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림자가 너무 커져버리면 그림자 속에 있는 걸 모르게 되어버린다. 그러다 그림자가 걷히게 되면 강렬한 빛에 눈이 멀어버려 또 모르게 된다. 결론은 단순하다. 스스로를 살피고 지킬 파수꾼 하나를 세워두면 된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지?" 하고 물었을 때, "너는 지금 그림자 속에 있어." 하고 말해줄 파수꾼. 

 "내가 이제 어디로 가게 되지?"하고 물었을 때, "너는 이제 강렬한 빛으로 나가게 될 거야."하고 미리 일러줄 파수꾼.

그런 파수꾼 하나 세워두고 있는지.


 <앵무새 죽이기>는 잊어도 괜찮다. <파수꾼>을 읽는 데 <앵무새 죽이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파수꾼>을 재미 없게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여기서 줄거리를 주구장창 늘어놓는다든지 하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겠으니, 안심해도 좋다.


 진 루이즈는 스물 여섯이다. 고향을 떠나 뉴욕에서 지내다 휴가 차 내려와 있는 중이다. <파수꾼>은 고향에 내려온 날부터 불과 2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진 루이즈가 평생에 정의이자 올바름의 화신이라 여겼던 아버지의 이면을 목격하고 거기서 느낀 절망과 좌절, 그리고 회복까지를 그려내며 진정한 탄생, 혹은 성장에 이른다는 교훈적인 이야기인 거다. 그 소재가 인종차별이고, 배경이 미국의 남부라는 건 사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는 별 의미 없었다. 


 솔직히 처음 120쪽까지를 읽는 건 고통스러웠다. 오랜만에 빅토르 위고의 워털루 전투 묘사를 읽었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게다가 스물 여섯의 진 루이즈는 친구들에게 전해들은 프렌치 키스만 해도 임신한다는 말을 믿던 열한 살 때나 다름 없는 사춘기 소녀 같이 보였다. 그렇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의 어떤 모습을 본 것만으로 경멸하기 시작해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결심을 한다는 식의 행동을 사춘기의 질풍노도가 아니고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왜 나한테 정의와 정의, 올바름과 올바름의 차이를 구별해 주지 않으셨어요? 왜요?_352쪽」

가장 대표적으로 사춘기적 특징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너무나 확고히 믿고 있는 데서 생겨난 단순한 착각이 낳은 실수다. 역시 아이다운 발상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다. 자신을 속였던(그렇게 여기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에서 시작된 반항이 왜 자신을 '바로잡아주지 않았느냐'는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거다. 왜 아버지가 바로 잡아줬어야 했는가? 누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이들은 그것을 가르쳐줬더라도 "왜 그렇게 밖에 가르쳐주지 못했느냐?"며 따지고 들 부류다. 이미 자신의 생각이 정답(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단순히 아버지를 탓하고 비난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되묻는 건 비열하기까지 한 태도다. 


 아아, 작품 속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진짜 감상을 적어보련다.


 솔직히는 이 책을 받던 날 밤을 새서라도 읽고 싶었다. 하지만 첫날 밤은 앞쪽 50페이지를 읽는 게 고작이었다. 밤이 늦기도 했거니와 좀처럼 집중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그렇게 둘째 날도 지나갔다. 그리고 셋째 날이 되어서야 다 읽고 감상을 적고 있는 거다. 

 처음에 "이 책이 정말 작가가 만족해서 내놓은 '완성본'인가?" 하는 의문이 자꾸만 떠올랐다. 몇 가지 단서를 적자면 하나는 처음에는 '그녀는'이라는 말을 자주 쓰다가 나중에는 '진 루이즈'라고 쓰고 있는 점이다. 왜 인칭을 달리 했을까 싶어졌다. 오히려 '그녀는'이라 칭하던 부분에 진 루이즈 자신의 회상이나 경험이 더 많았기에 더더욱 낯설었다. 또 하나는 매끄럽지 않은 연결이다. 의도된 표현에 의한 것인지 장면의 전환이 분명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읽으면서 책 속 이야기가 며칠에 걸쳐 일어난 것 같건만 끝나고 보니 하루, 혹은 이틀이 지났을 뿐인 거였다. 나중에 한 번 더 읽게 되면 이 부분을 좀 더 눈 여겨 볼 생각이다. 또 하나는 이 작품이 <앵무새 죽이기>보다 먼저 쓰여졌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왜 편집자가 다른 '시선'에서 이야기를 바라보기를 주문했는지 알 것 같다고 느꼈다는 거다. 이 이야기는 몸은 스물여섯인지 몰라도 자아는 10대 초반 혹은 중반 정도인 어린 아이처럼 보인다. 그런 '부자연스러운' 점을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완성의 인상을 더 강하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작가의 저력을 실감하기 시작한 것은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가던 300쪽 부근 부터다. 진 루이즈나 그녀의 아버지보다 삼촌의 활약이 눈부셨다. 단순히 박식하다거나 유머러스하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확실한 파수꾼을 세워놓고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까지를 지켜내고 있는 존재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진 루이즈의 삼촌인 걸로 한다. 


 이야기 속에서 진 루이즈는 인종차별행위는 물론, 발언, 암시에 이르기까지 반대하고 항의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치 심한 오이 알러지가 있는 사람이 오이 냄새만 맡아도 알러지를 일으키는 것처럼 뉘앙스 하나에도 반감을 느끼는 거다. 그리고 그 반감을 숨기지 않고 표출한다는 것도 진 루이즈의 성격을 드러낸다. 하지만 진정으로 무엇을 지켜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다른 한 쪽에 서서 소리지르고 항의하고 화를 내고 외면하고 돌아서는 일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행동한다면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처럼 또다른 차별을 저지르는 백인이 되는 것 뿐이지 전혀 다를 게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다. 


 무력함을 느꼈다. 

무슨 느닷 없는 무력함인가 하면, 조직 안에 있어도 밖에 있어도 그 조직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만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도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함으로써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하는 게 옳다. 그것이 정의고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의나 올바름은 다른 누가 정해준 것도 강요한 것도 아니기에 스스로 바꾸거나 움직일 수도 있다. 저 편에 있는 것이 힘들고 지친다면 이 편으로 올 수도 있는 거다. 다만 그 행위를 용납할 수 있도록 자신의 정의를 개조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파수꾼은 외부로부터 내부를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내부를 살펴 스스로를 다스리게 하는 역할도 한다. 그렇기에 이 파수꾼은 전적으로 나의 의지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번역기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도 이 파수꾼이 그 일들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파수꾼은 내 안의 양심이기도 하다. 누구의 의지의 지배도, 명령도, 가르침에도 속해있지 않은 독립된 고유의 영역으로서의 '섬'과 같이 존재하는 유일한 것인 거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는 말을 어느 덕이 높은 승려가 말했다는 걸 기억한다. 종교의 신이 명한다고, 존경하는 스승이 가르친다고, 사랑하는 부모의 뜻이라고 자신의 뜻과 의지를 통해 만들어갈 양심의 잣대를 그들에게 둘 필요는 없다. 오히려 부처든, 보살이든, 부모든 '권위'로써 우리의 자아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존재들을 없이 할 때 비로소 분명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있다. 


 이렇다 저렇다 해도 결국 이렇게 어수선해질 줄 알았다. <앵무새 죽이기>나 다시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