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10쪽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간단히 말하면 '시의 힘'이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런데 이 '움직임'에는 어떤 '계산'도 들어있지 않다.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는 확신 아래서도 그것을 하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도록 하는 힘, 그것이야말로 '시의 작용'이라는 거다. 

 사실 나부터도 시를 가까이 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처지다. 그것이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든, 자유든, 투쟁이든, 어떤 문제 의식 속에서 써내려간 것이든 '시'는 뭔가 '난해한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인식을 뇌리에 박고 살고 있는 탓이다. 그러면서도 시를 흉내내기도 하고 있으니 나라는 인간도 참으로 이해불능인 존재인 거다. 

 그럼에도 흉내에 불과하지만 내가 그 흉내를 계속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마음에 어떤 '불꽃'과도 같은 것이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일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것 역시 진실이다. 모두에게 그렇기를 바라지 않는다. 누군가, 저자인 '서경식'이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독자'가 어딘가에는 있어 순간의 공감이라도 일기를 바라는 마음인 거다.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시의 힘'을 바르게 알아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저자는 나를 '시'에 순간이나마 머물게 했고, 마음이 동하는 것을 느끼게 했다. 

  186쪽

 부모님이 일본 군국주의에 대해 소극적 반항, 이른바 불복종을 실행할 수 있던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이 갖는 부정적 측면, 다시 말해 인민을 '국민'으로 편성하고 국가를 위해 동원한다는 기능에 부모님은 연관되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 덕분에 자신의 판단에 따라 불복종을 실행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를 대상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의 힘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무슨 '교육'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을 수 있겠다. 하지만 교육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의 작용을 지배한다. '무의식'은 순수하게 '어떤 외부의 작용도 없는 상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교육되고 학습된 외부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위에 발췌한 부분은 저자의 부모님이 배우지 않았기에 적어도 물리적으로 자신들이 속해 있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분리가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교육의 부재'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까지 담겨 있는 것만 봐도 알겠지만 이 책은 단순히 '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와 그 언어에 속해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와 국가가 지향하는 바에 관해서까지 두루 살피고 있는 거다. 왜 언어와 교육에 대한 논의가 필요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저자는 스스로는 '조선인'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일본어를 모어로 삼고 있으며, 거의 모든 순간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에 대한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정체성 문제에 오랜 시간 곱씹어 왔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시의 힘이 마음을 움직이는 데 있다면 그 마음은 무엇으로 되었을까? 어떤 언어로,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까를 생각해야만 하는 거다. 우리는 아는 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알고 있는 언어가 하나라면 그 언어를 통해서만 '사실'을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다. 교육이 중요한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배운'대로만 생각할 수 있다. 그 배움을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 배웠든, 거부하는 것을 통해 배웠든 하는 문제는 그 뒤의 일이다. 

 위에 발췌한 내용은 '정말 교육이 필요한가?'와 '교육받지 않은 것은 언제나 나쁜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배우지 않는 것이 배운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196쪽

 글자를 모르는 이들과 접할 때는 눈높이를 맞추어(즉 눈높이를 낮추어서) 보라는 둥 하지만, S 목사와 어머니의 관계를 보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S 목사가 사용하는 어렵고 관념적인 어휘에 어머니가 소박한 의문을 직설적으로 던짐으로써 어머니뿐 아니라 S 목사 쪽에서도 배운 것이 많았을 테니까 말이다. 


 '가벼운 시'가 유행이다. 가볍지만 묵직함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아니다, 묵직함을 던지지 않아도 괜찮다. 가볍더라도 널리 읽힐 수 있는 '재미있는 시'가 유행한다고 하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지 모른다. 이런 경향을 두고 '시대에 맞춘' 혹은 '경향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라고 하는 평가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이런 평가가 옳은 걸까? 지금 세대에게 너무 난해한 표현, 단어, 문장은 이해되지 못할 뿐 아니라 거부감만 줄 수 있어 점점 더 거리를 멀어지게 할 뿐이기에 모든 시인이 '쉽게 쓴 시'를 선보여야만 하는 걸까? 그건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똑부러지지 않아도, 단순하지 않고 모호하더라도 그 모호함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시의 힘'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모호함 속에서 두드러지는 단호함, 혹은 분명함이 아닐까? 어려운 것이 이해되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 쉬워질 필요는 없다. 어떤 것들은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어도 좋고,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하는 거다.

  224쪽

 프랑클과 레비 사이에 있는 것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가혹한 현실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임상적' 차원과 그 현실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는 '병리학적' 차원 사이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차원은 원래 서로 배제하고 대립하는 것이 아니지만, 자주 혼동되고 때로 동일한 평면 위에서 부딪히기도 한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고자 무익한 노력을 하느니, 주어진 운명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가 중요하다'라는, 말하자면 사고 정지의 메시지로 왜곡되어 '감동적'으로 소비된다. 이와 같은 수용은 일어난 사건 그 자체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막는 데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랑클과 레비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의 생존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전하고자 하는 방식과 태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 프랑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읽어봤기에 빅터 프랑클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프랑클의 시점은 '위대해 보이기'는 하지만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인간의 의지 혹은 초월적 존재의 뜻에 가까운 것으로 수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보면 프리모 레비는 빅터 프랑클처럼 '고난의 극복'보다 그러한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고민하고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하는 문제에 머물렀던 것 같다. 

 학교에서 배웠던 것을 돌아보면 '시'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어떤 것은 '저항시'가 되고 어떤 것은 '참여시'가 되며, 어떤 것은 탐미주의적이 되고, 어떤 것은 목가적이 되며 또 어떤 것은 서정적이 된다고 한다. 어떤 시가 가장 '좋다' 혹은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다만 앞에 적었던 프랭클과 레비의 '견해 차'를 생각해보면 각각의 시가 갖는 '힘'에 대해 한번은 생각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시들은 나름의 가치와 힘을 갖는다. 하지만 그 시가 그 자체로 품고 있는 힘보다는 그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이 더 커다란 힘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시의 힘'은 읽는 이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다.

  230쪽

 피해의 진원지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일수록 피해의 진실에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하려 노력하고, 피해의 진원지에 가까운 이들일수록 용기를 내어 가혹한 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증언자(표현자)는 '표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증언(표상)에 도전해야만 하고, 독자는 스스로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려고 애써야만 한다. 더 없이 어려운 일이지만, 참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 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다.


 흔히 문제에 맞닥드린 사람들의 부족한 인식, 혹은 어지러운 반응에 훈수를 두듯 "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하느냐?"는 식의 물음을 던지고는 한다. 하지만 장기를 두더라도 당장 장기를 두는 당사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훈수를 두는 이에게는 잘 보이는 법이다. 다르게 말하면 사실과 현장에 가까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잘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저자의 표현대로 '진원지'에 가까운 이들이 정보 부족과 사태 파악의 혼선에 시달리기 쉽다. 오히려 가까이 있기에 볼 수 없게 되는 거다. 반대로 멀리 있는 사람들은 현장을 '잘 알 수 있지'만 그 현장이 어떨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등장 인물들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평하듯이 '남의 일'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거다. 저자는 이러한 양쪽의 측면을 모두 지적하고 있다. 가까이 있는 이들은 '용기를 내어 진실을 직시'해야 하고, 멀리 있는 이들은 '피해의 진실에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거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참극의 재발을 막기 위'함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시인은 언제나 최전선의 '증언자(표현자)'의 역할을 맡아왔다. 이 책 속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시인들이 모두 그런 증언자들이다.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들의 시를 '배우는 것'을 통해 다른 무엇이 아닌 '왜 그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는 거다. 이것 역시 '시의 힘'이다. 

 270쪽

 "눈물 날 것 같아. 이거 내 얘기예요……."

 모든 것을 픽션화해왔던 젊은이가 시의 힘으로 처음 '생명'을 실감하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어쩌면 나만의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시는 대단히 압축적이고 함축된 표현으로 가득하다. 아마도 시가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이러한 압축 혹은 함축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지 너무나 선택지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다는 것 역시 하나의 커다란 원인일 거다. 하지만 종종 그런 벽을 넘어서 순식간에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느끼고 당황하게 되기도 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나 기쁨, 감동을 느끼게 하는 힘을 시는 품고 있는 거다. 저자는 이런 힘을 두고 '생명을 실감하는 순간'이라고 적었다. 물론 저자의 욕심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이기는 했지만 나 역시 그렇기를 바란다. 결국 시는 마음을 통해 마음으로 전해져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태생적으로 품고 있는 것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