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비와 세레나데 10 삼양출판사 SC컬렉션
카와치 하루카 지음, 심이슬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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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년만에 정발되는거라 큰 기대를 하고 읽었다. 다른 권들에 비해 타카아키와 히나의 이야기가 적었지만 그동안 숨겨진 떡밥이라든지 타카아키를 둘러싼 음모가 또다시 시작되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과연 두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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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주부도 11
오노 코스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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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실컷 웃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극주부도 답다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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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철의 왈츠 3 - 시프트코믹스
모리노 키코리 지음, 나민형 옮김 / YNK MEDIA(만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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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철의 왈츠 3권이다. 다른 권에 비해 요리 얘기나 미즈하라 선생님과의 에피소드는 적었지만 주인공인 하루미의 성장을 다루고 있어 인상적이다. 특히 그 때 그 시절의 친구 관계에 대한 고민을 중심으로 다뤘다는 점이 그랬다. 하지만 고민 해결 방식이 다소 이상적이라 아쉬웠다. 다음 권도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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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인 현대지성 클래식 52
알베르 카뮈 지음, 유기환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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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리뷰에 앞서 저자 소개부터 하겠다. 저자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르'의 '몽도비'라는 곳에서 프랑스계 출신인 포도 농장 노동자인 아버지와 하녀였던 스페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한 달 만에 전사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홀로 카뮈를 키웠다고 한다. 카뮈는 천재들이 늘 그렇듯이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두각을 자랑했다. 이런 카뮈의 재능을 진작에 눈치챈 초등학교 선생님은 그를 장학생으로 적극 추천했고, 덕분에 카뮈는 가난한 집안이었음에도 중고등학교를 무사히 진학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가난한 집안의 자식은 초등학교만 진학하고 노동자가 되는 게 당연했는데 말이다. 이런 점에서 카뮈는 정말 복받은 셈으로, 이후에는 철학자 '장 그르니에'의 도움으로 문학적 철학적 지평은 물론 정치사상적으로 많은 걸 배우게 된다.


카뮈가 초창기에 활동했던 시기는 1930년대로, 독일 나치의 등장과 제2차 세계대전의 조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때였다. 그래서일까, 카뮈는 당시 나치와 파시즘에 반대했던 프랑스 지식인들처럼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34년에는 은사인 장 그르니에의 추천으로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카뮈는 당에서 추구하던 것과 생각이 달랐는지 이내 당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제명(...) 된다. 그래도 카뮈는 1938년부터 다양한 신문의 기자로 활동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레지스탕스 신문을 만들어 나치즘에 적극 반대한다. 그러다 1942년에 카뮈는 문득 작가로서 한 작품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이방인>이라는 책이다. 이때 카뮈의 나이가 채 마흔도 안 되었다고 한다.

<이방인>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고 문학적 찬사가 대단했다. 특히 주인공 '뫼르소'를 통해 '부조리'의 개념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여기서 부조리란 하나의 '감수성'으로서,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나라는 존재가 세계와 뭔가 괴리감이 느껴질 때 느끼는 감성을 말한다. 쉽게 말해 '침대에 누웠는데 문득 나는 왜 사는지, 삶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 느끼는 것 역시 부조리의 감수성이다. 작중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전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며 아랍인을 죽인 이유로 그저 '햇빛이 뜨거워서'라고 말한다. 부조리란 이렇듯 자신의 존재가 세상과 일치하지 못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외국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고 카뮈 하면 <이방인>이 쉽게 떠오른다. 하지만 정작 카뮈는 자신의 대표작으로 <이방인>이 아닌 <반항인>을 꼽는다. 어째서일까?






<반항인>은 카뮈가 부조리의 감수성을 중심으로 써 내려간 인간 저항의 역사이다. 소설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상사로서, 카뮈는 본 책을 통해서 부조리에 대한 인간의 저항의식 중 하나인 '반항'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앞선 <이방인>에서도 그렇고 세상은 나와 다른 무엇이며, 명확한 정의도 없고 목적도 없이 존재하는데, 이런 세상에 존재하는 나는 그야말로 '아무런 이유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나약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더 이상 꿈도 희망도 없는 세상에서 나는 왜 살아야 할까? 이때 인간은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격렬히 저항하는데, 이것이 바로 '반항'이다.


참고로 몇몇 사람들은 위와 같은 부조리의 해결책으로 자살을 생각하지만 카뮈는 부조리를 느끼면 느낄수록 살아 있어야 한다고 봤다. 왜냐하면 삶에 절망해 자살했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삶에 희망이 있었다'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앞선 '삶에 절망해서'라는 자살 이유와 맞지 않다. 부조리로 자살한다는 사람은 그 죽음으로도 아무런 의미를 창출해 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정말로 세상이 부조리하다!라고 외치고 싶다면 어떻게든 살아서 말 그대로 '산 증인'으로서 투쟁해야 한다. 부조리의 철학은 절망의 철학이 아니라 생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반항이야말로 부조리의 인간이 벌이는 투쟁으로서 중요한 행동이라 아마도 카뮈는 이 반항에 대해 설명한 <반항인>을 본인 피셜 최고의 책이라 생각한 듯하다.



여하튼, <반항인>에서 카뮈는 반항인 이란 '아니오'를 말하면서 동시에 '예'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보통 반항하면 저항적인 측면만 생각하기 마련인데, 사실은 저항과 함께 '한계'를 가지고 있는 행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이 저항을 하는 이유는 물론 기존의 권위를 거부하고 파괴하기 위함이지만 동시에 그 폐허 위에 또 다른 '기준'을 세우기 위해 반항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이러이러한 것에 반대한다!'라는 이유로 저항하면서도 뒤이어 '그 대신에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원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오늘날 벌어지는 각종 시위를 생각해 보면 쉽다). 반항은 기존의 권리에 대해 '아니오'라고 거부하면서 자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권리에 대해 '예'라고 긍정하는 행위이다. 나는 여기서 카뮈만의 부조리에 걸맞은 정의라고 생각해 무척 인상 깊었다. 나 역시 반항하면 혁명과 같은 무조건적인 저항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뮈의 주장대로 생각해 보면 저항은 동시에 규칙을 세우길 바라는 또 다른 바람이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반항인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중요한 권리가 아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끼는' 인간 보편적인 권리를 위해 저항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인간 존엄성과 인류애가 그렇다. 카뮈는 이를 '인간의 연대성에 입각한 반항'이라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인류애를 벗어난 과도한 반항과 저항, 특히 살인을 비롯한 생명 경시가 따르는 반항은 결코 옳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조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벌어지는 반항은 인간의 삶의 존재 이유를 긍정하는 시도인데, 반대로 타인의 삶을 빼앗는 건 모순적이다. 책의 초반부에서부터 카뮈는 이렇게 정의한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비록 개인으로 시작하는 반항일지라도 그것이 인류애와 같은 인간 보편적 감정을 위한 반항이라면 비로소 '나'는 '우리'가 되어 하나 됨을 느낄 수 있고, 우리는 완전하진 않지만 삶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반항은 점차 변질되어 갔다. 카뮈는 반항을 인간 보편적인 감정을 추구하고 일정한 범위 내에서 저항하는 것, 그리고 동시에 자연스레 일어나야 한다고 봤다. 또한 적절한 반항의 태도로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사람들의 가치관이 최고라고 주장했다. 유명한 그리스 비극인 <오이디푸스 왕>에서도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신탁에 의해 저주받은 운명이었음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운명을 피하고자 반항을 했고, 마지막에 결국 그 운명에 따라 벌을 받았음에도 이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중요한 건 신에게 겸손하라는 게 아니라 정해진 운명이라는 규범 속에서 반항을 하면서도 인간적인 도리를 잊지 않는 오이디푸스의 행동(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반인륜적인 행위에 책임을 지고 장님이 되어 나라를 떠난다)이다. 카뮈가 보기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선과 악이 혼재한 세상 속에서 조화롭게 살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에 비해 당시 20세기 반항은 오이디푸스의 반항과 달리 신뿐만 아니라 인간적 한계를 넘기 위해 '사상'이라는 탈을 쓴 채로 폭주하는 기관차였다. 이들은 선과 악이 불분명한 세계의 부조리함을 극복하고자 '정의'라는 기준으로 선이 결국 모든 걸 통일하기를 바랐다. 한 마디로 인간이 세상을 자신의 정의관으로 재단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카뮈가 <이방인>보다 <반항인>을 자신의 최고작이라고 뽑은 이유를 부조리함에 맞서기 위한 인간의 저항을 나타내는 반항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카뮈가 이 책을 최고라고 뽑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이런 '반항의 변질' 현상 때문이었다. <반항인>이 출간되었던 시기는 1950년대였다. 이때 당시에는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의 여러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추구했었다. 나치즘과 파시즘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 상황, 그리고 뒤이은 소련과 미국의 냉전 발발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기존 체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당시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것이 곧 진보적이라고 여겨졌다. 뭐, 여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몇몇 지식인들이 소련의 체제를 신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무려 스탈린의 권력이 아직 남아있던 그 소련을 말이다. 아시다시피 소련은 정적들을 대규모로 숙청하기도 하고 비밀경찰들을 통해 인민들을 사상적으로 강력하게 고문 및 억압하는 공산주의 독재 국가였다. 유명한 소설가인 '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과 <1984>가 바로 이 소련의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쓴 책인데, <1984> 속 '빅 브라더'가 바로 소련의 스탈린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다. 아무튼, 유럽의 지식인들 중에는 소련이 기존의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유토피아 국가라고 생각했고, 프랑스의 대표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카뮈의 친구였던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년 6월 21일 ~ 1980년 4월 15일)'도 이런 점에서 소련을 지지했다. 그렇다면 카뮈는 어땠을까?

놀랍게도 카뮈는 자신은 사회주의자임은 틀림없지만 소련 체제는 옳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도 소련은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오히려 제국주의 국가에 맞먹을 정도로 '반동적'인 곳이었다.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적들을 무참히 죽이는 소련에게선 그 어떤 반항적 태도도 볼 수 없으며, 되려 그 반항을 억누르려는 모순적인 국가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에 대한 근거로 쓴 것이 이 <반항인>이라는 책이다. 그는 사상은 물론이고 정의의 통일이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살해하고 탄압하는 걸 정당화하는 소련의 태도를 반항적인 행위라 보지 않았고, <반항인>은 반항의 중요성과 함께 오용의 위험성을 고발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대 현실을 고발하는 이 책을 카뮈는 사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당대 지식인들의 흐름과 맞지 않았고, 카뮈는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찬사보다는 비판을 받았다. 친구였던 사르트르와는 <반항인>의 출간 이후 완전히 절교하고 말았으니, 그 여파를 짐작할 수 있겠다.


<반항인>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반항이라는 태도의 유례와 변화를 고대 노예 시대 때부터 오늘날(20세기 유럽)까지의 시간적 흐름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뮈는 반항이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인간이 드디어 신이 아닌 자기 스스로 존재의 이유와 세계의 법칙을 정할 수 있게 되면서 허무주의와 만나며 변질되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신과 동급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곧 형이상학적 반항으로 이어진다. 형이상적이란 세상의 저편에 또 다른 무엇, 즉 어떠한 목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이제 자기 삶을 개척해야 할 인간은 목적을 찾을 수 없는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반항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중엔 세상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믿는 허무주의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반항과 만나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자기 자신, 즉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 마디로 신의 자리에 본인이 올라가 '내가 곧 신'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소도에서의 120일>의 '사드',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막스 슈티르너' 등등이 그렇다. 특히 슈티르너는 자기 외에는 모든 것들이 허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카뮈는 이들이 아무리 모든 걸 거부했어도 본인만큼은 긍정하고, 자신이 만든 규칙은 수용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모순적이라고 말한다. 자기 긍정을 위해 타인을 비롯한 세상을 향해 거부권과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이렇듯 세상에 혼자 남겨진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고자 자기는 긍정하되 남을 탄압한다. 그러나 이것은 곧 '고립'을 의미하며, 종국에 인간은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래서 허무주의와 만난 반항은 이 외로움을 극복하고 자기 긍정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시도가 바로 '이성'을 통한 '사상'의 적립이다.

이러한 반항자들이 반항을 저지르는 이유로 신의 부재라고 말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신의 창조물로 인정되었던 세계가 그 껍질을 벗고 진정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벗겨진 세상은 어떠했을까. 지금까지 신의 은총 안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은 비록 세상이 선보다는 악이 지배적이지만 그래도 신만큼은 선하다고 생각해 세상에 딱히 반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내세의 천국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며, 더욱이 예수는 '누군가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도 내밀리',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종교는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함과 악에 대해 저항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종교는 현실의 부조리에 외면한다(이것이 바로 카뮈가 기독교 철학자가 아닌 이유다. 그는 결코 종교를 부조리의 해법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종교가 사라진 근대에서 사람들은 현실이 부조리하고 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 반항인이 내세운 목표가 '정의의 실현'이다. 근대의 반항자들은 현실에 명확한 정의가 없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고, 자신이 그 법칙을 만들고자 했다.


종교에선 신이 세상의 법칙을 만들었다면, 근대에선 인간이 그 법칙을 만들었다. 종교에선 절대적 선의 세계인 천국이 있다고 주장했다면, 근대에선 인간이 현실 속에서 정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 반항인들은 신의 세계를 인간의 정의로운 세계로 대처하려 했고, 그 바람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역사적 흐름'이 있다고 틀을 세워버린다. 작중 카뮈는 이 역사에 매우 비판적으로 말한다. 세상은 인간과 무관하게 자기 알아서 움직이고, 어떤 정의나 부정의함, 선과 악의 기준도 없는 부조리함 자체인데, 인간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흐름을 규정화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항은 기존의 세상(신 중심의 중세 시대 체제라든지, 왕정 체제 등등)을 거부하는 저항적인 측면을 보이면서 동시에 '정의를 위한 역사적 흐름'이라는 규범 이외의 존재에 대해선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사상'을 내세운다. 책에선 이런 반항인을 '신의 사역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카뮈가 정의에 따라 반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판한 건 아니다. 그는 러시아 테러리스트들을 예시로 들어 비록 자신의 사상을 위해 왕이나 고위 관리들을 죽였지만 그에 따른 책임, 즉 사형을 겸허히 받아들였다는 점만큼은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을 죽였다면 자신 역시 죽어야 한다. 한 마디로 내로남불의 자기만 빼고 모두 정의로워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카뮈가 비판한 정의를 빌미로 반항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혁명적 엘리트주의자'로, 자기는 남들을 위해 피를 흘린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이는 등의 불의를 저지르면서도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이다. 목적은 고결하지만 정작 본인은 고결하지 못하는 모습. 이 사람이 과연 자기가 그렇게 외친 정의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반항적인 행위에도 책임이 따른다. 초창기 러시아 테러리스트들은 사형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사상에 대해 책임을 졌다. 그러나 그 뒤의 러시아 혁명을 비롯한 자칭 '혁명가'들은 반항에서 오는 책임과 끝없는 투쟁(반항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목적을 찾기 위한 끝없는 투쟁이다. 세상이 부조리한데 그 목적이 과연 쉽게 찾아질까)을 회피하고자 했다. 그 수단이 바로 이데올로기를 통한 '권력' 추구이다. 이때 카뮈는 마르크스주의와 소련의 정치 체제를 예로 들어 이들이 부조리한 세상에 정의라는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희망고문을 시키며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했다고 비난한다(!). 아시다시피 마르크스는 언젠가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탄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카뮈가 보기에 이는 종교와 다를 바 없었다. 한 마디로, 지상의 멸망을 예고한 종교 속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도 그런 맥락에서 사상을 펼쳤고, 이것이 곧 진리라고 선포했다는 거다. 그래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마르크스가 예언한 '역사'에 세상을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위시한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서는 자칭 혁명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노동자들의 인권과 인민들의 삶을 보장한 국가라며 선전)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렇게도 사람들을 죽이고 탄압했다. 자기네 사상 이외에는 다 이단이라고 숙청하는 행위는 흡사 종교 재판을 연상시킨다고 말이다. 사상이 인간의 생명보다 우위에 서기 시작한 셈이다.


소련의 공산주의는 인간의 존엄과 존재 이유를 그저 '공산주의 역사'의 완성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다고 카뮈는 말한다. 반항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반항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반드시 있으며, 계속된 저항은 되려 그 목적을 왜곡시키게 만들 수 있다. 아무리 역사와 사상으로 규정지으려 해도 세상은 그걸 비웃듯 알아서 움직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카뮈는 인간에게는 인간 수준의 적당한 반항이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절대에 대한 강박적 관념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세상과 부조리에 대한 반항으로 인간의 삶을 생산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마인드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과거 사람들은 무의미한 삶에서 자신을 신으로 생각해 모든 걸 규정 지으며 반항하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는 나뿐만 아니라 타인 역시 그 부조리함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안다. 때문에 반항은 '우리'라는 인간 공통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이뤄야 한다.


이제 우리는 각자가 타인에게 <당신은 신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이다. 혼자서 신이 될 필요가 없다. 대신 모두가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지만 반대로 카뮈는 비록 그렇더라도 남과 함께 더불어 살기를 원했다. 이것이 반항에 대한 카뮈의 결론이 아닐까 싶다.


오랜만에 이렇게 집중해서 읽은 책은 올해 처음인 것 같다. 주로 고전 소설을 읽는 나로서는 인문학적 사상의 흐름을 다룬 본 책을 읽는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 읽어보니 의외로 몰입감이 대단해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특히 카뮈는 부조리의 작가라는 공식밖에 강조했던 기존의 작가 카뮈에 대해 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많은 부분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부조리라는 개념 차제가 허무주의적이라고 느꼈었는데, 이번 반항의 역사를 통해 카뮈가 그런 부조리 속에서도 희망과 인류애를 잃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달까. 그리고 '반항'이라고 하면 마냥 저항적 측면만 생각하던 나에게 반항도 어느 정도 규범이 있으며, 거기에도 일종의 한계점을 추구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또한 가장 크게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정의를 외치면서도 사람을 쉽게 죽이는 사상가, 혁명가들이 어떤 심리로 그런 짓을 하는지 부조리라는 카뮈만의 시각으로 파헤치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연상된다).

그 밖에도 읽으면서 든 생각이, 카뮈랑 나랑 독서 취향이나 관심 있어 하는 분야가 무척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야기는 물론 막스 슈티르너와 러시아 테러리즘 이야기, 그리고 마르크스와 공산주의 이야기 등등이 그러했다. 때문에 읽기가 훨씬 수월했던 것 같다(물론 그게 이해와 비례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ㅋㅋㅋㅋ).

그래도 본 책을 읽으면서 마냥 카뮈의 생각에 공감했던 것은 아니다. 부조리를 통한 반항의 설명은 좋았으나 다소 모호한 감이 있었고 자칫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나 현 체제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자들에 의해 왜곡될까 봐 걱정스럽기도 했다. 반항은 수정주의나 개량 주의와 비슷하다거나, 반항에도 한계가 있으니 적당히 하고 끝내라는 식의 주장으로 변질될까 봐 한편으로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반항인>이라는 책은 그 자체로도 중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밖에 부록으로 수록된 카뮈의 인터뷰에서는 카뮈 본인이 왜 실존주의가 아니라고 한 건지, 그리고 부조리란 아무런 저항을 필요치 않는 막다른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등등을 통해서 카뮈가 추구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카뮈의 문학적인 역량을 포함해 사상적인 역량을 보고 싶다면 <반항인>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이외에도 반항자들의 역사나 혁명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 카뮈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아래는 수상 소식에 대한 카뮈의 인터뷰이다.

https://youtu.be/Suw7zehrPe4






(본 서평은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이 시론의 목적은 자살과 부조리의 개념에서 시작된 성찰을 살인과 반항의 지평에서 계속 추구하는 데 있다. (중략) 어쨌든 우리는 반항의 태도, 반항의 주장, 반항의 성과에 대한 탐색을 끝낸 후에 비로소 그 타당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반항의 결실 가운데에는 부조리가 우리에게 제시할 수 없었던 행동 규범, 적어도 살인할 권리와 의무에 대한 지침, 끝으로 창조의 희망이 담겨 있다. 인간은 지금 이대로의 존재이기를 거부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반항인 이란 누구인가?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거부란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반항의 시초부터 ‘예‘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중략) 반항 운동은 인간 내면에서 관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무엇, 존재 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봉사할 수 없는 그 뜨거운 부분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연대성은 반항 운동에 근거를 두고 있고, 반항 운동은 인간의 연대성에 힘입어 정당화된다. 따라서 이 연대성을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모든 반항은 반항이라는 이름을 내걸 수 없으며, 사실상 살인에 대한 동의로 전락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반항은 모든 사람 위에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통의 토대이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그리스인은 결코 사상으로부터 방어진지를 구축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우리 현대인은 그들에 비해서 몹시 타락했다. (중략) 현대인들은 가능하면 정의의 일원적 지배가 확립되기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불의의 일원적 지배가 확립되기를 바란다. 인간 조건의 불완전한 면에는 죽음으로 항의하고, 인간 조건의 불합리한 면에는 악으로 항의하는 형이상학적 반항은 삶과 죽음의 고통에 대한 거부인 동시에 행복한 통일에 대한 요구다.

인간은 반항 속에서 살고 반항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가?

형이상학적인 혁명의 극단은 무엇인가? 그것은 형이상학적 혁명이다. 이 세계의 주인(신)이 정당성에 대한 이의 제기를 받았으니 타도되어야 마땅하다.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신과 영생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인간이 신이 되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신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모든 것이 허용됨을 인식한다는 것이며, 자기 자신의 율법을 제외한 모든 율법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구한 추론을 늘어놓을 것도 없이 신이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범죄를 승인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의 은총 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이 19세기를 지배한 물음이었다. 절대적 허무주의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던 모든 사람은 ‘정의와 함께‘라고 대답한다. 천상의 왕국에 절망한 사람들에게 그들은 인간의 왕국을 약속한다. 그들은 참된 삶을 열렬히 욕망했으나 존재에 대해 실망하자 훼손된 정의보다는 보편화된 불의를 택했다는 점에서 똑같다. 반항은 맹목적일 정도로 대담하게 자라나서 보편적인 죽음에 형이상학적인 살육(목적 있는 살육)으로 응답하는 놀라운 순간에 이르렀다.

신의 사역자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은 반항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 지상 세계를 인간이 신이 될 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바야흐로 역사의 지배가 시작된다. 인간은 자신의 유일한 역사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반항에 불충실한 채, 이후 20세기의 허무주의적 혁명에 헌신하게 될 것이다. 이 허무주의적 혁명은 일체의 도덕을 부정하면서 범죄와 전쟁의 끝없는 축적을 통해 인류의 통일을 절망적으로 추구한다. 우익이든 좌익이든 드디어 인간이라는 종교를 확립하기 위해 세계의 통일을 쟁취하려는 파렴치한 혁명들이 나타나리라.

"개인성이 신앙의 자리를, 이성이 성경의 자리를, 정치가 종교와 교회의 자리를, 대지가 하늘의 자리를, 노동이 기도의 자리를, 가난히 지옥의 자리를, 인간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지옥뿐인데, 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다.

타인의 생명에 대한 깊은 염려에 연결된 이토록 위대한 자아의 망각은 이 양심적 살인자들이 지극히 극단적인 자기모순 속에서 반항자의 운명을 살아갔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그들은 폭력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폭력을 정당화하지는 않았다. 필요한 것인 동시에 용서될 수 없는 것, 살인은 그들에게 그런 것으로 비친다. 따라서 필요하다고 생각해도 정당화할 수 없었던 그들은 자기 자신을 정당화의 근거로 삼으려 했고, 자신이 제기한 문제에 개인적인 희생으로 답하려 했다. 그들 이전의 모든 반항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살인은 자살에 일치했다. 그리하여 하나의 생명은 다른 하나의 생명을 대가로 요구했고, 바야흐로 두 희생으로부터 어떤 가치의 약속이 태어났다. 그러므로 사상을 위해 살인할지언정 그들은 어떤 사상도 인간의 생명보다 우위에 놓지 않았다.

역사적 광란은 권력이라고 불린다. 권력의 의지가 정의의 의지를 대신하려 했다. 그것은 처음에 정의의 의지와 합일하는 척하더니, 뒤이어 지상에 지배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정의의 의지를 역사적 종말 어딘가로 추방했다. 그리하여 이데올로기적인 결론이 경제적인 결론을 압도했다.

현대의 허무주의의 역사는 오직 인간의 힘으로 그것도 대단히 미약한 힘으로 질서를 잃은 역사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기나긴 노력에 불과하다. 혁명적 탈선은 무엇보다 반항이 인간 본성과 연관된 한계를 무시하거나 일부러 오해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허무주의적 사상들은 이 한계를 무시하기에 결국 하나같이 가속화되는 운동에 빠져들고 말았다.

인간에게는 인간에게 적합한 중간적 수준의 가능한 행동과 사상이 있다. 정치는 종교가 아니다. 어떻게 사회가 절대를 정의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인간 각자가 만인을 위해 절대를 탐구하고 있으리라. 사회의 정치는 단지 인간 각자가 이 공통의 탐구를 위한 여가와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갖가지 일으 해결할 책임을 지고 있을 뿐이다. 역사는 하나의 기회일 뿐이다. 문제는 분별 있는 반항으로써 그 기회를 생산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꼭 필요한 하나의 단계, 하나의 경험입니다. 그것을 막다른 골목으로 이해하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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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한길그레이트북스 77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지음, 강대석 옮김 / 한길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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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읽은 적이 있다.

<기독교의 본질>에서 포이어바흐는 기독교란 결국 인간학이며, 결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걸 주장했었다. 하지만 너무 기독교에 대한 얘기만 나누다 보니 솔직히 배경지식 없이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기보다는 저자인 포이어바흐가 생각하고 있는 '종교(기독교 포함한 다른 종교들)'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었다. 기독교만이 종교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기독교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종교의 본질을 다룬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를 읽기로 결심했다. 이 책을 읽으면 종교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생각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렇게 다 읽어 본 결과, <기독교의 본질>보다 이 책을 먼저 읽을 걸 하는 아쉬움과 함께 종교에 관한 포이어바흐의 파격적인 주장이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는 <기독교의 본질(1841)> 이후에 작성된 후기 포이어바흐 작품이다. 확실히 후기 작품이다 보니 이전작보다 완숙함이 느껴졌고,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며 꽤 쉬웠다. 사실 본 책은 포이어바흐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민주적 학생회 위원들의 초청으로 1848년 12월 1일부터 1849년 3월 2일까지 주 3회(수, 금, 토요일 저녁)에 걸쳐 시청 강당에서 진행된 강연회 때 했던 만들을 후에 편집에서 엮은 책이다. 이때 강연에는 많은 지식인들과 '노동교양회'에 속했던 노동자들이 참석해 강연을 들었다고 한다. 포이어바흐는 1850년쯤에 강연회에서 했던 연설을 비롯해 자신의 의견을 좀 더 첨부해<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그래서일까, 앞서 내가 말했듯이 다른 작품들보다 완숙함이 느껴지고 이해하기 비교적 쉬웠다. 아마도 청강생들과 일반인들을 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책에서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의 종교들 역시 인간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탄생하면서 종교를 가지게 된 원인과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진다. 그가 생각하길, 인간이 종교를 가지게 된 것은 '종속감'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종속의 대상은 다름 아닌 '자연'이다. 인간은 옛날부터 자연을 두려워했으며 자신들과 달리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움직이는 이런 거대한 자연이라는 존재에 대해 두려움과 함께 경외심을 품고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종교의 첫 시작은 사실상 자연종교이며, 기독교 또한 이런 자연 종교적인 성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포이어바흐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종교의 대상이 자연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범신론처럼 신이 곧 자연이라는 동급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거나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보고 인식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인간화'를 시켜 이해하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연을 자연 그 자체고 보기보다는 자연은 '인간화'시켜 그것을 이해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이집트 신화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을 보면 얼굴은 동물인데 몸은 사람이라든지, 바다의 신이니, 천둥의 신이니 해도 그 모습은 인간인 경우가 많다(심지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사랑이나 질투 같은 인간적인 감정에도 따로 신을 만든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화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자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왜곡에 불과하다. 포이어바흐는 말한다. "자연종교라는 최초의 입장에서 자연이 인간의 대상이 되는 것은 현실적인 자연이 아니라 도야되지 않고 미숙한 이성, 환상, 심정이 나타나는 바와 같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나 심정에 따라 보려는 걸까? 포이어바흐는 그 이유로 '인간의 한계'를 꼽는다. 아무리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똑똑하고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본질(생물학적 유(류)의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여전히 인간은 추측만 가능하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전문적인 과학이 없던 고대 사회에서는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해선 '내가 이러니까 저것도 아마 나처럼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고, 종교는 이런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두려운 자연이라는 존재를 동시에 인간화시켜 버렸다. 그래서 고대 종교들을 보면 양이나 소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모습이 종종 보이는데, 이것 역시 인간에게 중요한 가축이었던 양과 소를 '신들도 역시 좋아할 것이다'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이는 자연이라는 신을 고대 사람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있고 먹고 마실 줄 아는 존재로 여겼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른 의문이 든다. 정말 자연과 신을 인간화시켰다면 인간과 다를 바 없을 텐데 왜 이들을 숭배하게 되었을까. 이는 앞서 말했듯이 자연이 인간에게 공포심을 줬기 때문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강해도 자연재해 한 방이면 바로 골로 간다. 거기서 공포를 느낀 인간은 자연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고자 인간화시켜 이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했다. 사실 자연이 '분노'할 리가 없을 텐데도 말이다. 거기다 '아무런 목적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행하는' 자연의 모습이 인간들에게 더더욱 공포심을 줬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 자연의 배후에 '목적'을 가지고 있는 '신'을 만들어 세웠고, 인간 역시 자신의 삶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라고 믿고 싶었기에 신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포이어바흐는 신은 곧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종에 갇혀 답답해하던 인간이 만든 것이며, 신학 역시 인간학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신은 인간 자신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포이어바흐는 위와 같은 고대 종교와 다른,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에 대해서도 폭로한다. 기독교도들은 이런 자연 종교적인 고대 종교와 자신들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포이어바흐도 이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고대 종교보다 더 안 좋은 방식으로 변해갔다고 주장한다. 고대 종교는 자연에 종속되어 있다는 인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또 이것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고대 종교인들은 솔직한 편이지만, 기독교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아예 인간을 '자연'에서 떼놓으려고 한다. 한 마디로 기독교는 '자연 초월적인 존재'을 추구하는데 그게 바로 '예수'와 같은 전능자와, 그가 펼치는 '구원'이라는 공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는 천국이라는, 인간이 기존에 종속되어 있던 자연적 한계를 뛰어넘는 공간을 제공한다. 그곳에는 질병도 존재하지 않으며, 고통, 슬픔, 죽음도 없다. 오직 영생뿐이다. 그런데 과연 현실에서 이게 가능할까? 위와 같은 것들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기보존 욕구와 자연적 한계에서 벗어나 언제까지나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었고, 기독교에서는 천국과 구원이라는 방식을 통해 현세보다는 내세에 관심을 두고 현실을 내세의 행복을 위한 조건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반자연적인 성격은 사제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사제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극단적인 종파의 사제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고립된 삶을 살아간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생물에게 반드시 필요한 후손을 만드는 생식능력과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자연적 본능을 거부한 채 오직 정신만 쫓는 행위인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기독교란 자연을 초월하고픈 인간의 욕망, 즉, 자연에서 벗어나 자기보존을 하고픈 인간의 이기적인 소망을 대변하는 종교라고 주장한다. 성경에서도 보면 '인간이 타락했다'라는 이유로 야훼는 지상의 '모든 생물들을' 죽이는 홍수를 일으킨다. 인간 때문에 자연물 전체가 죽은 것이다. 고대 종교가 자연물인 신을 숭배했다면 기독교는 이런 자연물적인 신을 배척하고 오직 인간이라는 종만을 소중히 여기는 신을 탄생시켰다. 예를 들어 예수의 경우 이전의 야훼보다 더더욱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사람처럼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무엇보다 '어떤 죄를 지었든 자기를 용서'한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살고픈 인간의 자기보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자연이라는 현실에서 유리된 어떠한 존재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기독교적 신을 믿음으로서 자신을 긍정하고 싶을 때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도들은 자신이 예수를 믿고 있다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믿고 있다'.


포이어바흐가 기독교에 대해 치를 떠는 것도 이런 자연에 종속된,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거부하고 오직 인간만이 위대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습에서 기인한다. 게다가 자연을 도외시하고 인간적인 감성만 따지다 보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채 본인의 종교적 원칙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등의 현실을 왜곡하는 모습이 당시 교조적 관념론자들 그 자체로 보였을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사람들이 이런 종교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종교에 종속된 삶이 아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본 책을 썼다. 기독교의 도덕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니체보다 무려 3, 40년 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끈질긴 연구는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무신론자뿐만 아니라 종교에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비록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많지만 이런 쓴소리라도 있어야지 종교에서 발생하는 비이성적인 잘못들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고, 자신이 믿는 종교가 오직 인간 초월적인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부분 역시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으니 말이다. 포이어바흐의 주장들은 뒤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같은 사람들에게 비판받았음에도 이들 역시 포이어바흐의 주장을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수용했으니 이쪽으로도 관심이 있다면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포이어바흐에 대한 책이 좀 더 많이 나오길 바라며 이번 리뷰를 마치겠다.

자연과 직접적인 교제 속에서만 인간은 치유되며 모든 터무니없고 초자연적이거나 반자연적인 이념과 상상을 벗어던질 수 있다. - P47

신학에서는 성스러운 것만이 진리이지만 철학에서는 진리만이 성스럽다. - P55

신학은 인간학이다. 종교의 대상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불과하다. 또는 인간의 신은 인간을 신격화시킨 본질에 불과하다. - P63

기독교는 바로 태양, 달, 별, 불, 흙, 공기가 아니라 자연과 구분하여 인간의 본질을 규명해주는 힘인 의지, 오성, 의식을 신성한 힘과 본질로서 경배한다. - P66

여러분! 당신들이 말이 완전히 맞소. 나는 나를 비난하는 자들과 조소하는 자들에게 마음 속으로 말했다. 나는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상상된 인간의 본질이란 하나의 난센스이며 관념론적 괴물이라는 사실을 여러분과 똑같이 또는 여러분 이상으로 더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인간의 전제가 되고 인간이 필연적으로 관계하며 그것 없이는 인간의 실존이나 본질을 생각할 수 없는 본질은 여러분이 말하는 신이 아니라, 바로 ‘자연에 불과하오!‘ - P66

나의 이론이나 이념은 그러므로 자연과 인간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인간의 전제가 되는 본질, 인간의 원인과 근거가 되고 인간의 발생과 존속을 좌우하는 본질은 나에게 신이 아니고, 또 신으로 불리지 않으며 명백하고, 감성적이고, 이중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말과 본질인 자연이다. - P68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했고 중요한 것은 종교의 어두운 본질을 이성의 횃불로 밝혀주어 인간으로 하여금 마침내 지금까지 그리고 오늘날에도 종교의 몽매성을 인간의 억압에 사용하고 있는 저 모든 인간에 적대적인 세력의 먹이나 노리갯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 P69

나의 강의와 저술의 목적은 다같이 인간을 신학자가 아닌 인간학자로 만들고, 신을 사랑하는 자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고, 내세의 수험생에서 현세의 학생으로 만들고, 천상적이고 지상적인 군주제와 귀족제의 종교적 정치적 하인에서 자유롭게 자신감에 찬 지상의 시민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긍정하기 위해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참된 본질을 긍정하기 위해서 신학과 종교의 환상적이고 가상적인 본질을 거부할 뿐이다. - P70

‘종속감‘이 종교의 근거이고 이러한 종속감의 근원적 대상이 자연이며 그러므로, 자연은 종교의 제1대상이다. 자연에 대한 공포가 처음으로 세상에 신들을 만들어냈다. 정신적으로 발달한 민족에게도 최고의 신성은 소나기, 번개, 천둥과 같은 최고도의 공포를 인간에게 일으키는 자연현상이 인격화된 것이다. - P72

유신론이나 신학은 바로 인간을 세계와의 결합에서 분리시키고 고립시켜 자연을 넘어서는 오만한 자아나 본질로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을 벗어나 있고 초자연적인 본질을 참되고 신성한 본질로 믿는 것과 일치된다. 그러나 종교는 근원적으로 인간이 자연이나 세게와 결합되고 일치된다는 감정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 P84

기독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바로 그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인간의 소원을 등한시했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영생을 약속하면서 현세를 망가뜨렸고 신의 도움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 인간 자신의 힘에 대한 신뢰를 망가뜨렸다. 또한 천상에서의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지상에서의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망가뜨렸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상상 속에서 원하는 것을 부여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진리와 현실 속에서 인간이 요구하고 원하는 것을 부여하지 못했다. - P395

신이란 추상화되고, 환상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독자화된 인간과 자연의 본질에 불과하다. 유신론은 그러므로 사물과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본질을 단순한 사유상의 환상적인 본질을 위해 희생한다. 무신론은 이에 반해 구체적인 삶과 본질을 위해 사유상의 환상적인 본질을 희생한다. 무신론은 그러므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다. 무신론은 유신론이 자연과 인류에게서 박탈해간 의미와 존엄성을 자연과 인류에게 되돌려준다. 무신론은 유신론이 최상의 힘을 흡수해가버린 자연과 인간에 생기를 불어넣으려 한다.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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