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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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은 "오늘날 닥쳐온 시간의 위기는 가속화로 규정할 수 없다"고 했다. 가속화의 시대, 즉 근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것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근대 이전의 인간들은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을 필요가 없었다. 삶의 의미란 계급, 왕,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지 자의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계급은 몰락하고 왕은 사라졌으며 신은 죽어버렸다. 그러니 이제 누가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나, 나 자신이다.


자유가 있다고 의미를 만들 수 있으면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방황하는 현대인들은 과연 자유가 없어서 삶의 의미를 못 찾는 걸까? 오히려 너무 많은 자유가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닐까? 혁명은 급작스러웠고 근대는 불시에 들이닥쳤다. 자유가 폭포수 처럼 쏟아져내렸다. 하마터면 이 급류에 휩쓸려 모조리 떠내려갈 뻔 했지만 다행이 진보에 대한 믿음, 언젠가 우리 모두가 풍요와 평화 속에 살게 되리라는 '시대의 희망'이 이들에게 주어진다. 근대인들은 이 희망을 구심점 삼아 미래로의 행진을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구원이(근대의 희망) 미래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미래를 앞당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속도에 대한 무한 긍정! 이리하여 근대는 가속화 시대가 된다.


근대에 대한 한병철의 설명은 탁월하다. 그는 정확하게 근대의 본질을 꿰뚫는다. 문제는 이 멋드러진 해석 뒤에 느닷 없이 '목적이 사라진 후근대'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왜 목적이 사라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이 무작정 후근대를(현대) 가속화 시대(근대)와 분리하려고만 한다. 후근대는 가속화의 결과가 아니라 의미를 잃은 시간, 즉 목적이 사라진 시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지 않은가? 현대가 오기 한참 전부터 이미 신은 죽어있었단 말이다.


근대를 움직인 원동력은 시대가 부여한 사명이지 개개인이 설정한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개인의 목적이 사라졌기 때문에 현대의 문제가 도래했다는 저자의 주장은 온당치 않다. 원인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왜 근대를 지탱하던 시대의 사명이 사라졌는가? 



멈춰버린 기차


근대의 믿음은 역사의 전진이 곧 우리 삶의 나아짐이라는 믿음이었다. 가속화하는 기차에 올라탄 최초의 근대인들은 조금씩 변화하는 세상을 토대로 그 믿음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세상이 의도한 대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빈부격차는 풍요를 배신하고 권력의 집중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믿음에 상처를 입힌다. 이제 기차의 방향은 우리의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데다가 그 속도는 너무 빨라 멀미까지 난다. 사람들은 꽉 잡고 있던 손잡이를 놓는다. 기차는 차가운 땅 위로 우리를 내동댕이 친 뒤 순식간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낙오자들의 선택은 두 가지다. 뒤늦은 후회와 함께 떠나간 기차를 쫓는 것. 텅 빈 선로에 서서 또 다른 기차를 기다리는 것. 이들에게는 모두 자기 스스로 기차를 만들고 그 목적지를 정할 자유가 있지만 이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은 전무하다. 현대인은 자신의 무궁한 능력을 잊은 채 끝없는 방황을 시작한다.


흔히 현대의 삶을 서사가 사라진 삶이라고 한다. 삶에서 서사가 사라진 이유는 시간이 목적을 잃었기 때문이다. 시간은(사건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 특정한 목적에 따라 꿰어 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를(이야기) 가질 수 없다. 이야기가 되지 못한 시간은 파편화되어 그저 흩뿌려질 뿐이다.


시간이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현대인의 인생은 언제나 공허하다. 사람들은 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새로운 경험에 집착한다. 오늘날 폭발적으로 생산되는 페스티발, 폭증하는 해외 여행, 주말과 휴가를 불태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뭔가 씐나고, 펑키하고, 흥미로운 경험을 끊임 없이 찾아나선다. 그러나 의미로 꿰어지지 못한 경험은 허무를 더할 뿐이다. 현대인은 증발 된 삶을 증발하는 삶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다.


스펙타클에 취약한 삶은 또한 문화 산업의 먹잇감이 된다. 미디어가 이끄는 대로 한때는 힐링, 한때는 인문학, 또 한때는 멘토에 열광하면서 여행을 가고 책을 사고 특강에 참여한다. 이 중 어떤 것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문화 산업의 덫에 걸린 어리석은 소비자가 될 뿐이다.



머무르는 삶


저자 한병철은 서사가 사라진 삶을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자기만의 고유한 향기가 나는 삶을 만들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무엇이 우리의 삶에 향기를 더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색, 바로 머물러 생각하는 능력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활동적 삶은 오히려 허무를 더하고 더해진 허무는 또다시 활동적 삶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활동은 축적될 새도 없이 다른 활동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사색은 이 끝없는 흐름의 중간에 웅덩이를 만들어 속도를 늦춘다. 늦춰진 속도는 웅덩이에 의미를 남긴다. 웅덩이가 깊을 수록 의미는 더 많이 쌓일 것이다. 


그러나 이걸로 충분할까? 


사색은 파편화된 시간에 질서를 부여해 개인의 삶을 향기롭게 만들 수는 있지만 결국 세계 속에 파편화해 존재하는 개개인을 하나로 묶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사색은 개인적 문제의 해결책이지 사회적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끝없는 토론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이상을 논하기에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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