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한 생각들 -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52가지 심리 법칙
롤프 도벨리 지음, 두행숙 옮김, 비르기트 랑 그림 / 걷는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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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사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그 동안 전혀 읽지 않았던 종류의 책들을 많이 보리라 다짐했다. 예컨대 '삼성 경제 연구소'가 추천하는 'CEO'가 여름 휴가 때 들고 가는 책'들 말이다.


나는 지난 <괴짜 경제학> 리뷰에서 이런 류의 책만을 읽어선 결코 이런 류의 책을 쓸 수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 내 말은 틀렸다. 쓸 수 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잘.


CEO들이 하고 많은 날 중에 유독 여름 휴가를 골라 책을 읽는 이유는 평소엔 끔찍이도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바뻐, 할 일이 많아, 시간이 없다. 그래서 휴가 때라도 좋다는 책을 읽어야지. 그런데 어려운 건 안 된다. 내러티브가 있는 것도 곤란해. 원 포인트 레슨. 실용적인 것만 콕 집어. 쉽게 쉽게 가자. 


요구가 명확하면 만드는 것도 훨씬 쉽다. 게다가 그 요구는 대체로 변하는 일이 없어 제작 단계를 공정화 할 수 있다. 이른바 지식의 대량 생산. 교양으로 만드는 패스트푸드! 이것이 바로 이런 류의 책만을 읽고도 이런 류의 책을 쓸 수 있는 이유다. 자 그럼 우리도 한 번 만들어 볼까? 


버거킹, 맥도날드, KFC에서 햄버거를 시킨다. 빅맥 빵을 조리대 위에 놓는다. 버거킹에서 빼낸 할라피뇨와 치즈를 깔고 KFC에서 건진 징거 패티를 착. 이제 남은 야채를 적당히 섞어 그 위에 놓고 빅맥 빵을 덮어 마무리하자. 어? 그런데 내 햄버거는 팔리지 않는다. 이상하다. 내가 만든 햄버거를 먹어 본다. 맛은 비슷한데, 브랜드가 없구나! 


내용 자체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누구나에게 만들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자격은 현란한 학위와 경력이다. 이 마법의 물약을 끼얹고 나면 책은 비로소 반짝 반짝 빛나는 권위의 훈장을 달게 된다. 이제 남은건 유력 언론사와 동류의 작가들이 보내는 두 줄 짜리 리뷰다. 그것으로 서빙 준비 끝. 완벽한 플레이팅이다.


이런걸 보면 인간은 좋은 생각만으로는 어지간해서 설득 당하지 않는 것 같다. 경험으로 증명해야 한다. 가시적 성과가 있어야 한다. 의견을 진리로 보이게 하는 권위가 필요하다. 세이버 매트릭스의 대부 빌 제임스가 딱 그렇다. 메이저 리그 구단들은 빌 제임스의 기가막힌 통계 이론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가 야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는데다 번듯한 직장이나 학위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 제임스의 의견을 편견없이 받아들인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빌리 빈은 아메리칸 리그 최대 기록인 20연승을, 보스턴 레드삭스는 끔찍했던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84년 만에 메이저 리그 우승을 거머쥔다(이 이야기는 영화 <머니볼>에 잘 묘사되어 있다).


<스마트한 생각들>의 저자는 롤프 도벨리. 독일에서 가장 냉철한 경영자이자 위트있는 작가로 손꼽힌다고 한다. 그래서 더 컴팩트하다. 그래서 더 깊이가 없다. 원래 이런 책들은 유명한 교수님들이 자주 쓰는데 그 세계에선 나름 실험에 의한 검증이(혹은 통계에 의한) 보편화 되어 있어 근거가 확실한 편이다. 저자는 아무래도 학자가 아니다보니 그런면에서 많은 취약점을 드러낸다. 나쁘게 말해 이 책은 인간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흔히 저지르는 심리학적 오류들을 여기 저기서 긁어 모아 짜깁기한 사례모음집이고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CEO의 '자기' 경험담 이상을 넘어설 수 없는 책이다. 흥미롭진 않지만, 그럭저럭 재밌게는 읽을 수 있다. 심리학과 성공은 언제나 먹히는 키워드니까.


롤프 도벨리는 중요한 의사 결정에 앞서 이 책에 언급한 생각의 오류들을 쭉 써놓고 혹시 자기가 이 중 한 오류에 빠지진 않았는지 확인해 본다고 한다. 앎을 실천으로 옮기는 좋은 습관이다. 나도 첫 사업에 실패한 후 실패의 이유를 메모장에 적어 매일 아침 읽었던 적이 있다. 그 메모의 제목은 '나는 왜 멍천한가'였다. 항목은 무려 마흔 세 개 였다.


이 책은 뻔한 얘기를 반복한다는 혹평을 받을만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들은 너무 당연한 탓에 우리의 주의를 끌지 못하고, 그로인해 우리가 항상 멍청한 실수를 반복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책들의 목적은 뻔한 얘기를 진지한 얼굴로 함으로써 의식 속 깊숙히 묻혀 있던 진리를 주의의 역치 위로 올려놓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행인으로부터 '너는 결국 죽어'라는 말을 듣고난 뒤 평생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 한 남자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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