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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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멋졌다. <악마의 증명>. 순식간에 다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제목만 멋졌다.


<악마의 증명>은 단편집이다. 크게 두 장르의 소설이 등장한다. 법정 추리, 호러. 여기에 가끔 환상이라는 조미료가 뿌려진다. 맛으로 보면, 후자는 너무 인위적이라 뒤끝이 지저분하고 호러는 그냥 그런 체인점 맛 같다. 양으로 보면 추리가 대부분이고 호러는 두 점 정도 실려 있다. 그러니 전체적인 코스는 완전히 실패일 수 밖에.


내가 추리 소설을 싫어하는 이유는 범인들이 온갖 기이한 방법으로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완전 범죄를 위한 완전한 트릭. 이 트릭이 기이할 수록, 얼토당토 안 할 수록, 한마디로 황당하고 기가 막힐 수록 소설은 찬사를 받는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어요!", "정말 천재군요!" 나는 오늘부터 이를 루브골드형 범죄 혹은 서커스적 범죄라 부르고자 한다. 작은 일을 이루기 위한(살인이 작은 일은 아니지만 이를 위해 벌이는 짓에 비하면 엄청 작으니까) 핵폭탄급 비효율. 나는 이게 놀라운 일인지 정말 모르겠다.


물론 작가는 오랜 세월 판사로 재직한 경험이 있으며 따라서 온갖 기이한 사건들을 다뤄왔을 것이다. 내가 터무니 없다고 말하는 몇몇 지점들에 대해 그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응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란 실제로 벌어졌다고 해서 설득력을 갖는 게 아니다. 일요일 아침 11시의 제왕 <서프라이즈>를 보라. 그게 흥미를 끄는 이유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나 세상에 이게 정말이야?", "말도 안돼 이게 실화라고?". 실제는 허구적일 수 있지만 허구는 반드시 실제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빛을 잃고 먼 바다에 삼켜져 다시는 떠오르지 못한다.


<악마의 증명>은 터무니없는 트릭 보다는 인위적인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어떤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통찰력을 발휘, 결정적 단서를 찾는 게 아니라 이야기 전체가 통찰을 발휘하게끔 짜맞춰져 있다. 사실 이것도 엄청 순화해서 말한 거지, 실제로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들은 거의 관세음보살급 예지력과 판단력으로 어마어마한 추리를 해낸다. 해결사들은 범인보다 언제나 500수 앞을 앞서 있다. 알파고가 18급의 바둑 입문자를 가지고 놀다 초읽기 돌입 5초 전에 신의 한 수를 놓아 완전히 조져버린다. 저 멀리서 큰 파도가 밀려 들어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서핑 보드에 오른 순간 맥 없이 꺼져 고꾸라지는 기분. 나는 지금 억지라는 말을 간신히 참고 있다.


오랜 시간 판사와 변호사로 일한 탓에 법이라면 빠삭하고, 그 사각을 완전히 꿰고 있어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유희를 즐긴다는 느낌이다. 이야기로 말할 것 같으면, 솔직히 영 꽝이다. 기반이 취약한 한국 미스테리 장르에 이만하면 수작이다 고 말한다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라고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한국 미스테리의 역사와 현황을 잘 모르니까. 그런데 우리가 미스테리 강국이라 부르는 일본을 봐도 나는 그 소설들이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 정도 수준에 이르는 게 미스테리 강국의 조건이라면 나는 방향 자체가 심각히 잘못된 게 아니냐는 의문을 던지고 싶다. 단순히 개취의 문제일까?


마지막으로, 천재적 문제 해결사에 대한 한국인의 우상 숭배급 믿음은 아마도 복잡한 사회, 정치적 현실이 만든 일종의 판타지가 아닌가 싶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상황을 단칼에 잘라 구성원들 하나 하나에게 갈 길을 일러주는 초인. 우리는 그런 사람을 꿈꾸며 5년 마다 우상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너무 많이 간 거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슈퍼히어로 급 지니어스들이 찬사를 받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이 소설과는 그닥 상관 없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평을 받는 소설에 딴지를 거는 건 너무 어렵다. 진짜 어렵다. 그래서 나는 cine21의 소금쟁이 박평식 기자를 존경한다. 누가 뭐라하든 소신껏, 대중적 인기에 코를 풀듯 낮은 평점을 던지는 패기. 아마 박평식 기자는 절대로 시나리오를 쓰거나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쌓아온 업보의 돌팔매를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그런데 내 꿈은 소설가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남들이 내 소설엔 과연 뭐라고 말할까.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업보를 쌓는 일을 멈추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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