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깨주의의 탄생 - 누구나 함부로 말하는 중국, 아무도 말하지 않는 중국 보리 인문학 3
김희교 지음 / 보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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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10여년 넘게 일상이 된 즐거움이 하나 있다. 주말을 제외하고 업무가 끝나면 매일 알라딘의 새로나온책울 검색해 흥미 있는 책들을 보관함에 담고, 꼭 사고 싶은 책들은 장바구니에 담는 것이다. 꼭 읽고 싶었던 주제의 책을 발견하여 장바구니에 담는 날은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하루가 되기에 비용 없이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목과 목차는 관심이 있지만 저자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거나, 지금 꼭 읽고 싶진 않지만 언젠가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보관함에 담아 놓았던 책들을 가끔씩 한꺼번에 충동구매 할 때가 있다. 이런걸 보면 이 취미도 그다지 저비용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책 역시 충동구매로 구입한 책이었기에 한동안 구석에 박혀 있었다. 최근에는 너무 머리 아픈 철학책들만 보던 터라 머리도 식힐 겸 좀 술술 읽힐 만한 책을 고르던 중 지난 주말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알라딘에서만 17000권 이상 팔렸음에도 서평을 보니 호오가 너무도 뚜렷하게 갈렸다. 그러고보니 제목부터가 도발적이었다. ‘짱개주의라니? 퀴어처럼 반대자들의 비난을 거꾸로 자신의 정체성으로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용어법인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일단 읽어보기로 했다.

책을 여는 글에서부터 저자는 우리 언론의 중국 보도 행태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연다. 먼저 산타가 사라졌다2018년 중앙일보, 조선일보의 기사가 어떤 방식으로 가공되어 우리에게 사실로 전달되는지를 추적한다. 물론 거짓 기사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편견을 배경으로 우리 언론이 직접취재 없이, 특정한 편향성을 지니고 있는 홍콩에서 발행되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기사를 베껴서 보도하는 행태와 또 그로부터 편견이 재생산되는지를 밝힌다. 저자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들이 중국을 바라보는 프레임에서, 또 의제를 설정하는 아젠더 형성에서 마지막으로 서술의 객관성에서도 일관되게 미국의 입장에 서서 (혹은 보수적 한미동맹의 안보주의적 관점에 서서) 기사를 작성하고 배포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들을 하나씩 열거한다. 심지어 10부 한 장은 통째로 한국언론의 중국 보도 행태를 미시적으로 분석하기까지 한다. 이 책 내내 반복해서 지적되는 내용들이라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됐을듯 싶은데 저자의 언론 행태에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지적하는 내용들은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팩트들이어서 읽어보시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오늘날 동아시아 상황을 2차대전 후 샌프란시스코 체제을 기반으로 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 안보체제와 1972년 이후(-중 외교 정상화) 키신저 시스템이 상호 보완되어 안정화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소비에트권의 붕괴와 중국의 경제적 성장에 따라 중국봉쇄를 희망하는 미국의 군사적인 압박이 점차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으로서의 미국의 일방적 논리가 한국의 안보보수주의자들의 이해와 합치하여 중국을 폄훼하고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것이며, 이러한 의제가 언론을 통해 왜곡된 중국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국민에게 중국이냐 미국이냐를 선택하는 문제로 강제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저자는 미세먼지 문제, 사드문제,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 화웨이 문제, 홍콩문제, 신장문제 등을 다룬다. 내 생각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모두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주제들보다 더 내 관심을 확 끌어당긴 주제는 요 몇 년 사이 인터넷과 20대에게 더 자주 발견되는 중국인에 대한 혐오문제였다. 인종주의 문제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만 볼 수 있는 다른 피부색에 따른 현상이 아니다. “적대 인종이 위험한 존재임을 증명하고 이 적대 인종에 대한 위기감과 적개심을 정당화시키며 이 위험한 타자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모든 행위는 올바른 것이라는 인종주의적 신념이 우리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대두되는 지점이 바로 조선족아닌가? 이 위험한 조선족에 대한 혐오는 <황해>, <신세계>, <청년경찰>을 통해 확산되더니 천만영화 <범죄도시>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장르로 정착한 모양이 되었다. 아무리 조선족이 범죄와 특별하게 연관이 더 하지 않다는 팩트를 입증하더라도 그들은 위험한 존재, ‘타자가 되어버렸다. 저자가 조선족의 문제를 심층취재한 드문 시도로 상찬한 <시사인>의 김동인 기자의 <대림동 고시원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이라는 르포르타주는 반드시 읽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처럼 훌륭한 문제의식과 준비된 기획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저자가 내놓은 답안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저자는 미국의 제국적 패권에 맞서 중극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이 비판적 지식인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두 가지를 드는데, 먼저 비록 중국이 실망스러운 점들이 많이 있지만 미국이라는 제국과의 전선에서 대항체제를 형성할 파트너라는 점이다. 이러한 대항체제를 강화하게 되면 현재의 미국중심의 일극적 세계를 다극적 세계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느냐는게 정당화 논리의 핵심이다. 다음으로 저자는 중국을 상대적으로 덜 신자유주의적이고 다른 발전의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기회가 있는 곳으로 상상한다. 이러한 시각은 그가 샤오미에 대한 평가와 토지가 원칙적으로 국가의 것이기에 99년 임대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다른 자본주의 시스템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제언을 할 때 보여 진다.

과연 그런가? 샤오미부터 보자. 저자는 샤오미의 영업이익율 목표가 5% 이하라는 점과 연구개발 인력이 50%에 육박한다는 점 그리고 하청기업에 투자하여 수직계열화 하는 공급망 구성을 삼성이나 애플과는 다른 중국식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이처럼 낮은 영업이익율의 의미가 기업의 경영목표가 소비자=국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연구인력은 혁신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그가 얼마나 편향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쿠팡은 수천억의 영업적자를 내고 있으니 엄청나게 국민친화적 기업으로 비자본주의적이고, 삼성전자는 자회사가 300개가 넘고 그 자회사에 경영에 간섭하지 않으니 하청업체와 함께 공생하는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훌륭한 기업이다. 자본의 논리를 무시한 웃기는 주장이다. 샤오미는 홍콩에 상장된 회사다. 자본의 논리에 철저하게 경영전략을 짜고 그로부터 성장을 추구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보다 자본의 논리에 충실하다. 저자가 이런 망상을 하는 것은 다분히 중국 공산당에 대한 환상과 중국을 옹호해야 한다는 지나친 편향 때문인 것으로 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이점에서 토지 소유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영연방 국가의 토지는 원칙적으로 영국 여왕의 것이고 똑 같이 99년의 점유권(적은 곳은 50년짜리도 있는 것으로 안다)을 부여할 뿐인데, 그럼 저자에게는 영연방도 비자본주의적 기회가 충만한 곳으로 보여질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에 한계가 많아도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생각해보자. 나는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단 대상국가가 중국이 아니라 북한으로 치환해서다. 학교 다닐 때 NL 친구들과 무지 엄청 싸웠다. 민족주의만 더한다면 딱 그 논리다. 저자는 보편적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무조건 자유주의적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대상은 미국이나 중국이 아니라 억압받고 소외된 중국의 노동자, 농민 등의 기층민중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기층민중들과도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저자의 머리에는 오로지 민족국가 단위의 행위자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650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책에서 노동자, 농민, 민중이 거명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저자는 기층의 보편주의적 연대에 대해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이라고 비웃는다. 하지만 진짜 추상적인 것은 저자 자신이다. 대학 때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 공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는 최근에 다시 읽었는데, 그 책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한다. 아무래도 내 기억이 틀린 것 같은데 하지만 난 그 책으로 기억한다.) 일본의 게 잡이 어선은 일이 엄청 고되다. 그 게 공선의 노동자들이 1929년 원산 총파업 때 원산 앞바다를 지나면서 연대의 함성과 행동을 보여주는 장면을 기억한다. 식민지 노동자들과 식민본국의 노동자들의 연대, 이러한 보편적 가치에 따른 연대가 불가능하며 오직 국가 단위의 전략적 결정과 행위만이 현실적이라고 믿는 저자에게서 어떤 미래도 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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