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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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타당성은 별개로하고 상징계와 상상계를 포개놓아 들뢰즈의 다이어그램으로 귀결시키는데서 우리는 총체화하는 ‘사회‘를 잃게되는거 아닐까? 때문에 저자의 혁명론은 우스꽝스러워질뿐이고. 대타자의 여성적 향락 역시 마찬가지아닐까? 그냥 꼼꼼히 정리한 것 정도만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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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 현대 도시의 철학적 모험
장용순 지음 / 이학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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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개반을 주고 싶다. 초심자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각 사상가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더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는부분이 있을텐데, 그게 아예 없다. 저자의 세 사상가에 대한 설명처럼 실재계, 잠재태가 우선하는 것이라면 내재적이란 말의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헤겔처럼 상징계가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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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깨주의의 탄생 - 누구나 함부로 말하는 중국, 아무도 말하지 않는 중국 보리 인문학 3
김희교 지음 / 보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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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10여년 넘게 일상이 된 즐거움이 하나 있다. 주말을 제외하고 업무가 끝나면 매일 알라딘의 새로나온책울 검색해 흥미 있는 책들을 보관함에 담고, 꼭 사고 싶은 책들은 장바구니에 담는 것이다. 꼭 읽고 싶었던 주제의 책을 발견하여 장바구니에 담는 날은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하루가 되기에 비용 없이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목과 목차는 관심이 있지만 저자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거나, 지금 꼭 읽고 싶진 않지만 언젠가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보관함에 담아 놓았던 책들을 가끔씩 한꺼번에 충동구매 할 때가 있다. 이런걸 보면 이 취미도 그다지 저비용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책 역시 충동구매로 구입한 책이었기에 한동안 구석에 박혀 있었다. 최근에는 너무 머리 아픈 철학책들만 보던 터라 머리도 식힐 겸 좀 술술 읽힐 만한 책을 고르던 중 지난 주말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알라딘에서만 17000권 이상 팔렸음에도 서평을 보니 호오가 너무도 뚜렷하게 갈렸다. 그러고보니 제목부터가 도발적이었다. ‘짱개주의라니? 퀴어처럼 반대자들의 비난을 거꾸로 자신의 정체성으로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용어법인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일단 읽어보기로 했다.

책을 여는 글에서부터 저자는 우리 언론의 중국 보도 행태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연다. 먼저 산타가 사라졌다2018년 중앙일보, 조선일보의 기사가 어떤 방식으로 가공되어 우리에게 사실로 전달되는지를 추적한다. 물론 거짓 기사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편견을 배경으로 우리 언론이 직접취재 없이, 특정한 편향성을 지니고 있는 홍콩에서 발행되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기사를 베껴서 보도하는 행태와 또 그로부터 편견이 재생산되는지를 밝힌다. 저자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들이 중국을 바라보는 프레임에서, 또 의제를 설정하는 아젠더 형성에서 마지막으로 서술의 객관성에서도 일관되게 미국의 입장에 서서 (혹은 보수적 한미동맹의 안보주의적 관점에 서서) 기사를 작성하고 배포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들을 하나씩 열거한다. 심지어 10부 한 장은 통째로 한국언론의 중국 보도 행태를 미시적으로 분석하기까지 한다. 이 책 내내 반복해서 지적되는 내용들이라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됐을듯 싶은데 저자의 언론 행태에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지적하는 내용들은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팩트들이어서 읽어보시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오늘날 동아시아 상황을 2차대전 후 샌프란시스코 체제을 기반으로 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 안보체제와 1972년 이후(-중 외교 정상화) 키신저 시스템이 상호 보완되어 안정화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소비에트권의 붕괴와 중국의 경제적 성장에 따라 중국봉쇄를 희망하는 미국의 군사적인 압박이 점차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으로서의 미국의 일방적 논리가 한국의 안보보수주의자들의 이해와 합치하여 중국을 폄훼하고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것이며, 이러한 의제가 언론을 통해 왜곡된 중국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국민에게 중국이냐 미국이냐를 선택하는 문제로 강제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저자는 미세먼지 문제, 사드문제,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 화웨이 문제, 홍콩문제, 신장문제 등을 다룬다. 내 생각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모두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주제들보다 더 내 관심을 확 끌어당긴 주제는 요 몇 년 사이 인터넷과 20대에게 더 자주 발견되는 중국인에 대한 혐오문제였다. 인종주의 문제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만 볼 수 있는 다른 피부색에 따른 현상이 아니다. “적대 인종이 위험한 존재임을 증명하고 이 적대 인종에 대한 위기감과 적개심을 정당화시키며 이 위험한 타자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모든 행위는 올바른 것이라는 인종주의적 신념이 우리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대두되는 지점이 바로 조선족아닌가? 이 위험한 조선족에 대한 혐오는 <황해>, <신세계>, <청년경찰>을 통해 확산되더니 천만영화 <범죄도시>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장르로 정착한 모양이 되었다. 아무리 조선족이 범죄와 특별하게 연관이 더 하지 않다는 팩트를 입증하더라도 그들은 위험한 존재, ‘타자가 되어버렸다. 저자가 조선족의 문제를 심층취재한 드문 시도로 상찬한 <시사인>의 김동인 기자의 <대림동 고시원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이라는 르포르타주는 반드시 읽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처럼 훌륭한 문제의식과 준비된 기획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저자가 내놓은 답안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저자는 미국의 제국적 패권에 맞서 중극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이 비판적 지식인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두 가지를 드는데, 먼저 비록 중국이 실망스러운 점들이 많이 있지만 미국이라는 제국과의 전선에서 대항체제를 형성할 파트너라는 점이다. 이러한 대항체제를 강화하게 되면 현재의 미국중심의 일극적 세계를 다극적 세계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느냐는게 정당화 논리의 핵심이다. 다음으로 저자는 중국을 상대적으로 덜 신자유주의적이고 다른 발전의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기회가 있는 곳으로 상상한다. 이러한 시각은 그가 샤오미에 대한 평가와 토지가 원칙적으로 국가의 것이기에 99년 임대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다른 자본주의 시스템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제언을 할 때 보여 진다.

과연 그런가? 샤오미부터 보자. 저자는 샤오미의 영업이익율 목표가 5% 이하라는 점과 연구개발 인력이 50%에 육박한다는 점 그리고 하청기업에 투자하여 수직계열화 하는 공급망 구성을 삼성이나 애플과는 다른 중국식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이처럼 낮은 영업이익율의 의미가 기업의 경영목표가 소비자=국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연구인력은 혁신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그가 얼마나 편향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쿠팡은 수천억의 영업적자를 내고 있으니 엄청나게 국민친화적 기업으로 비자본주의적이고, 삼성전자는 자회사가 300개가 넘고 그 자회사에 경영에 간섭하지 않으니 하청업체와 함께 공생하는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훌륭한 기업이다. 자본의 논리를 무시한 웃기는 주장이다. 샤오미는 홍콩에 상장된 회사다. 자본의 논리에 철저하게 경영전략을 짜고 그로부터 성장을 추구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보다 자본의 논리에 충실하다. 저자가 이런 망상을 하는 것은 다분히 중국 공산당에 대한 환상과 중국을 옹호해야 한다는 지나친 편향 때문인 것으로 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이점에서 토지 소유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영연방 국가의 토지는 원칙적으로 영국 여왕의 것이고 똑 같이 99년의 점유권(적은 곳은 50년짜리도 있는 것으로 안다)을 부여할 뿐인데, 그럼 저자에게는 영연방도 비자본주의적 기회가 충만한 곳으로 보여질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에 한계가 많아도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생각해보자. 나는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단 대상국가가 중국이 아니라 북한으로 치환해서다. 학교 다닐 때 NL 친구들과 무지 엄청 싸웠다. 민족주의만 더한다면 딱 그 논리다. 저자는 보편적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무조건 자유주의적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대상은 미국이나 중국이 아니라 억압받고 소외된 중국의 노동자, 농민 등의 기층민중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기층민중들과도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저자의 머리에는 오로지 민족국가 단위의 행위자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650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책에서 노동자, 농민, 민중이 거명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저자는 기층의 보편주의적 연대에 대해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이라고 비웃는다. 하지만 진짜 추상적인 것은 저자 자신이다. 대학 때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 공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는 최근에 다시 읽었는데, 그 책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한다. 아무래도 내 기억이 틀린 것 같은데 하지만 난 그 책으로 기억한다.) 일본의 게 잡이 어선은 일이 엄청 고되다. 그 게 공선의 노동자들이 1929년 원산 총파업 때 원산 앞바다를 지나면서 연대의 함성과 행동을 보여주는 장면을 기억한다. 식민지 노동자들과 식민본국의 노동자들의 연대, 이러한 보편적 가치에 따른 연대가 불가능하며 오직 국가 단위의 전략적 결정과 행위만이 현실적이라고 믿는 저자에게서 어떤 미래도 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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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논쟁 - 교회사를 뒤흔든 위대한 사상가들의 대화
로저 올슨 지음, 박동식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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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논쟁 로저 E. 올슨

무신론자인 내가 왜 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얼핏 생각하기에 세 가지 정도 이유가 떠오른다. 우선 가장 일반적인 주제로 인간 존재의 구성적 문제에서 비롯된 관심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꼭 죽음이라는 피안을 떠올리거나, 이성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근거에 대한 물음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변증법적 역전과 같은 무거운 주제로 가지 않더라도 살면서 닥치는 상황들은 신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항상 생각하도록 만드는 지젝이 [Hegel in a wired brain]에서 그의 기독교 무신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마도 이러한 생각인 듯싶다. 바디우나 지젝 자신에게 왜 직접적으로 유물론자라고 하면 되는 것을 굳이 종교라는 우회로를 거치려 하는지?”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우리가 종교를 회피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으며, 종교라는 신기루를 거듭 반복해서 가로지르고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답으로 내놓는다. 이 답을 칸트적 어법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종교는 단지 역사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인간 정신에 내재적인 초월론적 환상이다.” 때문에 우리가 신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현실에서 신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라캉의)아버지의 이름처럼 신을 이용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P66)

다음으로 보다 현재 상황의 사상적, 정치적 지형을 고려할 때 이론적 자원의 공급원으로써 신학을 공부할 이유가 있다. 레싱이 당대 스피노자 철학이 죽은 개취급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 것처럼 지금의 맑스주의가 그러하다. 요즘 번역-출판되는 이론서들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들뢰즈나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신유물론자들의 글들이다. 비판적 이론의 주류가 되어가는 이러한 유의 저자들 대부분의 공통점은 흐름과 네트워크에 대한 강조다. (물론 들뢰즈에 대한 해석에서 최근 출간된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같은 책들은 이와 다른 입장이고, 신유물론자 중 하만 같은 이는 좀 다른 입장이긴 하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들이 함의하는 바는 주체가 사라지거나 객체의 하나로써 주체를 정위하는 관점이다. 이게 무에 문제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주장의 정치적 결론들은 분산된 다원주의나 최악의 경우 퇴행적인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이론적 기반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들은 하나의 흐름을 아주 일반화하여 아주 개괄적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주시길) 그리고 이 주장에 따르면 세계는 하나의 총체화가 불가능하며 때문에 근본적 변혁이 불가능하다. 오로지 점진적이거나 부분적인 (그물망의 한 곳을 흔들면 다른 곳이 출렁이는 변화를 상상해보라. 딱 그런 변화다.) 위상 변화가 가능할 뿐이다. 이는 다수의 신유물론자가 범신론에 대해 호의적이거나 명시적으로 범신론을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형에서 맑스주의자를 포함해 근본적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훌륭한 협력자가 바로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은 주체도, 초월도 포기하지 않은 드문 분야이고, 세계를 총체적으로 묶어낼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신학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분야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학은 2천년 이상을 사상투쟁으로 점철된 역사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 역사를 따라가면서 쟁점들을 공부하는 것 자체로도 지적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 이토록 많은 교회가 있고 신자가 있다하지만 그 신자들 중 최소한의 신학적 이해도 가지지 못한 채 기복신앙으로 기독교를 믿고 있는 이가 대부분인 현실을 고려할 때, 신학적 지식은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 경우에도 몇 년 전 암 진단을 받은 배우자가 주말에 교회에 가기를 희망하여 함께 다녀 본적이 있다. 한데 역시나 교회는 신학 공부를 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곳이었다. 오로지 성경 강독 이외에는 아무도 신학에 관심도 없었고, 그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목회자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신학에 대한 상식을 갖추는 것도 잘못된 믿음에 맞설 수 있은 좋은 방법이 아닐까?

지금까지 이야기한 세 가지는 그저 내 개인적인 이유였을뿐이니 신학에 관심을 가질 다른 이유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2천년동안 너무도 방대한 주제들이 다루어졌는데 어떻게 어디서부터 또는 어떤 주제를 읽어야 할까? 해서 내 경우에는 신학에 접근하기 가장 좋은 길이었던 신학의 역사에 대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맨 처음 철학에 접근할 때 통상적으로 철학사를 통해서 하듯, 신학 역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그 중 보다 관심이 가는 부분을 찾아 심화 학습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 책은 총 29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2세기 켈수스의 논쟁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최대 미덕은 각 장에 상상의 대화를 통해 대립되는 주제를 분명하게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대화체이기에 알기 쉽게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가상의 대화를 마친 후 저자가 친절하게 쟁점들을 다시 간략하게 서술해주는 덕분에 대화체의 약점인 보긴 했는데 정리가 안되는문제를 덜어준다. 신학출판사 중에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새물결플러스에서 출간되자마자(2017) 바로 구입해서 거의 650페이지의 책을 이틀에 걸쳐 완독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술술 읽히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서 한 번 들면 손을 놓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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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만든 가난 - 가장 부유한 국가에 존재하는 빈곤의 진실 Philos 시리즈 25
매슈 데즈먼드 지음, 성원 옮김, 조문영 해제 / arte(아르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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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바로 우리의 문제다! [미국이 만든 가난]을 읽고

어느덧 해가 짧아지고 까페에서는 캐롤이 흘러나오며 연말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계절이 다가왔다. 매년 이맘때면 늘 옆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던 가난과 가난한 자들은 자선의 대상이 되어 뉴스를 통해 우리에게 가시화되곤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길가에 놓인 자선냄비에 성의를 표시하는 것으로 그 가난한 자들을 빠르게 망각하고자 한다. 그러나 가난은 우리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현실이다.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가난으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수치심을 안고 사회로부터 자신을 감추고자 한다. 푸코의 연인으로 더 유명한 프랑스 사회학자 디디에 에리봉이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고백한 바처럼 “(가난한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사회적 수치에 대해 쓰는 것보다 성적 수치에 대해 쓰는 것이 훨씬 쉬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그건 아마도 성소수자는 체제에 저항하는 자로서 자신을 위치 짓고 그에 대한 발언을 할 수 있는 기회라도 있는 반면, 그저 가난한 자는 사회적 정박지를 갖고 삶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하나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탓이기도 할 것이다.

왜 가난은 사라지지 않을까?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인 미국에서 빈곤선 이하의 지독한 빈곤속에 살고 있는 인구가 3,800만명이상이고, 거주지가 없는 공립학교 학생 수가 130만명이 넘는다. 저자는 가난이 주는 압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병원 대합실에서 시계를 쳐다보며 좋은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도하면 앉아 있어 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응급실 앞에 붙들려 있다 보면 다른 모든 걱정과 책임은 사소하게 느껴진다. 이런 경험은 가난한 삶과도 비슷하다. (…)  가난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삶의 나머지 부분에 마음을 쓸 여력이 없다”. 가난은 사람들에게서 안정과 안락만 박탈하는 게 아니라 지적 능력 역시 앗아 간다.” (P60) 살면서 가난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너무도 많은 고정관념과 편견들이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채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오도된 주장들에 저자는 하나씩 팩트체크를 해가며 조곤조곤 사례를 들고 사실을 열거하며 반박한다.

먼저 보조금의 문제를 살펴보자. 가난한 사람들이 지나치게 정부보조에 의존하고 있고 이로 인해 정부재원이 부족해져 복지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귀에 붙은 레퍼토리다. 가난한 자들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는 항목들은 푸드스탬프, 정부의료보험, 실업급여, 생활보조금 등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의 빈곤층들이 수령하지 않아서 남아 있는 보조금이 연간 1,420억 달러에 달한다. 복잡한 행정절차와 수치심을 자극하는 수급과정을 고려하더라도 미국의 빈민은 복지 수급에 서툴고 주어진 복지혜택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다. 때문에 저자는 빈민을 위한 복지프로그램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우리가 앱에서 쇼핑을 하고 음식을 주문하듯 편리하고 비대면적인 방식으로 수급과정이 바뀌기를 희망한다. 그렇더라도 가난한 이들이 엄청난 금액의 정부재원을 복지를 통해 가져가는 것은 사실 아닌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중상류층이 국가의 복지프로그램으로부터 제공받는 금액이 훨씬 더 크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주택소유자 보조금이 있다. 이 규모는 저소득층의 네 배에 달한다. 다음으로 연방정부가 보증을 서고 이자의 절반을 지불하는 학자금 대출이 있으며, 의료보험 세제 혜택이 어마어마하다. 이처럼 중상류층이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혜택은 잘 드러나지 않는 반면 저소득층은 곧바로 혜택으로 인지되기 때문에, 그 규모와 의존도에서 압도적인 혜택을 받고 있는 중상류층은 어이없게도 정부지출의 과다함을 지적하고 조세에 저항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미국 사회복지는 편파적이다!

다음으로 세금과 관련된 이슈를 살펴보자. 가난한 사람들은 소득이 적은 데다가 이런저런 세액 공제를 받으면 실제로는 영세율에 가깝다는 주장을 많이 듣는다. 내 경우도 잘난 척하는 주류 신문의 논설위원을 하고 있는 동창이 모임에서 세금을 내지 못하면 발언권이 없는 것 아니냐며 고소득 중심의 정책을 옹호하기에 자리를 나와버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를 보면, “연방 소득세의 누진적인 설계는 임금보다 (양도소득의 형태로) 재산에 붙는 세율이 더 낮다는 사실을 비롯, 다른 세금들의 역진적인 성격에 상쇄된다. 모든 세금을 감안했을 때 우리는 사실상 모두 동일한 세율의 적용을 받는다. 평균적으로 빈곤층과 중간층은 소득의 약 25퍼센트를 세금으로 내는 반면, 부유층은 실질적으로는 이보다 아주 약간 높은 28퍼센트의 세율로 세금을 낸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400명은 전체 중에서 가장 낮은 23퍼센트의 세율을 적용받는다.” (P166) 기실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논평가들은 소득세에만 초점을 맞춘 채 가난한 사람들이 비납세층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소득세 부담은 표준공제와 다른 세액공제를 적용하고 나면 거의 영에 가깝다면서. 하지만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세금을 지불하는 다른 방식, 그리고 부자들이 세금을 지불하지 않는 온갖 방식을 의도적으로 간과한 것이다. 최종 정산은 이렇다. 사회보험, 자산조사 결과에 따라 지급하는 프로그램, 세제 혜택, 고등교육에 대한 금융 지원에 들어가는 지출을 모두 정리한 가장 최근의 데이터에 따르면, 소득분포 하위 20퍼센트에 속하는 평균 가정은 1년에 정부 보조금으로 약 2 5733달러를 받는 반면, 상위 20퍼센트에 속하는 평균 가정은 약 3 5363달러를 받는다. 미국 최상위층 가정은 매년 정부 보조금으로 최하위층 가정보다 약 40퍼센트를 더 많이 받는다.” (P171~2) 이 수치는 우리의 경우에도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생활의 지혜로 꼭 기억하여 다음 동창회때는 꼭 써먹게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민간의 풍족함과 공공의 누추함의 문제다. 이 문제는 감세와 연관되어 있는데, 레이건은 법인세율을 46%에서 34%로 낮추면서 공공사업에 사용될 재원이 대폭 줄어든 것이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지목하는 주범은 민주당 정권하의 캘리포니아주에서 통과된, 부동산세에 부동산 평가액의 1퍼센트라는 상한선을 설정하고 그 평가액을 해당 부동산의 원구매가로 동결하는 주민발의 13이다. 저자에 따르면, 주민발의 13은 백인 주도의 반란이었다. (주민발의 13에 반대하는 집단은 공공부문 노동자들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뿐이었다.) 근본적으로 미국 양대 정당의 의제를 바꿔 놓고 공공은 가난한데 민간은 떵떵거리는 시대의 도래로 귀결된 대대적인 감세는 단순히 정부의 과욕에 대한 대응이 아니었다. 흑인과 공공재를 나눠 쓰라는 요구를 받은 백인들의 대응이었다. 게다가 이 대응은 부유한 백인 자유주의자들의 가난한 백인 노동계급과의 분리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 부유한 백인 자유주의자들이 자기 동네의 토지를 좀 더 포용적인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법률을 변경하는 것에는 저항해 놓고 강제적인 버스 통학제를 지지한 것은 그들이 사는 교외 동네에는 그 정책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백인 노동계급 가정들에게 백인 전문직들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인종통합의 비용을 짊어지라고 요구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백인 블루칼라에게 엘리트와 그들의 제도 대학과 과학, 전문 언론기관과 그들의 기준, 정부와 그 점잖음 을 향한 고약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새로운 정치적 지지와 정치화된 분노를 낳았고, 이는 오늘날까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죄책감을 정치적 동원의 자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저자가 열거하는 가난을 보며 죄책감을 갖지 않기는 어려웠다. 그때문인지 저자가 가난의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하는 부분은 내게는 동의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8장의 소제목은 빈민에게 권력을이다. 한데, 그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이 소비행태를 바꾸어 공정한 기업의 제품을 사고, 빈곤을 양산하는 기업을 엄단하는 것이라면 김빠지는 제안이다. 경제정의와 기후정의의 문제가 대립되지 않음을 주장함에 있어서도, 날조된 결핍이 문제라는 결론은 납득하기 어렵다. 빈곤을 종식시켜도 경제적 불평등은 남을 것이고, 기회의 평등만 주어진다면 결과에서의 불평등은 받아들이겠다는, 좋은 자본주의면 충분하다는 주장은 아쉬운 결론이었다. 이런 주장을 보고 나니 나는 다른 사람의 등에 올라탄 채 그 사람의 목을 조르고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다니게 만들지만, 나 스스로는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마치 그 사람에게 대단히 미안하다는 듯,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람이 더 편한 삶을 살면 좋겠다는 듯 행동한다. 그 사람의 등에서 내려올 생각은 하지 않고.”(P203톨스토이 재인용)라는 톨스토이의 말이 다르게 들렸다. 저자는 가난을 종식시키기 위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사안에 집중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조를 따지기 전에 개인적 실천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헤겔이 떠오른다. 구체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들을 사상하고 눈앞의 것에 집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이런 구체적이라는 것은 실상 다른 모든 것들을 추상한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오히려 가장 추상적인 것이 가장 구체적인 것이고 가장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이 가장 추상적인 것이 된다. 우리가 눈 앞의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당장의 변화를 가져오는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 실천이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면 시간이 지나 도로 그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더 큰 문제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저자도 강조했듯이, “담장 너머로 돈을 던지는 대신 그 담장을 허물어뜨려야 한다.

앞서, 캘리포니아의 주민발의 13과 관련해서 살짝 언급된 바 있지만, 오늘날 트럼프를 당선시킨 백인 노동자/빈민의 분노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엿볼 수 있었다. 한데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기술하는 일화는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2020 11월의 일이다. “원페어웨이지의 노동자들은 팁이 주 소득원인 노동자의 시급 15달러를 요구하려고 뉴욕 올버니의 주의회 의사당 밖에 모여 있었다. 주로 흑인과 히스패닉계 뉴욕 시민들로 구성된 시위대는 필수 노동자 엘레나라는 별명이 달린, 앞치마를 두른 7미터 높이의 흐느적대는 흑인 여성 인형을 가져왔다.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연사를 향해 환호를 하고 있는데, 빨간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자를 쓴 백인 남녀 한 무리가 다가왔다. 이들은 몰랐지만 그들이 시위를 하던 날은 주입법부가 대통령 선거 결과를 인증하는 날이기도 했는데, MAGA 시위대는 좀 더 일찍 모여서 그 집계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다. 친트럼프 군중은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러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악수를 하며 시위에 합류했다.” (P301) 언젠가 지젝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는 비록 지금은 리버럴의 의제를 지지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사람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바로 저 빈민/노동자들이다. 저들과 함께하고 저들의 해방을 위한 길이 아니라면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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