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논쟁 - 교회사를 뒤흔든 위대한 사상가들의 대화
로저 올슨 지음, 박동식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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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논쟁 로저 E. 올슨

무신론자인 내가 왜 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얼핏 생각하기에 세 가지 정도 이유가 떠오른다. 우선 가장 일반적인 주제로 인간 존재의 구성적 문제에서 비롯된 관심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꼭 죽음이라는 피안을 떠올리거나, 이성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근거에 대한 물음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변증법적 역전과 같은 무거운 주제로 가지 않더라도 살면서 닥치는 상황들은 신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항상 생각하도록 만드는 지젝이 [Hegel in a wired brain]에서 그의 기독교 무신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마도 이러한 생각인 듯싶다. 바디우나 지젝 자신에게 왜 직접적으로 유물론자라고 하면 되는 것을 굳이 종교라는 우회로를 거치려 하는지?”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우리가 종교를 회피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으며, 종교라는 신기루를 거듭 반복해서 가로지르고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답으로 내놓는다. 이 답을 칸트적 어법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종교는 단지 역사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인간 정신에 내재적인 초월론적 환상이다.” 때문에 우리가 신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현실에서 신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라캉의)아버지의 이름처럼 신을 이용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P66)

다음으로 보다 현재 상황의 사상적, 정치적 지형을 고려할 때 이론적 자원의 공급원으로써 신학을 공부할 이유가 있다. 레싱이 당대 스피노자 철학이 죽은 개취급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 것처럼 지금의 맑스주의가 그러하다. 요즘 번역-출판되는 이론서들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들뢰즈나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신유물론자들의 글들이다. 비판적 이론의 주류가 되어가는 이러한 유의 저자들 대부분의 공통점은 흐름과 네트워크에 대한 강조다. (물론 들뢰즈에 대한 해석에서 최근 출간된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같은 책들은 이와 다른 입장이고, 신유물론자 중 하만 같은 이는 좀 다른 입장이긴 하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들이 함의하는 바는 주체가 사라지거나 객체의 하나로써 주체를 정위하는 관점이다. 이게 무에 문제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주장의 정치적 결론들은 분산된 다원주의나 최악의 경우 퇴행적인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이론적 기반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들은 하나의 흐름을 아주 일반화하여 아주 개괄적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주시길) 그리고 이 주장에 따르면 세계는 하나의 총체화가 불가능하며 때문에 근본적 변혁이 불가능하다. 오로지 점진적이거나 부분적인 (그물망의 한 곳을 흔들면 다른 곳이 출렁이는 변화를 상상해보라. 딱 그런 변화다.) 위상 변화가 가능할 뿐이다. 이는 다수의 신유물론자가 범신론에 대해 호의적이거나 명시적으로 범신론을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형에서 맑스주의자를 포함해 근본적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훌륭한 협력자가 바로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은 주체도, 초월도 포기하지 않은 드문 분야이고, 세계를 총체적으로 묶어낼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신학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분야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학은 2천년 이상을 사상투쟁으로 점철된 역사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 역사를 따라가면서 쟁점들을 공부하는 것 자체로도 지적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 이토록 많은 교회가 있고 신자가 있다하지만 그 신자들 중 최소한의 신학적 이해도 가지지 못한 채 기복신앙으로 기독교를 믿고 있는 이가 대부분인 현실을 고려할 때, 신학적 지식은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 경우에도 몇 년 전 암 진단을 받은 배우자가 주말에 교회에 가기를 희망하여 함께 다녀 본적이 있다. 한데 역시나 교회는 신학 공부를 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곳이었다. 오로지 성경 강독 이외에는 아무도 신학에 관심도 없었고, 그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목회자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신학에 대한 상식을 갖추는 것도 잘못된 믿음에 맞설 수 있은 좋은 방법이 아닐까?

지금까지 이야기한 세 가지는 그저 내 개인적인 이유였을뿐이니 신학에 관심을 가질 다른 이유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2천년동안 너무도 방대한 주제들이 다루어졌는데 어떻게 어디서부터 또는 어떤 주제를 읽어야 할까? 해서 내 경우에는 신학에 접근하기 가장 좋은 길이었던 신학의 역사에 대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맨 처음 철학에 접근할 때 통상적으로 철학사를 통해서 하듯, 신학 역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그 중 보다 관심이 가는 부분을 찾아 심화 학습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 책은 총 29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2세기 켈수스의 논쟁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최대 미덕은 각 장에 상상의 대화를 통해 대립되는 주제를 분명하게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대화체이기에 알기 쉽게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가상의 대화를 마친 후 저자가 친절하게 쟁점들을 다시 간략하게 서술해주는 덕분에 대화체의 약점인 보긴 했는데 정리가 안되는문제를 덜어준다. 신학출판사 중에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새물결플러스에서 출간되자마자(2017) 바로 구입해서 거의 650페이지의 책을 이틀에 걸쳐 완독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술술 읽히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서 한 번 들면 손을 놓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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