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리더십 경영
윤형돈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우리가 많이 아는 조선의 인물을 중심으로 별도의 기본 지식 없이 그들의 리더십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한 책이다. 얼핏 보면 리더십 자기개발서에 가깝다. 다만 다른 자기개발서와는 형식이 다르다. 이 책은 그들을 위인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이해하고, 그들의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를 바탕으로 현대인이 빌려 쓸 수 있는 지식에 집중한 역사 자기개발서, 아니. 역사를 바탕으로 자기개발을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책이라 하겠다. - '서문' 중에서

 

 

조선의 역사적 인물을 통해 리더십을 배운다

 

이 책의 저자 윤형돈은 다섯 살에 처음 책을 접한 뒤 지금까지 각종 한국사, ·세계사 책을 섭렵해서 메모, 스크랩 해왔다. 중학교 때 역사 답사에 흥미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박물관과 유적지를 누볐고, 이것이 지금의 창업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 매출 3만 원을 올린 첫 창업을 했고, 이후 갖가지 사업 아이템을 기획해서 용돈을 벌었다. 이 경험은  MBA, 즉 경영학 석사 과정으로 이어졌고, 외국계 기업, 대기업, 벤처기업을 거치며, 투입비용 대비 두 배의 이익은 반드시 뽑는 기획자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접하면서 사람들의 장점을 흡수해서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이후, 수십 년간 쌓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역사를 활용한 교육컨설팅, 역사 리더십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 제공하여 매출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블로그에 올린 그의 글은 경제경영분야 1위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최신 사례를 덧붙여 이 책을 집필했다. 현재 역사, 문화 전문 교육컨설팅, 강연 기업인 역사클릭의 대표이자 작가로서 영어권, 일본어권, 중국어권 경제지 등을 뒤져가며 후속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책에는 조선시대를 살았던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비록 과거의 인물들이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인간 군상들과 많이 닮아 있다. 즉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전략을 바꾼 세종,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를 거부한 중종과 선조, 정치 능력을 앞세워 임기응변식 처세에만 능했던 가짜 리더 원균과 정반대의 이순신, 기득권과 승부를 벌인 진짜 리더 김육 등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훌륭한 리더십 롤모델이다.

 

"역사는 우리들의 내일을 비추는 거울이다"

 

저자가 리더십에 주목한 이유 또한 리더십이 현재를 현명하게 살아가는 처세의 기술이자, 미래를 대비하는 통찰력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총 4부로 구성된 책은 현재의 시각으로 조선의 리더를 해석함으로써 스스로를 물론이고 타인의 삶을 이끌어주는 진짜 리더의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해답을 찾아주는 멋진 역사 여행인 셈이다.

 

 

 

 

조광조, 용의 비늘을 건드리다

 

나중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는 한자의 파자로, 주초는 바로 조趙가 됨) 사태의 주모자로 몰린 조광조와 당시의 군주 중종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그래서 신하인 조광조는 중종이 자신을 믿고 지켜준다고 믿었고, 또한 중종도 자신의 심복인 조광조가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신뢰는 알게 모르게 금이 가고 있었다. 이 금이 본격적으로 커진 계기는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이었다.

 

중종은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위훈삭제란 가짜 공신 훈작을 색출하여 박탈하는 것을 말하는데, 당시 조정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훈구파 대신에게 잘 아부한 탓에 공신이 되어 수많은 특권을 누리는 세금 도둑들이 있었다. 조광조는 이들에게 칼을 겨누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문제가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즉 당시 조정의 실세인 훈구파를 견제하려고 반정 참여와는 상관 없이 자신에게 협조적인 인물에게도 위훈을 부여했던 중종 자신도 개혁의 대상이 되고만 셈이었다.


위훈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사안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신은 30여 명 정도다. 그런데 공신으로 책봉된 사람은 117명으로, 무려 80여 명이나 차이가 난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공신 책봉 자체가 엉터리였기 때문이다. 반정의 공신은 철저하게 반정 중심 세력의 이권에 따라 선정되었다. 그래서 진짜 공신의 일부는 재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태가 생겼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판은 이렇게 야합이 많았다. 조광조가 개혁정치의 수단으로 내놓은 위훈삭제는 나라를 좀먹는 가짜 공신을 처리함과 동시에 중종에게도 칼을 겨누는 조치였던 것이다.

 

과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들은 이를 이미 알고 있다. 왜 이런 처분을 받아야만 했을까? 저자는 '일 잘하는 사람''공부 잘하는 사람'을 거론한다. 전자는 왕의 분위기에 맞추어 선을 조절하거나 아니면 왕세자의 스승이 되어 모든 걸 걸었을테지만, 불행하게도 조광조는 후자였다. 전체 상황 판단은 뒷전이고 오직 상급자를 바꾸는데 올인했던 것이다. 왕권을 침해하는 자,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증종도 상급자의 자질이 부족함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 아니겠는가. 

 

 

세조의 술자리 정치 

조선조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칭송받는 세종의 아들이자, 대군의 신분으로 군주 세종의 추진 업무에 충실한 역할을 했던 세조는 유난히 술자리에 집착했다. <세조실록>에 '술자리'가 언급된 횟수는 무려 467건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틀어서 술자리가 974건 언급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조선 왕조의 술자리 반을 혼자서 해먹었다고 할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세조실록 = 술판 실록'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이쯤 되면 조선왕조실록의 '주酒님'이다.

 

이 술자리에는 세조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절충안적 성격이 보인다. 우선 그는 칼과 피로 왕의 자리를 따냈다는 이미지를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 친목을 중시한다는 모습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싶었다. 그리고 대신들과 관계를 맺어 불안함을 떨쳐내고자 했다. 나중에 피부병으로 고생하다 생을 마감한 걸로 봐서, 술이 세조의 수명을 단축한 셈이었다. 

 

세조가 술자리의 힘을 빌려 그들과 화합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달리 말하면 일상생활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유독 술자리에서 민감한 국가의 정책을 의논하고, 새로운 학문을 경연했다. 즉 세조의 술자리는 오늘날의 '국무회의'였던 것이다. 희한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도 기업이나 정치인의 중요 정책이나 합의가 술자리에서 나오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술자리에서 결정된 선택이 과연 올바른 결론이었을까?

 

 

기득권과 승부를 벌인 김육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김육을 우의정으로 발령냈다. 뛰어난 일처리로 인조의 총애를 받은 몸이니 당연한 인사였다. 하지만 김육은 병을 핑계로 세 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럼에도 뚝심이 남달랐던 효종은 그의 사직서를 모두 반려했다. 하는 수 없이 김육은 왕의 발령을 수용했다. 그런데, 순수하게 받아들인 게 아니라 특별한 조건을 달았던 것이다.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려 즐겁게 생활하며 일하지 못하기에, 원망하는 기운이 쌓이고 맺혀 그 형상이 하늘에 보일 정도입니다. (중략) 대동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 <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저를 쓰시려면 대동법을 시행하시고, 아니면 노망 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마십시오"

 

당시 북벌을 준비 중이던 효종은 재원 확보가 절실했다. 이를 위해선 세제 개혁이 필요했다. 하지만 직접 대신들과 힘겨루기에 곤란했다. 이런 판국에 김육이 나서서 백성들을 위해 기득권층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겠다고 하니 아마도 속으론 춤이라도 추고 싶었을 것이다. 대동법의 실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묻혀있던 이 법이 다시 고개를 들자 기득권층은 난리가 났다. 예조참판 김집을 중심으로 하는 산당이 김육을 공격했던 것이다.

 

그래도 김육은 기존의 단점을 보완해, 대동법을 밀어붙였다. 효종 6년 7월까지 그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직을 번갈아 맡으며 조정의 정책을 주도했다. 김육의 방납 비리 해결책은 간단했다. 품목을 쌀로 통일하고, 재산이나 땅의 규모에 따라 납부하도록 했다. 인조 때의 실패를 거울삼아 품목과 수량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그는 벼슬을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30년을 대동법에 매달렸다. 백성을 이한 진짜 리더였다.  

 

 

가짜 리더 선조는 스스로 무덤을 팠다

선조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왕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이때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해서 아름다운 강토를 유린하자 그는 명나라로 망명을 시도했다. 그러자 명나라는 일본의 침공이 거짓말이고, 오히려 조선과 일본이 힘을 합쳐 명을 치려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따라서, 명은 선조가 망명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군사 원조를 요청받은 명나라에서 이여송이 출정하자 선조는 왕의 체통도 버리고 버선발로 그를 맞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중용한 이항복, 류성룡, 이순신 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했다. 그러니 왜란이 발발했어도 충신들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이순신이 올린 장계는 믿지도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도 불신하면서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사람은 그 직위와 위치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 하지만 이를 잊는 사람이 참 많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법을 수호해야 하는 법관이 권력과 사익을 위해 판결을 거래하는 식의 사건이 태연하게 벌어진다. 아마 이러면 이득은 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을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떡고물이 탐이 나면 모를까. 당연히 떡고물이 권력이기 때문에 끈 떨어지면 끝이다.

 

이 공식은 현대의 공직자, 정치가, 기업은 물론 일개 샐러리맨에게도 적용된다. 앞서 말했듯 가짜 리더의 수명은 꿀 떨어지면 끝이다.


리더의 힘은 책임을 지는 데서 나오고 리더의 권력은 처신을 잘하는 데서 나온다. 누구보다 눈을 뜨고 변화에 주목해야 하며, 팀의 목적을 부각시켜 주고 그들을 독려해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의 허물은 그대로 돌려주고 자신의 허물까지 부하에게 덮어씌우던 선조는 훌륭한 반면교사다. 역사상 가짜 리더의 말로가 대부분 이렇다.

 

 

갑질의 대가 홍국영

 

홍국영은 정조의 가장 큰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각종 사료의 기록을 보면, 그는 미남이었고, 눈치도 빠르고, 언변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 가리기로 유명한 영조 역시 그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가 즉위하자 홍국영은 날개를 단 격이었다. 정조는 즉위 직후 정후겸과 홍봉한을 숙청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세손 시절 홍국영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공신이 되자 그는 자신의 의무를 잊고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앉히고, 여기서 태어난 조카를 차기 왕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갑질을 일삼아 동생이 원빈이란 칭호를 받도록 만들었고, 자기 동생에게 당나라 개원례 황조의 비빈 예를 적용, 그녀가 살던 궁에 효휘궁 孝徽宮이라는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덕분에 1년밖에 못 살고 아들도 못 낳은 후궁의 장례가 당대 최고 신하들의 주도하에 호화롭게 치러졌다. 여기에다 공무를 중지하고 26일간 조의를 표하는 절차를 적용했는데, 이는 왕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나 적용되는 제도였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다.

 

도가 넘치고도 넘친 행위였다. 하지만 홍국영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후 정조가 후궁을 들이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다. 중전이 자식을 못 낳은 상황이고, 정조의 나이는 20대 중후반인데 무얼 어쩌라는 것인지? 이에 그는 창조적인 답을 내놓았다.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의 아들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게 한 후 군호를 만들어 붙인 것이다. 그 이름은 완풍군 完豊君. 완풍군이라는 이름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 그리고 홍국영의 가문인 풍산 홍씨의 '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서 만든 것이다. 하여간 머리를 잘 돌아간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의 말로는 비참하다.

 

 

영조와 박문수

 

영조는 좀생이 편집증 환자다. 박문수는 이순신처럼 늦게 33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성적도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3수 끝에 41명 중 26번 째 성적이었다. 그럼에도 실무 감각이 뛰어난 탓에 영조의 눈에 들어 불과 15년 만에 병조판서직까지 승진했다. 물론 이후에 파직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영조는 괴팍한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별로 신경 안 쓰는 행동을 하는 박문수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예의범절을 문제 삼아 처벌하기 일쑤인 왕이 무례와 막말을 일삼는 박문수만은 감싸주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신뢰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인데, 이 신뢰관계는 '서로 간의 대화,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다. 영조와 박문수는 세제와 스승 시절부터 탕평책에 대해 토론을 해왔다. 균형 있는 인재 육성을 위한 국가 발전이라는 대계에 공통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속내를 아는 사이니 대놓고 들이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영조는 박문수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진정한 충신이자 탕평을 위한 정확한 통찰력을 가진 인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려운 숙원사업을 하는데 방향성도 같고 통찰력도 있는 인재를 내쳐서야 말이 되는가? 오히려 그의 의견을 더 들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삿대질을 하고 달려든 그를 한사코 보호한 이유다.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쉬운 대목이 많이 등장한다. 만약 이 때 이런 방향으로 갔으면 하고 아쉬워하게 된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법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로 돌아가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럼에도 역사 속의 인물들을 통해 우리들은 진짜 리더십이 무엇인지 제대로 통찰할 수 있는 유익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경제 위기가 목전에 와 있는 듯한 이 때 진정한 리더십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리더십을 연구하는 많은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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