한 징조를 느꼈다. 그리고 왕비가 죽었다. 공격 부대는 총을 쏜 뒤 아무런 저항 없이 대궐 안으로 쳐들어갔다. 의화군(의친왕)이 총소리를 듣고 도망치자고 왕비에게 간청했지만, 대비를 홀로 남겨두고 갈 수 없다면서 의화군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정병하"두 분 전하(고종, 명성황후)는 안전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언더우드 부인은 정병하를 가리켜 "천한 사람이 왕비 덕에 출세하고 큰 은혜를 입었는데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암살자의 하수인이 됐던 것"이라고 했다. 적의 무리는 가련한 왕비를 찾아내 찔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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