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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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1월, 볼셰비키 혁명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권을 탄생시킨다. 드디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 비로소 종말을 맞은 억압의 역사. 수고롭고 짐진 자들의 모든 근심이 완전히 사라질 것처럼 보이던 시대, <개의 심장>의 미하일 불가꼬프는 그 희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리어 환멸을 본 소설가였다.



<개의 심장>, 그리고 <악마의 서사시>


이 책에 수록된 두 편의 소설 <개의 심장>, 그리고 <악마의 서사시>는 모두 공산주의 사회의 천박함과 부조리를 고발한 작품이다. 


<개의 심장>에선 끓는 물에 화상을 입은 옆구리를 질질 끌며 떠돌아다니는 개 샤릭이 등장한다. 어느날 외과 의사 필립 필리뽀비치는 이 개를 데려와 따뜻히 입히고 먹이는데, 그것은 샤릭에게 인간의 뇌하수체와 생식기를 이식하기 위해서였다. 이 그로테스크한 실험을 통해 개 샤릭은 인간이 된다. 인간이 된 샤리꼬프(개인간 이라는 뜻)는 가지지 못한 것이 폭력 행사의 자격이 되는 양 충천해 있던 그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처럼 온갖 폐 끼치기가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여전히 지성이 부족한 샤리꼬프. 불가꼬프는 받아야 될 이유도 모르는 채 권력을 부여받은 인간이 얼마나 단순하고 천박해 질 수 있는지 인간이 된 개 샤리꼬프의 행위로 은유한다. 


<악마의 서사시>는 공산주의 중앙 집권 체제의 비효율과 인간성의 말살을 조롱하는 작품이다. 볼셰비키 혁명의 주역 레닌은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꿈꿨고 실제로 그러한 국가를 건설했다.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는 모든 생산과 소비 기타 등등 인간의 행위를 계획한다. 이후 체제는 이것을 맹신하고 예외를 인정치 않는 권위주의적 사회로 변질되는 데 특히 소비에트 사회는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반혁명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생각이 마비된 인간은 창의적으로 행동할 수 없고 창의가 결여된 인간은 다양한 예외가 존재하는 세상 일에 기계적 반응으로 일관할 뿐이다. 결국 체제는 끔찍한 비효율 덩어리로 전락하고 인간은 하나의 부속품이 된다.


불가꼬프는 개에서 인간으로 급변한 '샤리꼬프'의 만행을 들려줌으로써 혁명처럼 급진적인 변화가 이 세상에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불가꼬프는 <악마의 서사시>를 통해 그 대단한 혁명이 이뤄낸 것이 그토록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정부였는지 의문을 던진다.


물론 역사가 보여준 공산 국가의 실체는 불가꼬프의 묘사대로였다. 프롤레타리아에게 혁명은 그저 분노를 배설할 화장실에 불과했고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같은 사람들에겐 권력을 차지할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해방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혁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기가 됐다. 하지만 나는 불가꼬프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능한 방법이 과연 무엇인지를.


불가꼬프는 우리가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나타나고 국가라는 것이 형성된 이후 착취의 구조는 거의 변한 적이 없다. 우리는 수 천년의 시간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할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는 오랜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놀라운 진화는 언제나 급진적 변화를 통해 이뤄져왔다. 공산주의 혁명이 그 과정에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사악한 독재자들 때문에 변질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순수한 가치마저 폄하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확인한 사건이었으며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분노가 거세된 세대에게...


임상수 감독의 영화 <돈의 맛>에 보면 회장 비서 영작(김강우 분)이 회장 아들 윤철(온주완 분)에게 싸움을 거는 장면이 나온다. 윤철의 수모를 참다 못한 영작은 차를 세우고 윤철을 차 밖으로 끌어낸다. 힘으로는 이길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영작은 그러나 주먹으로도 윤철을 이기지 못하고 길바닥에 뻗어버린다. 피착취자 최후의 수단마저(힘, 혁명)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임상수 감독은 분노하지만 철저하게 짓밟히는 우리 세대의 무력감을 표현하려 했던 것 같다. 촛불 시위에 나섰다 물대포에 쓰러지는 시민의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이것도 다 옛말이다. 


영작은 실패했지만 분노할 줄 안다는 면에서 일종의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짜증을 내는 일은 있어도 분노할 줄은 모른. 우리의 분노는 완전히 거세됐다. 뭔가를 해야한다는 건 뭔가가 억압하는 것만큼 짜증나고 귀찮은 일일 뿐이다. 그런 얘기를 하려면 그냥 닥쳤으면 좋겠다.


사실 이 소설은 나에게 거의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했다. 혁명이란 우리 세대의 관심사에서 뿌리 끝까지 사라져버린 단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도 변할 수 있겠지. 사람은 늘 변하는 법이니까. 이 상황이 더 악화되는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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