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 지음, 오득주 옮김 / 문학사상사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올해는 실패가 많았지만 대신 금쪽 같은 작가 몇 명을 만났다. 사실 독서의 세계에선 단 한 번의 성공이 백 번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을 만큼 성공의 질과 파괴력이 높은 편이다. 이른바 인생의 작가를 만났을 때의 기분, 그들의 빽빽한 작품 리스트를 손에 들었을 때 전해지는 가벼운 떨림은 느껴본 사람만이 아는 환희일 것이다.


아직 2016년이 끝나진 않았지만 앞으로 읽을 책들이 뻔한 관계로 올해의 작가들을 결산해 보면, <카인>의 조제 사라마구, <밤의 파수꾼>의 켄 브루언,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 그리고 바로 이 책 <하이 피델리티>의 닉 혼비가 있다.


내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다섯 번의 이별을 연대순으로 꼽아보라면 다음과 같다.


1) 앨리슨 애시워스

2) 페니 하드윅

3) 재키 앨런

4) 찰리 니콜슨

5) 세라 켄드루


모두 내게 정말로 상처를 준 여자들이다. 로라, 거기 네 이름 보여? 넌 10위 안에 어찌 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5위 안에는 절대 못 낄걸. 5위까지는 내게 굴욕감과 비통함을 안겨준 사람들에게만 할애되거든. 너는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말하고 보니 의도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게 들리는군. 사실 상대방에게 비참함을 안겨주기엔 우리 둘 다 너무 나이 들었지.(p.9)


나는 이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이 책을 사야한다는 강력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물론 이 문장들이 이른바 '문학'에는 어울리지 않는 가볍고 저질스런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롭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30대 중반의 음악광으로 세상의 모든 평범함을 응축해 단단히 채워 넣은 듯한 인간이다. 평범함. 말 그대로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가치 중립적 단어처럼 보이지만 현대인의 마음 속에 뿌리 내린 방황의 씨앗은 모두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생각해 보라. 평범 이상인 사람은 그렇게 쭉 달려 만인이 바라마지 않는 목표를 쟁취하면 된다. 또 평범 이하인 사람은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를 듣는 순간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달려 창조적 파괴와 혁신을 일으키는, 그래서 세상 자체를 완전히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 잠재력을 발휘하면 된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은? 쉽게 말해 이도 저도 아닌 사람. 어느 방향으로 뛴다 해도 아무런 메리트를 갖지 못하는 사람. 방황은 못하거나 잘해서가 아니라, 못하지도 잘 하지도 않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평범한은 당신이 스스로 채워 넣은 구속복일지도 모른다. 나에겐 아무런 특별함도 없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겐 단 한 번이라도 마음 속 끝까지 내려가 자신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묻고 싶다. 뚜껑을 열고 캄캄한 우물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밧줄을 타고 내려가 졸졸졸 뿜어져 나오는, 그 차고 반짝이는 물 한 모금을 마셔본 적 있냐고 말이다. 위로가 아니라, 인간은 모두 저마다 반짝 반짝 빛나는 재능을 갖고 있다. 때로 그 재능은 어둠에 쌓여, 때로는 넓디 너른 갯벌에 파묻혀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하이 피델리티>는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중년의 찌질함과 우울함을 그리고 있지만 닉 혼비의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엮여 시종일관 유쾌함을 잃지 않는 책이다. 기가 막힌 반전이나 눈에 띄는 사건은 없다. 그저 소소한 해프닝, 농담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사소한 사건이 이어진다. 추운 겨울날 담요를 뒤집어 쓰고 소파에 누워 영국 영화(장르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온 몸이 나른하고 졸음도 오지만 마음은 따뜻하고 촉촉해지는, 그런 기분 말이다.


이 책을 소장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음악에 있다. 레코드 가게 챔피언십 바이닐의 주인장 롭. 음악광 답게 그는 모든 상황과 사건을 음악에 빗대어 얘기하는데, 70~80년대를 주름 잡은 팝, 락, 디스코, 레게 음악의 선율이 문장 위로 날아다니는 게 보일 정도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느새 그 노래를 모아 플레이 리스트를 만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니까 <하이 피델리티>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좋은 소설을, 소설 좋아하는 사람에겐 좋은 음악을 덤으로 쥐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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