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년 전 어느 날, 내 얼굴을 사고로 파괴해버린 남자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전 재산을 털어 나를 뉴욕의세계 최고 실력자라는 성형외과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렇게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어주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그 새로운 얼굴에 눈독을 들인 유명한 사진작가는 나를 작업실로 데려가 카메라 앞에 세웠다. 그리고 이런 얼굴에는 다른 화장법이 어울린다면서 립스틱이며 아이섀도로 내 얼굴을 온통 칠해버렸다. 또 어느 날은 유명한 여성 디자이너가 잡지 사진을 봤다면서 접근하더니 자신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혀 무대에 세웠다.
그리고 또 어느 날, 그리스 조각처럼 단정한 얼굴의 신인 디자이너는 나를 파리에 데려가 자신이 잠자리를 함께한 세계적으로유명한 동성애자 디자이너에게 나를 팔아넘겼다. 또 어느 날은나와 마찬가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한 살 많은 패션모델이 친근한 얼굴로 다가와 친구가 되자면서 내 왼쪽 젖가슴에 자신과똑같은 나비 문신을 하라고 권했다. 또 다른 날, 어느 섬유회사의젊은 사장은 나를 호텔로 청해서 1억 엔의 돈다발로 내 몸을 샀다. 그리고 다른 돈다발을 풀어 자신이 고른 새빨간 드레스를 입히고 자기 회사의 TV 광고에 출연시켰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레코드 회사의 젊은 여성 디렉터는 내 음성이 꽃의 꿀 같다면서 서툰 노래를 부르게 해서 목소리까지 돈으로 바꾸었다. - P24

한 여자에게서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는 단지 이레 동안이 필요할 뿐이었다. 한 여자의 몸을 조각내고 살을 샅샅이 먹어치우는 데는 일곱 명의 손과 입만 있으면 충분했다. 나는 이따금 거울 속에서 이제는 전혀 내가 아니게 된 괴물의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돌려버리곤 했다. 그 돌려버린 눈으로 항상 멍하니 죽음만을 응시했다. - P25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술잔 중 하나를 마시면 죽음이 찾아오고 다른 하나를 마시면 기분 좋은 취기가 찾아온다는 게 문득 신기한 기적처럼 느껴졌다. 죽음 또한 지금의 나에게는 술보다 기분 좋은 취기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잊고 싶어서 자주 술을 마셨지만 어떤 취기도 내가 인간의 잔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게 해주지는 않았다. - P38

이제 곧 찾아올 나의 죽음과 납 인형에 건배의 미소를 날렸다. 살인자와 피해자는 2미터 거리를 두고 삼초 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살해하려는 자와 살해당하기를 원하는 자가 마치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공범처럼 시선을 주고받았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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