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로얄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
이언 플레밍 지음, 홍성영 옮김 / 뿔(웅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이언 플레밍의 007 원작을 처음으로 읽어봤다. 깜짝 놀랐다. 숨막히는 플롯, 치밀한 심리묘사, 매력적인 캐릭터, 그 무엇도 없었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부러웠던 건 배경 설명을 덜 해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시리즈물은 이런 게 좋구나! 전작을 통해 이미 캐릭터도 잡혀 있고 설정도 끝났으니 그냥 하고 싶은 얘기만 하면 되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 소설이 007 시리즈의 첫 작품이란 말을 들었다. 정말로 깜짝 놀랐다.


더블오세븐 제임스 본드는 이미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고 있는 것처럼 당당히 등장한다. 가타부타 말도 없다. 나 007이야, 나 몰라? 물론 나는 그를 잘 안다. 이미 수 많은 영화를 통해 그를 접해왔으니까. 그의 외모, 성격, 말투, 그가 끄는 자동차까지도 상세히 떠올릴 수 있다. 그 이미지를 이야기의 빈 곳에 채워 넣는 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첩보원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의 행동과 MI6의 작전 계획을 보고 있으니 이 시리즈가 원래부터 그렇게 정교한 이야기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는 바야흐로 냉전 시대. MI6, CIA 그리고 프랑스의 첩보부는 프랑스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합동 작전을 벌인다. 요즘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설이라 비난 받고 각종 진보 매체에서 잡아 먹을 듯 으르렁 거릴 게 분명하지만 당시에는 비공산 국가의 노동 조합이 공산 국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것 따위는 충분히 상상할만 했고 또 실제로도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더블오세븐, 살인 면허를 지닌(실제 MI6에 존재하는 코드 네임이라고 한다. 살인을 저질러도 국가가 책임을 진다는 권한도 마찬가지) 제임스 본드는 이 노동 조합을 깨부수기 위해 카지노로 향한다!


우루루루루루루루루레이~ 캐지노! 이 정도면 첩보원도 할 만한 직업이다. 호텔 스위트 룸에 방을 얻고 고급 애스턴 빌라 차를 몰아 매일 밤 카지노를 들른다. 돈 많은 사업가로 신분을 위장했으니 적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돈 걱정도 없다. 그의 비용은 모두 당신의 세금으로 충당되니까. 근데 왜 카지노로 왔느냐? 노동 조합의 위원장이 여기서 큰 판을 벌일 예정이기 때문이다.


설명하자면 길어서 귀찮은데, 어쨌든 위원장은 소련에서 받은 운영 자금의 대부분을 신변 잡기에 탕진했고 그걸 다시 채워 넣지 않으면 숙청 당할 게 뻔했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자금을 긁어 모아 카지노에서 한 몫을 챙길 생각을 한다. 더 웃긴 건 뭔지 아는가? MI6, CIA, 프랑스 정보부, 세계를 호령하는 이 강대국의 첩보부가 최고의 요원 더블오세븐을 파견해 위원장과 목숨을 건 카드 게임을 벌여 그의 돈을 다 따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우와!


오늘날 우리가 자유 국가, 그리고 온갖 사치와 향락 풍요 속에서 살게 된 데는 이렇듯 뛰어난 첩보원의 완벽한 카드 실력 덕분이라는 걸 명심하자. 이후 벌어지는 일들은 스포일러가 되기도 하고 말하기 민망하기도 하니 생략하겠다. 여러분도 꼭 이 책을 읽고 내가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껴보길 바란다.


어쨌든 전설의 첩보원 더블오세븐은 생각보다 우스운 남자였다. 부풀려진 명성 때문에 여자를 홀리는 기술은 있는 것 같지만 순수하게 첩보원으로서의 능력만 따지면 냉철한 지성도, 뛰어난 신체 능력도, 철두철미한 준비성도 없는, 잘생기기만 한 허당이었다. 그러니까 본드는 일종의 로망이었던 것 같다. 냉전의 최전선에 선 고독한 남자.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의 사랑을 받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애스턴 빌라에(그의 직업이 첩보원이라는 걸 기억하자!) 돈 걱정 없는 삶. 게다가 마음대로 살인을 저질러도 되는 권력까지.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를 꽤 좋아했던 나에게 원작은 다소 생소한 경험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세계는 변한다. 그 변화의 흐름 속에서 더블오세븐 제임스 본드는 서서히 빛을 잃고 바짝 말라 속절 없이 떨어지는 낙엽이 되었다. 역시 나는 더블오세븐보다는 스마일리에게 더 많은 걸 배울 것 같다. 카지노 로얄은 첫 작품이니까, 수 많은 007 시리즈를 차근차근 훑어가며 점점 발전해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을지, 지금은 전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