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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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시간 서점에 들렀다 우연히 <7년의 밤>을 만났다. 짧은 세 쪽의 프롤로그였다. 나는 그대로 서서 세 쪽의 문장을 베껴쓰고 싶었다. 펜과 종이만 있었다면 결단코 실행에 옮겼으리라. 


소설을 쓰려면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7년의 밤>은 이야기의 시작이 이야기의 중간이어야 한다는 장르의 규칙을 이상적으로 수행한다. 시작을 중간에서 하다니? 당연한 얘기다. 전후 맥락없이 뜩 하고 튀어나온 이야기는 독자의 뇌를 간질일 수 밖에 없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작가와 독자의 밀당은 독자의 머리 속에 이 의문이 등장하는 순간 작가의 압승으로 끝난다. 궁금하면 어쩔 수 없어. 책장을 넘길 수 밖에. <7년의 밤>이 68쇄를 찍은 건 모두 이 프롤로그 덕분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지 않을 것이다. 우주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지구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지상으로 빨려 들어온다. 거대한 빛꼬리를 그리며 대기권을 통과하는 모습이 아름답지만 그 빛은 찰나에 불과하다. 그대로 수직 추락한 이야기는 땅 위에 닿기도 전에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이 소설은 스릴러 치고는 긴장감이 부족하고 미스테리라고 하기엔 사건의 전말이 너무 뻔하다. 프롤로그는 잘 만든 예고편이었다. 극장에 앉아 전부를 확인하고 나니 치즈 소스에 나초를 찍어 먹은 것 보다 강렬한 경험을 기억하기 어려웠다. 150~200 페이지 정도 분량을 줄였다면 더 괜찮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가기엔 캐릭터들이 너무 일상적이다. 일상적이기에 상세한 배경 설명 없이는 이야기가 비어보였을 것이다. <7년의 밤>의 살인마는 안톤 쉬거가 아니니까. 빔 자체가 오히려 캐릭터를 형성해 버리는 미지의 사나이가 아니니까.


그런 면에서 <7년의 밤>이 일으키는 사건들은 <7년의 밤>의 캐릭터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컸던 게 아닌가 싶다. 도저히 그런 일을 벌일 수 없을 것 같은 인물들이 그런 일을 벌인다. 서사가 캐릭터의 멱살을 쥐고 끌고간다. 옷깃이 뜯어지고 신발이 벗겨진다. 퉁퉁 부은 발에서 철철 피가 흐른다. 이 균열이, 이 폭력이 나를 긴장의 진공 속으로 빠뜨린다. 역사 소설이었다면 어땠을까? 역사는 불가항력의 면모를 지녔으니까. 캐릭터가 질질 끌려간대도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 됐을지 모른다.


어쨌든 각자가 벌이는 일에 필연성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왜 자기가 차로 친 소녀의 목을 비틀어 죽여야만 했을까? 남자의 부하 직원은 왜 남자의 아들을 데려다 키웠을까? 그리고 소녀의 아버지는 왜 복수를 위해 7년을 기다렸을까? <7년의 밤>은 내가 던진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건 독자의 질문 뒤에 작가의 답이 이어지는 것이다. 엉뚱한 대답이 나오면, 대답을 회피하면 나는 한 두 번 더 기다려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종일관 지속되어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이어진다면 나는 그 책을 책장에 쳐박아 70년을 썩힐 수 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건 책에게 있어 모진 시험이다. 이제 그 시험은 끝났다. 부디 책장에 누워 편안히, 70년을 보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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