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자국민이 언제나 자국민에 대해 깊은 이해를 보이는 건 아니다. 때로는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머나먼 3자가 더 날카롭게 그들을 꿰뚫어 보곤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당사자는 감정이 앞서기 마련이다. 감정은 놀이 공원에 있는 요상 망측한 거울처럼 대상을 왜곡하기 때문에 그것의 참모습을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둘째, 무관심이다. 자국민에게 자국민의 모습은 일상일 가능성이 높다. 끊임없이 숨을 쉬면서도 공기의 존재를 잊고 사는 것처럼 습관화된 일상은 특별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다. 그래서 <곤충기>를 곤충이 아니라 파브르가 쓴 것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나오는 박노자의 생각에 모두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박노자가 한국에 대해 한국인 보다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 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단순히 이 땅에 놀러온 외국인이 아니다. 어학원을 몇 년 다니며 한국인 친구 몇 명을 사귀고 원어민 교사를 하다 주말에 화려한 클럽 파티를 즐기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무려 '한국학' 전공자다. 박노자는 한국의 역사, 경제, 정치 뿐만 아니라 종교, 교육에 있어서까지 아주 내밀한 경험과 그를 토대로 형성된 막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한 마디로 그는 한국에 빠삭하다. 게다가 자기 입장이라는 게 거의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상당히 균형잡힌 시각을 갖는다. 그는 우리가 서구인의 인종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우리가 동남아 노동자와 조선족에게 보이는 노골적인 경멸을, 식민지 시대 및 해방기에 일본과 미국이 저지른 각종 양민 학살에 핏대를 올리면서도 용감한 한국 해병대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모순을 날카롭게 집어낸다.


이렇듯 이해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은 뭔가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선 어마어마한 혜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연구 결과를 이해 당사자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당사자에 대한 외부의 비판은 오히려 당사자들을 오만과 편견, 왜곡과 아집으로 똘똘 뭉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니가 뭔데 이래러 저래라냐, 당해보지도 않은 놈이 뭘 안다고 큰 소리 치냐, 니가 진짜 우리 아픔을 아냐, 그러는 너네 나라는 더러운 게 없냐? 이쯤되면 내용에 대한 이성적 비판이 설 자리가 없다. 거의 신앙에 가까운 불신. 이성에 대한 학살. 어디 옹호라도 할라치면 더러운 매국노로 찍혀 생매장 될 각오를 해야 한다.


미즈노 교수라 불리던 한 일본인은 오히려 이를 이용해 고국으로 돌아가 상당한 이득을 취했다. 혐한 분위기를 타고 오른 그의 원색적인 한국 비판은 한국인이 흥분할 수록 더 가치있게 팔려나갔다. 이런 면에서 박노자는 확실히 선비에 가까운 것 같다. 아니 어떤 면에선 진짜 베팅을 할 줄 아는 무서운 겜블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999년 박노자는 한국인으로 귀화한다. 머리는 제 3자로 가슴은 당사자로 남을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것이다. 이제 한국에 대한 박노자의 비판은 모두 자기 반성이 됐다. 진실은 얻으려면 누워서 침뱉기를 두려워해선 안 된다. 그의 침뱉기는 때로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고 냉정하지만 그 밑에 인간 자체에 대한 박애와 존중이 깔려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의 글을 차분한 마음으로 읽어 나갈 수 있게 된다. 진정한 애국이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대한민국 만세는 진짜 만세할 나라를 만들고 나서 외쳐도 상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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