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디자인을 하다보면 프레임이 얼마나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목격할 기회가 많다. 예를 들어 사용자들이 실수로 삭제 버튼을 눌러 모든 자료를 지우게 되는 문제를 해결하시오 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치자. 이 때 대다수의 디자이너들은 삭제 버튼을 잘 안 보이게 디자인하거나 버튼을 눌렀을 때 안내 문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화면 내에서 '삭제' 버튼을 제거하는 것이다. 실제 삭제 버튼 없이도 시스템은 아무런 문제 없이 동작하지만 사람들은 '삭제 버튼의 문제점을 해결하라'는 질문이 형성한 강력한 프레임 덕분에 문제 자체를 '없애려'기 보다는 기어이 그것을 '해결'하려 든다.


앨버트 O.허시먼이 보수주의자들의 수사학에서 발견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담론은 어떤 근본적인 성격적 특징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욕망, 성격, 신념과는 거의 무관한 '논쟁의 규범들'에 의해 형성된다(p.17)'고 말했다. 


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프레임을 깨지 않고선 우리는 그들의 규칙 안에서 영원히 진흙탕 싸움을 벌일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보수의 수사학을 꿰뚫어 봄으로써 그들의 올가미를 피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역효과 명제,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지난 지방 선거에서 서울 시장에 출마한 정몽준 후보가 반값 등록금을 두고 했던 말을 기억해 보자. 그는 반값 등록금이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떨어뜨리고 대학 졸업생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을 훼손시킨다"고 비판했다. 이것이 바로 보수의 첫 번째 프레임, 역효과 명제다. 더 좋은 삶을 위한 당신의 노력이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말이다. 정몽준 후보의 발언은 이미 반값 등록금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확고하게 형성된 탓에 그닥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보수주의자들의 전형적 수사학을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사실 이런 역효과 명제는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반값 등록금 쟁취를 위해 시위에 나선 학생들이 있다고 하자. 비겁함을 갑옷처럼 두르고 살아온 어른들은 그 학생들에게 집에 들어가 공부나 하라고 할 것이다. 너희들이 더 좋은 삶을 위해 발버둥 칠수록 공부할 때, 취업할 때를 놓친 너희 개인의 삶은 더 깊은 시궁창에 빠질 것이라고 점잖게 타이르면서 말이다.



무용 명제, 무엇을 하든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일명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요약할 수 있는 이 명제는 대다수 현대인이 깊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효과적이며 파괴적인 보수의 수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역효과 명제는 설령 그것이 맞는 것으로 판명됐더라도 '이 방법은 틀렸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여지를 남길 수 있다. 그러나 무용 명제는? 그것은 심각한 허무와 극심한 무기력을 낳는다. 게다가 한 번 심어진 무기력과 허무는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 강화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기력과 허무는 그것이 외부에서 심어진 가상이라는 사실을 지우고 자기가 실제로 경험한 현실이라는 생각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사회 변혁을 위해 큰 노력을 해본적도 없고 모든 게 무용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지도 않았으면서 오늘날의 청년들이 보여주는 극심한 허무는 허무와 무기력의 내재화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나는 이런 무용 명제의 가장 멋있는 대응으로 영화 '변호인'의 한 대사를 꼽는다. '늬들이 아무리 데모를 해봤자.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을 거'라는 송강호에게 임시완은 '아무리 단단해도 바위는 죽은 것이고, 계란은 살아 있기에 기어이 부화해 그 바위를 넘는다'고 말한다. 


현재만 보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변화란 원래 실감하기 힘든 법이다. 그러나 삶에서 조금만 거리를 두고 역사를 바라보면 보수주의자들의 무용 명제가 얼마나 무용한지 알 수 있다.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면, 당신이나 나나 모두 종으로 살았을 것이다(조선 시대 양반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5%에 불과했다).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면, 쉴새 없이 정부를 비판하는 난 이미 남산의 한 고문실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정말로, 정말로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부패한 정치인들이 장충 체육관에 모여 그들만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넋 놓고 바라봐야 했을 것이다(대통령 직선제는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폐지 됐다 1987년에 이르러 겨우 부활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된 게 채 30년도 안 된 것이다).



위협 명제, 너희들은 전부 빨갱이


북한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이토록 쉽게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보수주의자들은 앞에선 북한을 없앨듯이 노려보지만 뒤에선 그들이 존립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대한민국에선 표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빨갱이를 조지는 것만큼 확실한 게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선 환경 보호에 관심을 갖거나(4대강 사업에 반대하거나) 아동 복지에 찬성하거나(무료 급식에 찬성하거나) 교육 기회의 확산에 동조하면(반 값 등록금을 지지하면) 누구나 쉽게 종북주의자가 될 수 있다. 보수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과 손을 잡아 4대강을 살리고 아동 복지를 확립하고 많은 학생들에게 평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 준 뒤 내란을 일으켜 대한민국을 적화통일 할 존재다. 정신병도 이만하면 중증에 가깝지만 그 바닥에선 가장 심한 정신병자가 가장 큰 영광을 받기에 정신병자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복지 정책은 꼭 색깔론이 아니더라도 국가 전체를 빈민의 소굴로 만들 것이라는 위협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복지는 필연적으로 국가 지출을 늘리며 부족한 세수는 증세를 통해 확보할 것이다. 호환마마 보다도 무서운 세금! 늘어난 세금 때문에 기업의 투자는 위축될 것이며 이는 곧 기술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져 기업이 도산할 것이다. 여기서 양산된 실업자를 감당하기 위해 국가의 지출은 더더욱 늘어나고 늘어난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살아 남은 자들에게 더더더욱 과도한 세금이 부여될 것이며 이로 인해 도산 기업이 폭포수 처럼 쏟아지고 바야흐로 실업자의 빅뱅이... 이 악순환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건 국가 경제의 완전한 파탄 뿐이다. 유럽의 복지 국가들이 수 십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지에 대한 이런 터무니 없는 위협이 먹혀든다는 건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수사학의 아이러니


보수란 간단히, 현재 상황에 불만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들의 삼대 수사학인 역효과, 무용, 위협 명제의 목적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가만히 있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여기에 힌트가 있지 않을까?


보수가 온갖 수사학을 동원해 우리의 길을 막으려 한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보수는 자유와 평등의 빛을 가리기 위해 무시무시할 정도로 두꺼운 켜튼을 쳐둔다. 이로써 세상은 캄캄한 암흑 속에 갇히겠지만 암흑은 오히려 우리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걔 중 가장 캄캄한 곳이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걸 말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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