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당이 되기로 했다 - 결핍과 승부욕이 완성하는 악당의 철학
김헌식 지음 / 한권의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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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나 드라마, 소설들을 보면 그 안에는 항상 선과 악 사이의 힘겨루기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속에서 악은 거의 선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이자, 선을 각성시키기 위한 포석으로 사용되고, 곧 버려진다. 버려진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선에 의해 제압되고 제거 된다는 이야기다.


 악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야기가 바로 무엇이 선인지 분명히 드러나게 해준다는 점이다. 악이 없으면 선도 없다는  식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은 쉽게 동의를 표한다.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선거를 늘 치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엇이 선인지는 그동안 드러난 악들을 통해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지니고 있다. 다만 선은 없고 덜 나쁜 것만 있기에 언제나 눈물을 머금고 차악에 기댈 뿐이다.


 이 책의 제목은 나를 강하게 매료시켰다. 분명한 것은 읽어봐야 알게 될 테지만, 악당이 되기로 했다는 도발적 문구에서 악행을 일삼는 악인이 되겠다는 뜻이 아님을 직감했고, 뭔가 '다름'을 추구하겠다는 인상이 비쳐졌던 것이다.


 "뉘신지는 모르오나, 그 말씀 흥미를 동하게 하니 거기서 작은 빛이나마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첫 장을 폈던 기억이 난다. 


 과연, 책 속에 담긴 이야기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고, 얼마만큼은 실행에 옮기고 있던 행동들이 저자의 말 속에 들어있었다. 그리고 더 큰 일을 꾸며보라는 부추김을 귓가에 불어넣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해볼 수 밖에 없게 됐다. 이미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책 속에는 참으로 많은 드라마, 영화, 사람들,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의 말이 인용되고 있다.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와 다른 점은 그 말을 들려주는 이들이 하나 같이 한 때, 혹은 그 이야기 속에서 '악당'역을 맡았던 사람들 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히 폭력과 혼란을 조장하는 악인을 뜻하는 말이 아닌, 더 깊은 의미에서 파괴를 통한 창조를 꾀한 시대의 흐름을 바꿀만한 이론을 낳은 학자, 구태의연한 지성과 세태를 향해 가장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선 혁명가들을 '악당'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악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닌 시대와 세태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기에 과거의 악당이 현재의 영웅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이야기야 말로 이 책의 핵심인 것이다.


 시대는 영웅을 원하지만 그 영웅은 평범한 상황에서는 태어날 수 없다. 영웅을 낳는 존재는 언제나 '악당'인 것이고, 그렇기에 악당은 단순히 비난과 비판의 대상으로 여겨져서는 안되는 것인 거다. '악당'으로 몰아 넣었다가 때를 봐서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반복된 아이러니다. 하지만 언제나 악당은 등장한다. 악당은 쉽게 포기하지 않으며, 간단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악당의 진면목에 대해 새로 생각해 봐야만 한다.


 주의 할 것은 이 책이 '악인'과 '악행'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혼란을 위한 혼란을 일으킨 사람을 두고 혁명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살육을 위한 살육을 행하는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악행을 위한 악행을 벌이는 사람들을 결코 '악당'이라 불러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저 '악'을 행하는 악인일 뿐이다.


 착한 사마리아 인 이후로 사람들은 '선함'을 동경했고, 실천했으며, 선함을 행하지 않는 이들을 미워하고 배척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악인들은 언제나 득세했고, 이익 집단에 속해 있었으며,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들에게 '악'이라는 딱지를 붙여 말살하는 것으로써 자신들의 풍요로움을 지속시켰다. 

 결국 세상은 너무나 선해졌기에, 선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선한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았고, 거절할 줄 몰랐고, 벗어날 수도 없었다. 고난이 선한 이에게 내리는 웃지 못할 비극의 연속 상영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러다 그 시대를 뒤집는 일이 벌어진다. 지배자가 보기에 자신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은 '악'이었고 그들은 '악당'이었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가 신의 위엄에 도전한 것은 희대의 악행이었고, 그들은 악당이 되어 배척되었고, 경원시 되었으며, 권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하지만 현대에 그들은 진실에 가장 먼저 도달한 '영웅'이 되었다. 


 이러한 일들 속에서 나오는 결론은 '악당'이 되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타인과 다른 주류가 아닌 이론을 내놓는 일을 겁내지 말라는 것이다. 배척 당할지라도 신념을 관철하라는 것이다.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얽매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미래를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책 속에서 저자는 악당은 내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 악당을 지나치게 억누르고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악당은 가장 확실한 것을 추구하며, 타인이나 신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면서 현재에 충실하면서 미래를 바라보고 살라고 한다.


 사실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 때로는 악이 선이 될 수 있고, 선이 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악당들은 자신들의 의지, 생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지나치게 선한 사회를 경계하라고 한다. 

 사람들은 완벽한 무균 상태, 살균 상태를 유지하면 질병이 사라질 것이라 믿었지만 그렇게 행한 결과 새로운 질병을 얻게되었다. 면역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없는 상태는 역으로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소크라테스는 청년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고,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는 지구 중심설을 부정함으로써 배척당했으며,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은 이론을 인정받기 전까지 무수한 핍박과 맞서야 했다. 

 다른 쪽에서 볼 때 그들은 '악당'이었지만 그들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고, 현재는 '영웅'들로 그 자리를 옮겨 앉을 수 있게 됐다.


 저자는 이러한 무수한 예를 통해 '악당'을 예찬한다.

하지만 이 '악당예찬'에 있어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앞서도 적었듯 단순히 악행을 저지르는 '악인'과 '악당'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284쪽 

 우리는 악당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제멋대로 욕망을 충족하는 악당이 아니라 철학이 있는 악당이 되자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무척 선한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타인을 배려해 자신이 겪는 고난, 불편, 부당을 인내한다. 그러한 배려를 이용하는 '악인'들은 선인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 

 비극은 언제나 선한 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현대가 불러 일으킨 재앙 중 하나는 '자아의 상실' 혹은 '혼란 된 자아'가 아닌가 싶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발로 삶을 살아 나가기 보다, 타인의 의지에 휩쓸려 다니는 삶을 지속하기에 급급해 있음으로 허무와 공허가 넘치게 되고 그렇게 불어난 상실감이 삶에의 의지마저 감퇴시키고 마는 비극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하고 묻고 있는 거다.


 악당이 되어도 좋다. 철학이 있는, 주의 주관이 뚜렷하며, 타인에게 악의적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삶을 확장시키는 일에 관해서는 주저하지 않는 그러너 존재가 되는 것은 어떨까?


 절제되지 않는 악행과 철학이 있는 악당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의지가 분명한 사람들, 자유를 꿈꾸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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