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미래는 있는가 - 잃어버린 희망을 찾아가는 인문학 여정
로제 폴 드루아.모니크 아틀랑 지음, 김세은 옮김 / 미래의창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 같은 세상에 희망을 얘기하는 건 대체로 비웃음을 살만한 행동일 것이다. 정치는 부패의 끝에 서 있고 빈부 격차는 인류 역사를 통째로 틀어 박어도 메꿀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벌어진 지 오래다. 세상은 결국 바뀐다, 역사는 끝내 진보한다는 말도 캄캄한 미래 앞에선 무기력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희망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당장의 고통을 잊게해 주는 아편에 불과할까? 근거 없는 미래가 전하는 달콤한 속삼임. 맞을 수록 효과는 떨어지고, 약에서 깨면 여전히 그대로인 현실로 인해 절망은 두 배로 늘어나는 중독의 묘약말이다.


어쩌면 희망의 위기는 그것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희망찬 미래를 얘기하는 사람은 많아도 '희망 그 자체'에 대해 말하는 이는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이 희망에 대한 오해를 가중시켰다. 오늘날 희망의 위기는 진짜 희망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가짜 희망이 차지한데서 온 걸지도 모른다.


<희망에 미래는 있는가>는 바로 이 의문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희망을 역사적, 철학적 관점에서 다시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희망이 위기에 처한 진짜 원인을 찾아낼 것이며 그 원인을 제거할 해결책 또한 발견할 것이다. 우선 희망이 처음으로 탄생한 고대로 날아가보자.


우리는 흔히 희망이 없는 곳을 지옥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천국이야말로 희망이 없는 유일한 곳이다. 천국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지복의 성소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 처음으로 희망이 등장한 것도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 온갖 악들을 해방시킨 뒤였다. 이 신화는 절망에 빠진 인간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벽했던 세상이 악으로 오염됨으로써 그 전 까지는 전혀 필요 없었던 희망이 이제는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에 희망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쓴 독약을 마시고 난 뒤에 내려지는 약에 불과했고 고대인들은 늘 완벽했던 태초의 세상을 그리워했다. 아담이 에덴을 떠올리듯, 프로메테우스가 올림푸스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이, 그들에게 천국은 과거에 있었다.


중세에 이르러 희망은 기독교라는 질병에 의해 현실 세계에서 멸종된다. 기독교인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죽은 뒤에 천국에 가는 것이었다. 현실의 고통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니 그저 믿으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으리라.


견고했던 중세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건 기술의 힘이었다. 측량과 항해 기술의 발달은 신대륙을 발견했고 대포의 힘이 성벽을 날려버렸다. 상업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등장은 신분 사회에 균열을 일으켰다. 중세인들은 내일이 오늘, 심지어 어제와 똑같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급변하는 세상은 오늘의 오후가 오늘의 오전과도 다를 수 있음을 알려줬다. 이제 미래는 얼마든지 개척가능한 미지의 대상이었고 그 불확실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희망은 현대에 이르러 대규모 인종 학살, 전쟁, 인권 유린, 빈부 격차의 다른 모습이었음이 드러난다. 기술의 발달은 중세를 무너뜨렸던 바로 그 힘으로 현대를 무너뜨렸다. 희망은 자신의 행동이 다가올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서 양분을 얻지만, 폭주하는 변화로 인해 세상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모든 사람을 잘 살게 만들기 위한 자본주의가 빈부 격차를 낳았고 광산을 뚫던 화약의 불꽃이 전쟁의 포화로 옮겨 붙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선언은 일부 인종이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 이용됐다. 


이처럼 현대는 원인과 결과를 짝맞출 수 없는 세상, 모든 의도가 예기치 않은 결과로 빨려 들어가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희망은 살아 남을 수 없다. 남아 있다면 오로지 막연한 기대와 일확천금에 대한 욕망 뿐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압도적 무기력 속에서 좀비가 되버린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일말의 타개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여기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 희망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희망을 버린다는 건 생각보다 나쁜 일이 아니다. 희망을 버렸다는 건 희망이 원하는 현실로 귀결되지 않았을 때 따르는 실망과 분노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란 마음을 완전한 공(空)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고 그 안에는 나를 흔드는 바람도, 바람에 흔들릴 나무도 없기에 우리는 그야말로 고요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 말을 패배자의 자기 위안으로 치부하려는 사람은 Carpe Diem이나 Seize the day 라는 말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부질 없는 미래를 희망하기 보단 오직 현실을 즐기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 이 격언들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됐을지 생각해 보자.


둘째,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은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 둘러보라. 요즘 같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시험 합격이나 연봉 인상 등 개개인의 소망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사라지지 않는 거라면, 시시한 개인적 희망 따위 잠시 비워두고 그 빈자리에 대신 공동체의 소망을 담아 미래를 향해 던지는 건 어떨까? 우리 모두의 염원을 담은 희망은 미래에 굳건히 자리를 잡은 뒤 절망에 빠진 현실을 끌어 당길 것이다. 미래가 끌고 현재가 미는 것. 그렇게하면 현실은 미래로 나아가 마침내 그곳에 있던 희망을 현실로 바꿔놓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자조한다. 변화를 막는 권력의 힘은 결코 시들지 않는 불멸의 세계수가 되어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다. 그러나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은 사람이라면, 그 행위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말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왜 그 귀하디 귀한 자식을 낳아 이 지옥같은 세상에 바치는가?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에 개인의 관점에선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라는 종의 관점에서 다시  역사를 바라 보자. 세상은 정말로 바뀌지 않는가?


나에게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결단코 첫 번째라고 대답하겠지만 무엇이 옳으냐고 묻는다면 결코 대답할 수 없다. <희망에 미래는 있는가>는 우리에게 두 번째 삶의 방식을 권고하지만 무엇을 선택할지는 오직 당신의 몫이다. '나의 삶'이냐 '우리의 삶'이냐, 우리는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이 어려운 사람이라면 더 많이 선택한 쪽이 어디인지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걸 알고 싶으면 TV를 켜라. 그리고는 광화문을 가득 채운 촛불의 파도를 보라. 첫 번째 삶을 선택한 나는, 그들을 위해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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