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선택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원래는 에드 맥베인의 <사기꾼>을 읽으려다 배송이 늦는다는 말을 듣고 이 책 <살인자의 선택>으로 바꿨다. 둘 모두 87분서 시리즈 중 하나로 가공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형사들의 이야기다.


에드 맥베인은 애초에 이 시리즈를 '집합적 영웅'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구상했다고 한다. 요즘에야 한번쯤은 들어본 얘기일테지만 그 당시에는 신선하고 독창적인 구성이었다고 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해주면, 87분서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리즈 내내 고정된 배역을 맡는 게 아니다. 한 작품에서 주도적 수사를 맡았던 형사는 다음 작품에선 또 다른 인물에게 주역을 넘겨 주고 한 발 물러선다. 그렇게 돌아가며 모든 등장 인물들이 저마다 자신의 매력과 능력을 뽐내는 시리즈. 지금 들어도 그렇게 진부한 설정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그의 의도대로 됐더라면.


이 책을 읽자마자 나는 책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 하나를 깨우쳤다. 쓰여진지 오래된 범죄 소설은 읽지 말라는 것. 시대가 너무 동떨어지면 등장인물들의 수사 방법에 한숨이 나오기 시작한다. 스마트폰도 이메일로 인터넷도 없는 시대의 범죄 수사. 심문이나 추리 방법에라도 집중해야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책은 그런 재미를 선사하지도 않는다. 굉장히 하드보일드한(건조한), TV 시리즈를(그냥 흘러가는) 보는 것 같다.


사건은 어느새 스르륵 해결돼 있고 그 와중에 우리의 형사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의심이 든다. 범인을 찾는 과정은 너무나 간단하다. 259페이지. 출근 기차 안에서 가벼운 페이퍼백으로 읽을 법한 소설. 이런걸 보면 미국의 출판업은 타겟 유저의 설정에서부터 그들이 책을 읽는 환경까지 세심히 고려하는 것 같다. 분량은 적어야 해요. 한 시간 반, 길어도 두 시간이면 완독할 수 있게. 머리를 싸매고 플롯을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읽다가 깜빡 졸아도 연결에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엔 이미 페이지는 바닥이 나 있고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신문 가판대에서 이 책의 또 다른 시리즈가 독자를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외국 소설을 읽다보면 편집자와 작가 사이에 벌어지는 날카로운 신경전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진짜로 어마어마한가 보다. <살인자의 선택>에는 이와 관련하여 에드 맥베인이 남긴 인상적인 저자의 말이 있다. 물론 상당부분 농담이 섞여 있겠지만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몇 페이지를 알뜰히 활용해 "부패하고 열의 없으며 탐욕스러운 담당 편집자들"에 대해 얘기해준다. 앞서 말했다 시피 이 시리즈엔 정해진 주인공이 없었다. 그러나 편집자들은 에드를 "지하 감방으로 데리고 가 쇠고랑을 채운 다음 공중에 매달아 썩은 물과 구더기가 들끓는 빵만 먹였고" 그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스티브 카렐라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그는 우주 대스타가 됐다. 덤으로 그의 아내까지.


그 작품의 성공으로 한껏 고무된 작가는 편집자들의 부름을 받아 출판사를 찾는다. 이제는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에드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들의 콧대를 충분히 세워줬으니까. 이쯤되면 계약의 충실한 이행자로서 작가의 권리를 더 보장받아야 마땅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무실에서 그가 들은 얘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스티브 카렐라는 당신의 영웅이 될 수 없어요."

"뭐요?" 에드가 말했다.

"당신의. 영웅이. 될. 수. 없다고요."

"이유가 뭡니까?"

"어쨌든 안 돼요."

에드는 가늘게 눈을 뜬 채 알을 밴 살모사보다도 교활한 편집자들의 입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를 영웅으로 만들라고 한 건 바로 당신들..."

"우리가 잘못 생각했어요."

"좋습니다. 그럼 이전 방식으로 돌아갑시다. 기억하시죠? 모두가 영웅이 되는..."

"우리는 단 한명의 영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스티브 카렐라를 주인공으로 만든 것 아닙니까?"

"그는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에요."

"뭐라고요?"

"매력적이지 않다고요. 그는 유부남이니까요."

"오!"


그리하여 에드는 편집자들의 요구대로 "확실한 미혼에 여자들을 홀릴만큼 잘 생긴 영웅을 창조" 해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그는 이 치욕적 결정에 소소한 반항을 감행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직접 책을 읽어 확인하시길.


이 시리즈가 애초에 작가의 의도대로 기획됐다면 더 재미있었을까? 만약에 대한 질문은 늘 허무한 대답을 들려줄 뿐이다. 어떻게 기획됐다한들 사실 한국의 독자들이 딱히 매력을 느끼진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장기로 보이는 대사의 리듬감과 유머가 번역본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나의 판단은 냉혹할 수 밖에 없다. <살인자의 선택>은 책 자체의 내용보다는 '저자의 말'이 더 재미있는 독특한 책이다. <사기꾼>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줄 생각인데, 기회가 늘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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