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서재 - 나만의 도서관을 향한 인문학 프로젝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들은 가르치려 드는 어른을 반기지 않는다. 싫다고 입으로 하지는 않아도 몸짓은 벌써 "싫어, 싫어, 싫다구!"하는 거친 느낌표로 가득차있다.

그럼에도 가르치는 걸 포기할 수 없다면, 가르쳐야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얼마 전부터 뇌리를 떠나지 않는 말이 '헤드 페이크'다. 헤드 페이크는 럭비 선수들이 나아가려는 방향을 속일 때, 몸의 중심과 머리의 방향을 달리하여 상대 선수의 시선을 뺏으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비단 럭비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으리라.

그럼, 이 '헤드 페이크'를 어떻게 아이를 가르치는 데 써먹을 수 있을까.

 

사실 이 방법은 이미 많이 사용되고 있다. 놀이를 통해 산수를 배운다든지, 만화영화를 보면서 영어를 가르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이들은 노는 게 재밌고, 만화가 재밌어 보고 듣지만 그러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헤드 페이크'를 책에는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까?

책 읽기를 어려워하는 이들, 책을 읽으면서도 왜 읽는지 모르는 사람들, 책을 읽고도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

방법이 있을까?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는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 본 책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경험과 깨달음, 실천에 이르기까지 "이건 이래.", "이 책은 이런 말이야."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머리로 하는 책 이야기가 아닌, 정말 마음으로 들려주는 책 이야기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에 닿아 여운이 되는 이야기 말이다.

 

왜 <마음의 서재>인 걸까? 읽은 책 목록과 집 안에 있는 책 목록이 마음의 서재의 목록과 같아지길 꿈꾼다 한다. 무슨 이야기인지 점점 궁금해진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자주, 그리고 크게 보인 글자는 바로 '공간'이라는 두 글자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되었다.

"서재는 내가 들여놓는 것이지만, 내게 들어오는 공간이기도 하구나. 여유가 없다면, 빈 공간이 없다면 어디에도 마음의 서재를 꾸려 낼 곳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세상의 그 많은, 수 없이 많은 쉼터를 두고도 정말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은 찾기 어렵고, 수 많은 사람으로 가득한 널리고 널린 건물 가운데도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움과 괴로움을 더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다행인 거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마음의 서재'다. 그리고 이 일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어떤 준비냐고 물으시는가?

"당신 마음에 이야기를 들여놓을 여유의 공간을, 아주 작아도 안락한 공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준비가 아닐까하는 거다.

 

이 공간은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드넓은 우주 조차도 한 점에서 시작했다 하지 않던가? 이 시작은 모든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가.

"그 '여유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면, 지금 내가 이런 고생을 하고 있겠느냐?"하는 의문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게 된다. "당신의 집에 있는 책이 곧 당신의 마음의 서재의 책이 된다." 이 말을 달리 생각해보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이미 이 공간을 가지고 있다. 단지 닫혀있는 것 뿐이다.

 

인용을 남발하지 않는 편이다. 인용하는 문구는 경험으로 확인하고, 정말 그렇다고 인정한 것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만이 그 어떤 편견도 없이 모둔 존재에 자신을 활짝 열어준다."

위 사진에 그림과 함께 담긴 문구다.

공간에 마음을 허락하자. 그리고 그 공간을 열어두자. 그 공간에 사람이 들어올 수 있게하고, 책이 자리잡게 하는거다.

이렇게 해 나갈 때 비로소 마음의 서재가 한 칸 한 칸, 채워지지 않을까?

 

재능이야기를 한다.

사실 나 스스로도 내가 무슨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설혹 "난 이것을 잘해, 재능있어."라고 해도 그건 내가 갖고 있다고 믿는 것보다, 내가 갖기를 바라는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에 가깝다.

 

이 재능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울고 울리는 것일까.

"넌 이것엔 재능이 없으니 저걸 해!"라거나 "넌 재능 있어, 열심히 해봐."라고 자신있게 가르쳐주시는 어른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걸까?

 

때로 세상은 재능이 모든 것을, 심지어는 인간의 가치조차 잴 수 있는 척도로 삼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한다.

재능없는 사람에게 세상이 고난의 연속, 힘겨운 노력, 좌절의 계속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도 위험하다. 애초에 재능없다는 말의 기준조차 모호하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재능 만능 주의'는 어떻게 생긴 건가 싶어지는 거다.

 

재능이 있고 없고까지도 '선택'과 '선별'을 거쳐, 재능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걸 보면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거다.

모두가 같은 척도로 측정된다. 당장 필요한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우수'하고, 10년 뒤에 엄청난 효용을 지닐 재능이라고 해도 지금은 '쓸데없는 것만 잘하'는 것이 되는 거다.

 

"재능은 삶의 토양의 '비료'는 될 수 있어도 '흙'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이 말은 '비료'가 필요한 이유와 비료의 효과를 알고 있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비료란 결핍을 보충하고,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첨가'하는 첨가제에 불과하다. 하지만 '흙'은 토양 자체다.

일부 재능은 '비료'같이 당장의 삶을 풍요롭고, 풍성하게 한다. 하지만 비료의 폐해도 있음을 잊고 있는 것 같다.

비료는 토양을 산성화 시킨다. 그 토양에 다시 새로운 생명이 뿌리내리는 걸 방해하고, 계속해서 더 많은 '비료'를 요구하는 것이다.

'흙'은 그 자체로 생명을 가득 품고 있다. 적당한 만큼의 풍요로움을 주고, 때로 수확이 적을지 몰라도, 다음 해에는 그 부족을 벌충할 만큼의 풍요로 돌려준다.

 

빠르게 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빨리 자라는 나무는 그 재질이 물러지게 되고, 조금만 큰 바람이 지나가도 가지가 떨어지고, 줄기가 찢기고, 뿌리가 뽑힌다.

 

어떤 삶에 더 끌리는가?

여유를 갖고, 사람과 세상, 책에 공간을 열고 허락하는 삶, 재능에 얽매이기 보다 삶 자체에 마음을 쏟는 삶과 지금은 풍요롭지만 분명 더 큰 메마름과 척박함을 불러올 닫힌 삶 가운데 말이다.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한 권 한 권 쌓여서 만들어진 새로운 한 권의 책은 그 사람의 인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게 내 꿈이다.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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