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의 순간 - 영화감독 17인이 들려주는 나의 청춘 분투기
한국영화감독조합 지음, 주성철 엮음 / 푸른숲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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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화계를 기웃거렸던 적이 있다. 대학 시절, 연출자가 되어 보겠다고 시나리오를 쓰고 단편 영화를 찍고 독립 영화의 스텝을 했었다. 그걸로 부산 영화제도 가봤다. 영화는 내가 사랑하고 또 잘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했다. 타협하지 않는 예술혼, 숨 막힐 듯한 고집, 위로 없는 외길, 그리고 이야기. 아무튼 영화는 그 시절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시간이 나면 무조건 도서관 DVD 실에 가서 영화를 봤다. 당시 우리 학교는 드물게도 어마어마한 DVD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허접한 상업 영화에서 찾기 힘든 고전 예술 영화까지 없는 게 없었다. 나는 매일 한 편 이상 영화를 보고, 시나리오를 쓰고, 하루내 촬영한 영상을 밤새 편집했다.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뭔가를 열정적으로 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야말로 하얗게 불태우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제 영화를 만드는 대신 글을 쓴다. 영화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했지만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협업. 아무리 애를 써도 혼자서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 그 부대낌이 지긋지긋했고,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도마들에게 내 이야기를 끊임없이 설명해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글은 누가 뭐래도 혼자 쓸 수 있으니, 나에겐 완벽한 출구였던 셈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영화를 사랑한다. 하루에 한 편은 아니지만 한 번은 꼭 본다. 좋은 영화를 봤을 때 느끼는 전율은 아직도 예민했던 이십대 못지 않다. 그런 걸 보고 나면 몸이 떨려 잠을 못 잘 정도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을까 속으로 되뇌고, 되뇌고, 또 되뇌면서.


<데뷔의 순간>은 그 때 그 시절 철없는 이십대의 나를 다시 살려낸다. 시나리오를 위한 고군분투, 바람 잘 날 없는 현장, 스텝과 배우들에게 무시당할까봐 쓸데 없는 기 싸움을 벌이는 긴장감. 사람은 다 똑같구나, 위대하든 위대하지 않든. 그런 생각이 들며 글 한 줄 한 줄에 조용히 빠져들게 된다.


이 위대한 감독들이 데뷔의 순간까지, 심지어 큰 성공 이후에도 별반 다를 게 없는 지리멸렬에 빠져 꾸역 꾸역 실패와 좌절을 삼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욕구불만과 분노가 오롯이 드러난 내 마음이 아무런 여과없이 그들의 삶에 투영되는 걸 느낄 수 있다. 건방지게도 나는 그 순간 그들과 하나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옥자>의 봉준호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라는 영화로 데뷔한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천재라 불리는 그의 데뷔작은 대단한 실패 속에서 막을 내렸다. 그는 <베테랑>의 류승완 감독과 매우 친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 개봉한 류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초저예산에 짜투리 필름을 구걸해 만든 영화였음에도 예산 대비 어마어마한 흥행 실적과 한국의 타란티노의 탄생이라는 찬사까지 거머쥐었다. 봉감독은 이 대조적 결과에 우울증에 빠졌다고 한다. 온갖 생각이 다 들면서, 자신의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이 됐다고 한다. 그는 그 암울한 시간을 3년이나 더 보내고 나서야 <살인의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남들의 실패담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 결국 해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도 언젠가는 승리로 바뀌리라는 걸 믿으며 위로를 얻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언젠가라는 말은 그게 3년인지, 4년인지 아니면 20년인지, 30년인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아마 우리 중 99%는 오늘 희망에 차 잠에 들었더라도 당장 내일 아침에 똑같은 좌절에 빠져 우울한 날을 보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그 더러운 우울이 몸에 스며들기 전에 미친듯이 몸을 털고 달리는 수 밖에 없다. 끝날 때 까진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은 쓰러지고, 깨지고, 터지더라도 계속해서 달리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오늘을 보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나는 오늘도 영화를 만든다. 나는 오늘도 운동을 한다. 오늘 우리가 이 말을 하지 못하면 미래 어딘가에 잠복하고 있는 언젠가라는 놈도 자신의 등장일을 하루 더 늦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공에 대해 기억해야 할 유일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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