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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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압도적 이야기가 600페이지에 걸쳐 휘달린다. 양복이 아닌 츄리닝을 입은 지리멸렬한 건달들의 이야기다. 산뜻한 두뇌 싸움이나 깔끔한 결투는 없다. 그저 회칼을 들고 우르르 달려가 적의 배를 가르고 다시 우르르 몰려온 적에 의해 내 배가 갈린다. 운이 없으면 외딴 섬의 양식장에 끌려가 사료 분쇄기에 온 몸이 빨려들어간다. <뜨거운 피>다.


희수는 구암의 이인자다. 동네의 상징인 만리장의 지배인이다. 그곳의 주인은 일제 시대 때부터 구암을 다져온 집안의 3대, 손영감이다. 희수는 손영감 밑에서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수십년을 보냈다. 그러나 손에 쥔 것은 지독한 담배 냄새가 밴 만리장의 특실 뿐이다.


손영감은 빠꼼이에 쫄보라 남들처럼 무기나 술을 밀매하지 않는다. 그는 중국산 고추가루나 참기름을 밀수해 국산과 섞어 판다. 구암에서 건달은 삽을 들고 고추가루를 섞는다. 매캐한 가루가 끓어오르는 땀에 들러 붙어 찌릿 찌릿 온 몸을 쑤신다. 희수는 가죽 채 그 짜증을 벗어 던지고 싶다.


그러나 희수는 손영감을 떠나지 못한다. 궁시렁 궁시렁 말 끝마다 토를 달고 불평을 하고 쾅 문을 닫고 나가긴 하지만 그렇게 나가 영영 떠나는 법은 없다. 본래 분노와 불평은 관계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 끝은 언제나 침묵이다. 희수는 다시 돌아오고 돌아오고 돌아오길 반복한다. 아니 애초에 떠난 적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애증의 관계다. 자식이 없는 손영감과 아버지가 없는 희수는 유사 부자 관계를 형성한다.


이 유사 부자 관계에 균열을 내는 것은 진짜 핏줄의 존재다. 도다리. 도다리는 손영감의 조카다. 도다리는 계집질과 술 쳐먹기 똥폼재기를 제외하면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쓰레기에게 손영감의 모든 것이 돌아갈 것이다. 희수는 이전에 만리장의 지배인을 했던 양동이 독립할 때 손영감에게 무엇을 받았는지 안다. 희수도 결국 남이다. 핥고 뛰고 난리를 쳐봐야 귀여운 개새끼일 뿐이다. 개새끼가 아무리 귀여워도 주인집 상 위에 올라 그 집 아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개새끼는 결국 늙고 병들어 내쫓길 것이다. 뼈다귀 하나 챙기지 못한 채, 그야말로 개털이 되는 것이다.


이런 희수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말이 있다.


영감님에 대한 의리? 동생들에 대한 걱정?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하는 평판? 좆까지 마라.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 별로 훌륭하지 않은 게 훌륭하게 살려니까 인생이 이리 고달픈 거다. (중략) 니는 똥폼도 잡고 손에 떡도 쥐고 싶은 모양인데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 (중략) 세상은 멋있는 놈이 이기는 게 아니고 씨발놈이 이기는 거다(305p).


희수는 씨발놈이 되기 싫고 두 손 가득 떡도 쥐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골몰해 봐도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생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희수의 갈등 사이로 거대한 음모가 비집고 들어온다. 음모는 희수의 갈등에 풀무질을 하고 뜨겁게 데운 뒤 죽어라 내리친다. 그 망치질에 희수는 소중한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목숨마저 뺏길 뻔 한다.


이제 살아남은 희수의 선택은 무엇이 될 것인가? 죽느냐 사느냐는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살아서 씨발놈이 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과 함께 죽을 것이냐, 사실은 이게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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