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슬러 민음사 모던 클래식 64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스포일러 많습니다.


코맥 매카시라는 이름만 듣고 반사적으로 이 책을 손에 든 사람이라면 다소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64번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단 이 책은 우리가 열광해 마지 않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이 아니라 그가 최초로 집필한 '영화 시나리오'기 때문이다. 코맥 매카시가 문학 인생 최초로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출판 관계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설레었을까?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했겠지.


<카운슬러>의 출간은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다. 마케팅의 산물이라는 얘기다. 영화가 개봉하기 13일 전 1쇄가 나온 이 책은 <카운슬러>의 개봉과 동시에 2쇄를 찍었다. 줄곧 탐욕의 부덕을 노래하던 코맥 매카시 자신도 - 물론 그 자신이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결국 출판 '산업'이라는 거대한 탐욕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은 씁쓸한 아이러니를 넘어 잔인한 조소로 다가온다.


산업은 산업의 탐욕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산업을 만들고 우리는 비판의 강도를 높임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산업의 수요를 끝없이 창출, 그것의 활성화에 이바지한다. 산업은 우리에게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훈장을 부여한다. 우리는 그 훈장으로 자위를 한다.


뭐가 이리 진지해?



똑같은 지옥 위에서


<카운슬러>는 코맥 매카시가 줄곧 그려왔던 지옥, 바로 그 위에서 폭력과 죽음의 서사를 되풀이 한다. 황량한 사막은 여전하고 그 위로 탐욕이 붉게 노을진다. 그 속에 녹색 돈다발이 있다. 바뀐점이 있다면 돈의 액수다. 루엘린 모스가(<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주인공) 10년 전 사막 위에서 주운 돈가방엔 250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그 때는 250만 달러로도 인생 역전이 가능했을 것이다(<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배경은 80년대의 텍사스다). 하지만 오늘날 고작 250만 달러 때문에 국경을 넘나드는 대추격전을 벌이며 수 십명을 죽였다고 하면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강남에 아파트 한 채 값도 되지 않는 돈을 갖고 도대체 왜? 그래서 액수는 8배, 2,000만 달러가 된다. 물론 1조원 대의 사기 대출을 받는 시대엔 이것도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코맥 매카시의 주인공들은 모두 중요한 선택을 한다. 그들은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어렴풋이 이해하지만 자기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나는 아닐거야 라는 안이한 생각으로(<카운슬러>) 기꺼이 탐욕에 몸을 던진다. 그렇게 운명의 톱니바퀴가 굴러 간다. 이후 작가는 이 기계적 움직임을 역시 기계적인 건조함과 담담함으로 묵묵히 묘사해 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추격자들이다. 그들은 살인청부업자나 마약 조직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죽음의 메타포다. 그 누구도 이 추격자를 피할 수는 없다. 탐욕은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는 찾아올 그 추격자의 방문을 좀 더 앞당긴다. 너는 도망칠 수 있다고? 어림없는 소리. 눈을 감는 순간에야 당신은 당신의 필사적인 도망이 사실은 죽음의 품을 향한 어이 없는 질주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이 죽음을 연기한 것이 최악의 사냥꾼 안톤 쉬거였다면 <카운슬러>에선 멕시코 후아레스의 마약 조직이 그 역할을 맡는다. 둘은 모두 죽음을 상징하지만 거기엔 큰 차이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두 대상이 이야기의 재미에 미치는 영향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안톤 쉬거는 무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한 명의 인간이었기에, 어쩌면 대항해서 이길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게한다. 실제로 그는 루엘린 모스가 쏜 총에 맞아 빈사 직전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카운슬러>의 마약 조직은 그 실체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점, 그것이 한 존재를 너무나 간단히 지워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끔찍한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카운슬러>의 등장인물들은 루엘린 모스처럼 샷건을 날리거나 국경을 넘어 도망치지 못한다. 그들은 속수무책이다. 검은색 에스컬레이드가 도착해 길을 막고 차에 태우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카운슬러>에선 비명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 압도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이야기는 아무런 긴장감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흥미진진한 싸움 구경이 아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폭력이며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학살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 기대했던 당신이 이 영화 혹은 소설을 보고 실망감을 느꼈다면, 아마도 이게 그 이유일 것이다.



과대평가된 탐욕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나온 게 2005년이니 거의 10년 전이다. 이 10년 동안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코맥 매카시는 변화한 세상에 만족할까? 올해 82세가 된 이 노인은 여전히 이 세상을 못마땅해 하는 것 같다.


코맥 매카시는 샷건 한방을 얼굴에 맞는 것으로 탐욕의 대가를 치루는 세상이란 천국에서나 존재할 법한 자비로운 세계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탐욕의 끝은 더 처절하고 끔찍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그 뜨거운 덩어리를 놓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카운슬러>에는 스너프 필름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스너프 필름은 대략 이런 내용이다.


마체테로 여자애 머리를 댕강 잘랐다더군. 열네 살쯤 된 아이였는데, 복면을 한 남자한테 항문 성교를 당하던 중 울면서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는데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지.(p.99)


뭔가 일이 꼬였다는 걸 알았을 때 마약 중계상 웨스트레이는 주인공 카운슬러를 만나 이 얘기를 해준다. 그들이 관계를 맺은 마약 조직이 이 스너프 필름의 제작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카운슬러는 도망을 계획하지만 그의 약혼자 로라가 멕시코 조직에 납치당한다. 조직은 애초에 로라만을 타겟으로 했을 것이다. 탐욕의 대가는 죽음보다 더 커야 하니까.


카운슬러는 로라를 찾으러 멕시코 후아레스로 떠나지만 그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채 그저 자신에게 배달된 DVD 한 장을 받는다. 그 순간 후아레스 변두리의 쓰레기 매립지에, 빨간 원피스를 입은 목 없는 로라의 시체가 더러운 쓰레기 더미 속으로 파묻힌다. 


'인생은 한 방'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머저리들에게 빨간 원피스를 입은 로라의 시체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올 인'을 외치며 팔을 뻗는 순간 그 시체는 당신이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머저리들은 그저 죽음으로 이 모든 걸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탐욕의 종말에 선 사람들에게 죽음은 자비다. 그 끝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공포.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정도의 고통. 제발 죽여달라고 소리질러야만 하는 세상을 경험해 본 적 있는가? '탐욕은 언제나 과대평가되지만, 공포는 그렇지 않다'(p.105)는 말은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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