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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만든 가난 - 가장 부유한 국가에 존재하는 빈곤의 진실 ㅣ Philos 시리즈 25
매슈 데즈먼드 지음, 성원 옮김, 조문영 해제 / arte(아르테) / 2023년 11월
평점 :
이것은 바로 우리의 문제다! [미국이
만든 가난]을 읽고
어느덧 해가 짧아지고
까페에서는 캐롤이 흘러나오며 연말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계절이 다가왔다. 매년 이맘때면 늘 옆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던 가난과 가난한 자들은 자선의 대상이 되어 뉴스를 통해 우리에게 가시화되곤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길가에 놓인 자선냄비에 성의를 표시하는 것으로 그 가난한 자들을 빠르게 망각하고자 한다. 그러나
가난은 우리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현실이다.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가난으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수치심을 안고 사회로부터 자신을 감추고자 한다. 푸코의 연인으로 더 유명한 프랑스 사회학자 디디에 에리봉이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고백한 바처럼 “(가난한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사회적 수치에 대해 쓰는 것보다 성적 수치에 대해 쓰는 것이 훨씬 쉬운”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그건 아마도 성소수자는 체제에 저항하는 자로서 자신을 위치 짓고 그에 대한 발언을 할 수
있는 기회라도 있는 반면, 그저 가난한 자는 사회적 정박지를 갖고 삶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하나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탓이기도 할 것이다.
왜 가난은 사라지지
않을까?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인 미국에서 빈곤선 이하의 ‘지독한
빈곤’ 속에 살고 있는 인구가 3,800만명이상이고, 거주지가 없는 공립학교 학생 수가 130만명이 넘는다. 저자는 가난이 주는 압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병원 대합실에서
시계를 쳐다보며 좋은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도하면 앉아 있어 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응급실 앞에 붙들려
있다 보면 다른 모든 걱정과 책임은 사소하게 느껴진다. 이런 경험은 가난한 삶과도 비슷하다. (…) 가난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삶의 나머지 부분에 마음을 쓸 여력이 없다”. 가난은 사람들에게서
안정과 안락만 박탈하는 게 아니라 지적 능력 역시 앗아 간다.” (P60) 살면서 가난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너무도 많은 고정관념과 편견들이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채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오도된 주장들에 저자는 하나씩 팩트체크를 해가며 조곤조곤 사례를
들고 사실을 열거하며 반박한다.
먼저 보조금의
문제를 살펴보자. 가난한 사람들이 지나치게 정부보조에 의존하고 있고 이로 인해 정부재원이 부족해져 복지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귀에 붙은 레퍼토리다. 가난한 자들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는 항목들은
푸드스탬프, 정부의료보험, 실업급여, 생활보조금 등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의 빈곤층들이 수령하지 않아서
남아 있는 보조금이 연간 1,420억 달러에 달한다. 복잡한
행정절차와 수치심을 자극하는 수급과정을 고려하더라도 미국의 빈민은 복지 수급에 서툴고 주어진 복지혜택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다. 때문에 저자는 빈민을 위한 복지프로그램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우리가
앱에서 쇼핑을 하고 음식을 주문하듯 편리하고 비대면적인 방식으로 수급과정이 바뀌기를 희망한다. 그렇더라도
가난한 이들이 엄청난 금액의 정부재원을 복지를 통해 가져가는 것은 사실 아닌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중상류층이 국가의 복지프로그램으로부터 제공받는 금액이 훨씬 더 크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주택소유자 보조금이 있다. 이
규모는 저소득층의 네 배에 달한다. 다음으로 연방정부가 보증을 서고 이자의 절반을 지불하는 학자금 대출이
있으며, 의료보험 세제 혜택이 어마어마하다. 이처럼 중상류층이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혜택은 잘 드러나지 않는 반면 저소득층은 곧바로 혜택으로 인지되기 때문에, 그 규모와
의존도에서 압도적인 혜택을 받고 있는 중상류층은 어이없게도 정부지출의 과다함을 지적하고 조세에 저항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미국 사회복지는 편파적이다!
다음으로 세금과
관련된 이슈를 살펴보자. 가난한 사람들은 소득이 적은 데다가 이런저런 세액 공제를 받으면 실제로는 영세율에
가깝다는 주장을 많이 듣는다. 내 경우도 잘난 척하는 주류 신문의 논설위원을 하고 있는 동창이 모임에서
“세금을 내지 못하면 발언권이 없는 것 아니냐”며 고소득
중심의 정책을 옹호하기에 자리를 나와버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를 보면, “연방 소득세의 누진적인 설계는 임금보다 (양도소득의 형태로) 재산에
붙는 세율이 더 낮다는 사실을 비롯, 다른 세금들의 역진적인 성격에 상쇄된다. 모든 세금을 감안했을 때 우리는 사실상 모두 동일한 세율의 적용을 받는다. 평균적으로
빈곤층과 중간층은 소득의 약 25퍼센트를 세금으로 내는 반면, 부유층은
실질적으로는 이보다 아주 약간 높은 28퍼센트의 세율로 세금을 낸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400명은 전체 중에서 가장 낮은
23퍼센트의 세율을 적용받는다.” (P166) 기실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논평가들은 소득세에만
초점을 맞춘 채 가난한 사람들이 “비납세층”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소득세 부담은 표준공제와 다른 세액공제를 적용하고 나면 거의 영에 가깝다면서. 하지만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세금을 지불하는 다른 방식, 그리고
부자들이 세금을 지불하지 않는 온갖 방식을 의도적으로 간과한 것이다. 최종 정산은 이렇다. 사회보험, 자산조사 결과에 따라 지급하는 프로그램, 세제 혜택, 고등교육에 대한 금융 지원에 들어가는 지출을 모두 정리한
가장 최근의 데이터에 따르면, 소득분포 하위 20퍼센트에
속하는 평균 가정은 1년에 정부 보조금으로 약 2만 5733달러를 받는 반면, 상위
20퍼센트에 속하는 평균 가정은 약 3만 5363달러를
받는다. 미국 최상위층 가정은 매년 정부 보조금으로 최하위층 가정보다 약 40퍼센트를 더 많이 받는다.” (P171~2) 이
수치는 우리의 경우에도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생활의 지혜로 꼭 기억하여 다음
동창회때는 꼭 써먹게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민간의 풍족함과 공공의 누추함”의 문제다. 이 문제는 감세와 연관되어 있는데, 레이건은 법인세율을 46%에서 34%로 낮추면서 공공사업에 사용될 재원이 대폭 줄어든
것이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지목하는 주범은 민주당 정권하의 캘리포니아주에서 통과된, 부동산세에 부동산 평가액의 1퍼센트라는 상한선을 설정하고 그 평가액을
해당 부동산의 원구매가로 동결하는 주민발의 13이다. 저자에
따르면, 주민발의 13은 백인 주도의 반란이었다. (주민발의 13에 반대하는 집단은 공공부문 노동자들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뿐이었다.) 근본적으로 미국 양대 정당의 의제를 바꿔 놓고 공공은 가난한데 민간은 떵떵거리는 시대의 도래로 귀결된 대대적인
감세는 단순히 정부의 과욕에 대한 대응이 아니었다. 흑인과 공공재를 나눠 쓰라는 요구를 받은 백인들의
대응이었다. 게다가 이 대응은 부유한 백인 자유주의자들의 가난한 백인 노동계급과의 분리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 부유한 백인 자유주의자들이 자기 동네의 토지를 좀 더 포용적인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법률을
변경하는 것에는 저항해 놓고 강제적인 버스 통학제를 지지한 것은 그들이 사는 교외 동네에는 그 정책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백인 노동계급 가정들에게 백인 전문직들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인종통합의 비용을 짊어지라고 요구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백인 블루칼라에게 엘리트와 그들의 제도 – 대학과
과학, 전문 언론기관과 그들의 기준, 정부와 그 점잖음 – 을 향한 고약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새로운 정치적 지지와 정치화된 분노를 낳았고, 이는 오늘날까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죄책감을 정치적
동원의 자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저자가 열거하는 가난을 보며 죄책감을 갖지
않기는 어려웠다. 그때문인지 저자가 가난의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하는 부분은 내게는 동의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8장의 소제목은 “빈민에게 권력을”이다. 한데, 그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이 소비행태를 바꾸어 공정한 기업의 제품을 사고, 빈곤을 양산하는 기업을 엄단하는 것이라면
김빠지는 제안이다. 경제정의와 기후정의의 문제가 대립되지 않음을 주장함에 있어서도, 날조된 결핍이 문제라는 결론은 납득하기 어렵다. 빈곤을 종식시켜도
경제적 불평등은 남을 것이고, 기회의 평등만 주어진다면 결과에서의 불평등은 받아들이겠다는, 좋은 자본주의면 충분하다는 주장은 아쉬운 결론이었다. 이런 주장을
보고 나니 “나는 다른 사람의 등에 올라탄 채 그 사람의 목을 조르고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다니게
만들지만, 나 스스로는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마치 그 사람에게 대단히 미안하다는 듯,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람이 더 편한 삶을 살면 좋겠다는 듯 행동한다. 그
사람의 등에서 내려올 생각은 하지 않고.”(P203톨스토이 재인용)라는 톨스토이의 말이 다르게
들렸다. 저자는 가난을 종식시키기 위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사안에 집중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조를 따지기 전에 개인적 실천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헤겔이 떠오른다. 구체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들을 사상하고 눈앞의
것에 집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이런 구체적이라는 것은 실상 다른 모든 것들을 추상한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오히려 가장 추상적인 것이 가장 구체적인 것이고 가장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이 가장 추상적인 것이 된다. 우리가 눈 앞의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당장의 변화를 가져오는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 실천이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면 시간이 지나 도로 그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더 큰 문제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저자도 강조했듯이, “담장 너머로 돈을 던지는
대신 그 담장을 허물어뜨려”야 한다.
앞서, 캘리포니아의 주민발의 13과 관련해서 살짝 언급된 바 있지만, 오늘날 트럼프를 당선시킨 백인 노동자/빈민의 분노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엿볼 수 있었다. 한데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기술하는 일화는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2020년 11월의 일이다. “원페어웨이지의 노동자들은 팁이 주 소득원인 노동자의 시급 15달러를
요구하려고 뉴욕 올버니의 주의회 의사당 밖에 모여 있었다. 주로 흑인과 히스패닉계 뉴욕 시민들로 구성된
시위대는 필수 노동자 엘레나라는 별명이 달린, 앞치마를 두른 7미터
높이의 흐느적대는 흑인 여성 인형을 가져왔다.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연사를 향해 환호를 하고 있는데, 빨간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자를 쓴 백인 남녀 한 무리가 다가왔다. 이들은 몰랐지만 그들이
시위를 하던 날은 주입법부가 대통령 선거 결과를 인증하는 날이기도 했는데, MAGA 시위대는 좀 더
일찍 모여서 그 집계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다. 친트럼프 군중은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러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악수를 하며 시위에 합류했다.” (P301) 언젠가 지젝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는 비록 지금은 리버럴의 의제를 지지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사람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바로 저 빈민/노동자들이다. 저들과 함께하고 저들의 해방을 위한 길이 아니라면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