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물 이야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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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은 미야베 미유키였다. 오랫동안 헤매다 드디어 길을 찾았다. 장르 소설이지만 문장을 허투로 쓰지 않는다. 이야기가 촘촘이 짜여져 있다. 책을 읽어 나갈 때마다 그 부드러움이 눈 끝에 와 닿는 것 같다. 이 사람이라면 명성과 판매부수가 이해된다. <오사카 소년 탐정단>과는 차원이 달랐다.


9개의 단편이 연작으로 늘어선 책이라 대단한 스케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건 아니다. 소소하다. 분량 탓에 고조되던 미스테리가 어이없이 툭 꺽이기도 한다. 추리 미스테리 장르의 압도적 긴장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100% 실망한다. 그러나 <맏물 이야기>를 읽어본 뒤 나는 확신하게 됐다. 이 사람의 두꺼운 장편들이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맏물 이야기>는 에도 시대 서민들의 사건 사고를 다룬다. 주인공은 모시치. 오캇피키다. 에도 시대 도쿄 한 구역의 파출소장 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부하는 두 명을 거느린다. 어리고 성급하지만 빠르고, 정보를 수집할 때 만큼은 인내심을 발휘하는 이토키치. 느리고 덩치까지 어마어마해 소라고 불리지만 범인을 제압할 땐 신속한 무력을 발휘하는 곤조. 경험 많고 냉철한 대장 밑에 행동파 부하 두 명이다. 자로 잰듯 균형을 갖춘게 도리어 전형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지만 이 조합만으로도 벌써 이야기가 기대된다. 거기다 건달 가쓰조와 의문의 무사 출신 요리사, 도력을 갖췄다고 알려진 아이가 추가된다.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있음은 당연하다. 이어지는 단편은 떡밥을 던지듯 조금씩 조금씩 단서를 흘린다. 그 한 조각을 입에 문 순간 작가의 챔질에 독자는 입이 꿰어 속절없이 끌려갈 수 밖에 없다. 이런걸 보통 몰입이라고 부르지. 


잘 만들어진 캐릭터는 대개 등장하는 순간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종이 위에 있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다. 작가 자신도 이야기를 말하는 게 자신인지 아니면 캐릭터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들을 보고 있으면 그렇다. 작가의 존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맏물 이야기>의 강점은 튐 없이 매끈하게 빠져나가는 부드러움이다. 특히 이야기에 억지가 없다. 대개의 추리 소설은 현실에선 도저히 가당치 않은 범죄를 일으키고 보통의 인간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트릭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사람들은 명탐정의 천재적 추리 능력에 감탄하지만 사실은 범인의 천재성에 감동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명탐정의 추리력도 범죄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범죄가 천재적으로 벌어지지 않는 이상 추리도 천재적일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에도 시대의 서민이고, 그래서 사건 또한 서민적이다. 있을 법하고 현실적이다. 추리 또한 오랜 경험에 의한 직관, 정황을 수집해 직조하는 추론이 잘 어우러져 타당하게 흐른다. 어찌보면 심심하다 할 정도로.


에도 막부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삼장군 시대의 마지막에 해당한다. 도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를 기반으로 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잔당을 쓸어내고 세운 일본 최후의 막부다. 이후 약 200년간 전국은 평화를 유지했다. 그런데 이게 아이러니다. 세계는 바야흐로 태평의 우상향 곡선을 그리는데 개개의 삶은 여지없이 흥망성쇠를 되풀이 한다. 평화의 시대에도 인간은 있고 인간이 있으면 욕망이 있고 욕망이 있으면 사건이 있다. "바람 냄새도 향긋한 오월"에 가다랑어 회를 썰어 먹으며 모시치는 범죄의 전말을 추리한다. 평화와 파멸의 묘한 공존. 그 분위기가 이 책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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