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광활한 사막의 이야기다. 이노우에 야스시란 이름도 그의 <둔황>도 처음 들어본 것이라 반신반의, 미심쩍은 마음으로 손에 들었으나 몇 페이지도 지나지 않아 진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아주 즐거운 이야기를 읽었다.


역사는 그 자체가 이야기다. 그렇다면 역사 소설은 이야기를 이야기로 만든 셈인데 애초에 이야기였던 것을 어떻게 또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할 수도 있다. 따지자면 전자의 이야기는 뼈대고 후자의 이야기는 살이다. 역사는 큰 나라와 큰 인물과 큰 시간을 기록하지만 그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했던 철수와 영희와 민수와 그리고 그들이 옷을 입고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부부 싸움을 했던 것은 쓰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는 의외로 추상적이다.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그저 건조한 사실의 나열로 느껴질 뿐. 사람들이 역사는 싫어해도 역사 드라마는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조행덕이 진사시험을 치르기 위해 고향인 호남 시골에서 수도 개봉으로 상경한 것은 송나라 인종의 재위 기간인 천성 4년(서기 1026년) 봄의 일이었다(p.7). 행덕의 공부는 깊었고 그래서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과신하는 게 아니라 일전에 치뤄진 제반 시험에서 행덕은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던 것이다. 그랬던 행덕이건만 정작 시험장에서 깜빡 졸아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는 걸 놓치고 만다. 이 절망의 순간 인생이 그대로 끝나버리고 만다면 차라리 행복한 일이지만 그럴 일이 없기에 사는 게 고달픈 거다. 원하는 것을 얻었든 얻지 못했든 삶은 계속된다. 행덕, 이 안타까운 남자도 절망을 맞이한 순간 벼락을 맞아 죽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생각 없이 시장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체로 누워 있는 여자 한 명을 목격한다. 여자는 자신이 불륜을 저지른 죄를 갚는 중이라며 누구든지 자기 살점을 원하는 사람에게 돈을 받고 팔겠다고 한다. 여자는 서하 사람이었다. 행덕은 신비로울 정도로 황홀한 여자의 기개에 반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의문을 품는다. 도대체 서하의 무엇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행덕의 마음 속에 새로운 의지가 싹튼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서하로 떠난다.


이후 행덕의 삶은 지금까지 상상해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방향으로 급격히 물꼬를 튼다. 서하의 한족 부대에 강제로 편입된 행덕은 그 지대를 장악한 토번, 위구르와 전투를 벌이고 심지어 한족의 국가이자 본인이 관리가 되어 다스리고자 했던 송나라에 까지 창끝을 겨누는 처지가 된다. 그러나 형덕에게 내면의 갈등은 없다. 그는 휘몰아치는 역사의 광풍에 매몰되지 않고 조행덕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겐 누가 이기고 누가 지고 하는 건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누가 이기든 결국엔 시간의 파도에 밀려 산산히 바스라지고 말 것이다. 그는 영원에 집중한다.


행덕은 불교에 귀의해 역사를 다스린다. 그는 자신이 모셨던 한족 부대의 대장 주왕례가 반란을 계획하자 망설임 없이 뜻을 같이 한다. 역사의 바람은 서하의 깃발을 맹렬히 흔들며 누가 승리할 것인지를 친절히 가르쳐주지만 두 남자는 그 흐름에 당당히 맞선다. 예정대로 주왕례는 목숨을 잃는다. 조행덕은 도망치는 대신 죽음을 각오하고 불교 경전을 천불동에 숨겨 놓는다. 미약한 반란을 제압한 서하는 감주, 숙주, 과주, 사주 일대를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이 된다. 서기 1042년 서하는 송나라와 강화를 맺는다.


사주 일대는 그 후 수 백년이 흐르는 동안 몇 번이나 소속과 명칭이 바뀌었다(p.245). 행덕이 경전을 숨겨둔 천불동 지역도 둔황으로 이름이 바뀌어 둔황석굴로 불렸는데 1900년 대 초반 왕윤록이라는 도인 하나가 이곳을 찾아 우연히 석굴을 발견하고 이곳에 거주하며 돌보게 되었다. 왕도인은 석굴의 한 쪽 면이 부풀어 오른 것을 보고 조심히 파들어가다 어마어마한 수의 경전을 발견한다. 1907년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이 경전의 일부를 헐 값에 사간다. 다음 해에 프랑스인 펠리오가 그 다음엔 일본과 러시아의 탐험가들이, 그리고 그 다음엔 북경의 군대가 나타나 남은 경전을 모조리 싣고 떠난다. 보물을 가져간 그 누구도 처음엔 그 진가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 말릴 수 없는 시간이 흐른다. 그러자 4만여 점에 달한 경전들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조행덕이 목숨을 걸고 숨긴 동굴 속의 보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조행덕을 슬픔과 고통 회한과 절규 속으로 몰아 넣은 역사가 그의 덕분에 현대에 살아나 영원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자기가 기록할 가치도 없었던 한 인간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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