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계획은 크게 틀어져 수정조차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범인 중 한 명이 죽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 바람에 다른 여섯 명은마음 편히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경찰에서는 사와모리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수사를 중단할 게 틀림없었다. 사건은 해결되고 경찰이 더는 움직이지 않아서 다른 범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일도 없게 된다. 사와모리가 자멸해준 것은 괜찮지만, 한 사람의 자멸이 나머지 여섯 명을 구해주면서 그들은 안도할 것이고 레이코의 죽음은 개죽음이 되고 만다. - P339

8월의 내 생일날 밤, 촛불 너머에서 레이코는 "난 이제 파멸이에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녀가 파멸이라는 단어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그 순간부터 나의 파멸이야말로 레이코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딸 같은 나이의 여자를 사랑한 순간부터 마흔다섯 살의 아무런 장점도 없는 남자는노 예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노예에게 허락된 사랑의 방식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주인을 위해 어떤 죄라도 감행해 스스로를 파멸에 몰아넣는 것뿐이었다. 어이없게도 그녀가 원하지 않는 것이더라도.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죄에 죄를 거듭하는 것으로, 극악인이 되는 것으로, 나는 그 일곱 명보다 나 자신을 파멸시키고 싶었다. 레이코가 파멸한다면 그 파멸에 동행하는 것이 나의 사랑이었다. 아니, 레이코보다 훨씬 더 큰 파멸을 맞이하는 것만이 나와 레이코 사이에 영원의 거리로 벌어진 애정의 격차를 메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P345

하마노를 죽이려 하면서도 내가 내민 그 손에는 악수라도 청하는 듯한, 상처 입은 동료를 위로하는 듯한 기묘한 선량함이 섞여 있다고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는 채 두 시간 뒤에 하마노의 오피스텔로 불러들인 마가키 기미코의 가슴에 나이프를 움켜쥔 손을 내밀었을 때도 똑같은 선량함을 느꼈다. 그리고 허식에 찬 세계에서 악의 휘황한 천을 짜내려 갔지만 실은 고독하고 가없었던 사십 대 여자의 심장에 흉기를 깊숙이 박아 넣으면서 선량하게 미소 짓는 나 자신이 광인이나 살인귀라고 실감했다. - P3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토록 환하게, 또한 그토록 슬프게 미소 짓는 여자는 처음 보았다. 그 눈부심에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내게 그녀는 다시금 미소를 건네주었다. - P308

마흔이 넘은 남자가 딸 같은 나이의 젊은 여자를 사랑하고 말았을 때 어떤 심정이 드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끊임없이 젊음에 협박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자신의 나이에 겁을 먹고, 대체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내 곁에 묶어둘 수 있을까,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는 것이다. 레이코는 사와모리가 자신의 몸을 거액의 돈으로 사들인 것 때문에 그를 증오했다. - P309

레이코가 아무리 제멋대로 굴어도 용서해주고 어떤 부탁을 하든 들어주면서 지속적으로 착한 사람을 지불해주는 것만이 내 나이의 남자에게 허락된 사랑의 방식이었다. - P3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의 돌연한 분노에 자신의 조각상이 마침내 영혼을 가진 진짜 인간이 되어 나타난 듯한 놀람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분노가 그 얼굴의 아름다움을 파괴해 추하게 뒤틀렸을 때, 그는 비로소 거센 욕망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그날 밤 안에 이 여자를 죽이자고 마음먹었다…. - P167

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미오리 레이코는 단지 자신의 꿈에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어린 시절에 동화의 세계를 통해 알아버린 꿈을, 어느 날 갑자기 공주로 다시 태어나는 꿈을, 성장한 뒤에도 잊지 못한 것이다. 자기 스스로 옛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어떤 희생이든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타고난 미모는 레이코에게 야망이라는 또하나의 무기를 안겨주었고, 야망은 다시 레이코를 한층 더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 꿈에의 계단을 몇 칸씩 뛰어오를 수 있는 특별한 구두가 되어주었다. - P1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년 전 어느 날, 내 얼굴을 사고로 파괴해버린 남자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전 재산을 털어 나를 뉴욕의세계 최고 실력자라는 성형외과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렇게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어주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그 새로운 얼굴에 눈독을 들인 유명한 사진작가는 나를 작업실로 데려가 카메라 앞에 세웠다. 그리고 이런 얼굴에는 다른 화장법이 어울린다면서 립스틱이며 아이섀도로 내 얼굴을 온통 칠해버렸다. 또 어느 날은 유명한 여성 디자이너가 잡지 사진을 봤다면서 접근하더니 자신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혀 무대에 세웠다.
그리고 또 어느 날, 그리스 조각처럼 단정한 얼굴의 신인 디자이너는 나를 파리에 데려가 자신이 잠자리를 함께한 세계적으로유명한 동성애자 디자이너에게 나를 팔아넘겼다. 또 어느 날은나와 마찬가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한 살 많은 패션모델이 친근한 얼굴로 다가와 친구가 되자면서 내 왼쪽 젖가슴에 자신과똑같은 나비 문신을 하라고 권했다. 또 다른 날, 어느 섬유회사의젊은 사장은 나를 호텔로 청해서 1억 엔의 돈다발로 내 몸을 샀다. 그리고 다른 돈다발을 풀어 자신이 고른 새빨간 드레스를 입히고 자기 회사의 TV 광고에 출연시켰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레코드 회사의 젊은 여성 디렉터는 내 음성이 꽃의 꿀 같다면서 서툰 노래를 부르게 해서 목소리까지 돈으로 바꾸었다. - P24

한 여자에게서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는 단지 이레 동안이 필요할 뿐이었다. 한 여자의 몸을 조각내고 살을 샅샅이 먹어치우는 데는 일곱 명의 손과 입만 있으면 충분했다. 나는 이따금 거울 속에서 이제는 전혀 내가 아니게 된 괴물의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돌려버리곤 했다. 그 돌려버린 눈으로 항상 멍하니 죽음만을 응시했다. - P25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술잔 중 하나를 마시면 죽음이 찾아오고 다른 하나를 마시면 기분 좋은 취기가 찾아온다는 게 문득 신기한 기적처럼 느껴졌다. 죽음 또한 지금의 나에게는 술보다 기분 좋은 취기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잊고 싶어서 자주 술을 마셨지만 어떤 취기도 내가 인간의 잔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게 해주지는 않았다. - P38

이제 곧 찾아올 나의 죽음과 납 인형에 건배의 미소를 날렸다. 살인자와 피해자는 2미터 거리를 두고 삼초 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살해하려는 자와 살해당하기를 원하는 자가 마치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공범처럼 시선을 주고받았다. - P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항상 작은 것에 비유되었다. 아름다움을 상찬할 때조차 사람들은 ‘작다‘라는 단어를 썼다. 사 년 전 유명한 프랑스 디자이너 르네 마르탱은 나를 ‘동양의 작은 진주‘라 일컬었고, 작년 봄에 <라이프>지에서는 ‘밤에 반짝이는 작은 물방울‘이라 묘사했다. 마치 나의 아름다움이 거대한 힘을 가질까봐 두려워서 반드시 가로막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 P6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만일 모델이 되지 않았다면 오년 후 오늘 밤에 죽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종결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슬픈 출발이었는지도 모른다. - P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