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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
이서안 지음 / 북레시피 / 2022년 6월
평점 :
가끔 집 정리를 하다 보면 '있었지만' 잊고 지낸 물건이나 기억들이 불쑥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걸 기회로 '이랬었지', '저랬었지' 또는 '아, 맞다. 이거였지!'라거나 '이게 여기 있었네!'라며 유레카를 외치기도 한다. 이서안의 소설집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의 표제작은 우리의 삶에서 잊혔던, 또는 존재하지만 부재했던 그 '유레카'에 관한 이야기다.
다큐 PD인 나는 방송국 선배 '홍'의 권유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코끼리'에 대한 취재를 위해 남도의 작은 섬으로 향한다. 너무 뜬금없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였으나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선배였기에 조금은 '그저 빨리 찍고 빨리 오자'라는 마음을 갖고 말이다. 홍선배는 코끼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모든 기록의 '행간을 읽어야 한다'라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강조한다. '있는 코끼리'가 아닌 '코끼리가 산다'를 담아야 한다고 말이다. 선배는 과연 코끼리의 '무엇'을 담아오길 바랐던 걸까?
앞서 이야기한 대로 잊고 지낸 물건이나 기억들은 '부재(不在)'가 아니다. 그것들은 항상 거기, 그곳에 '있었음'에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거나 잊었던 것뿐이다. 이처럼 이서안 작가는 '코끼리'라는, 조금은 비현실적인 '있음의 기록'을 통해 '있다'라는 현상(現像)을 ‘살다’라는 실존(實存)으로 화한다.
작가는 표제작 외에도 수록된 다른 단편소설을 통해 이러한 실존화된 이미지를 연장선상에 담는다. <글라스 파파>의 주인공 '유리'는 이중 의미로 사용되어('이름'으로서, 실제 '유리(glass)'로서) 아버지의 유산을 매개로 비로소 존재하는 생명을 얻는다.
개인적으로 본서의 가장 추천작인 <어쩌면 이제>에서는 중학교 동창 '휘'에 대한 기억과 주인공의 억눌린 만감(萬感)이 17년 전의 분실물 MP3를 매개로 생명을 얻었고, 영화와 음악 용어를 소제목으로 사용한, 조금은 치기 어린 <프렌치 프레스>는 버려도 버려도 깨끗이 씻지기 않는 '커피 찌꺼기'를 통해 흔적을 노래한다.
또 다른 결이 느껴지는 세 편의 단편소설ㅡ바람 난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은 아내의 이야기를 담은 스릴러 <냉동 캡슐에 잠든 남자>, 장의사 아버지를 둔 형사 아들의 이야기 <셰어 하우스>, 포경선 박씨의 이야기를 담은 <고래를 찾아서>ㅡ은 작가의 초기작들이 아닐까 싶은데, 앞선 네 편의 이야기와는 달리 뭔가 '시도한다'라는 느낌이 강한 작품들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있음'을 잊고 사는 걸까? 그것이 가족과 친구 등 주변 이들과의 있음이었거나, 크게는 한 나라의 역사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것은 항상 우리 주변에 '있다.' 다만 우리가 잊었을 뿐이다. 그것은 커피 찌꺼기처럼 씻어도 씻어도 씻기지 않은 채 침전되어 '당신과 나'라는 각자의 섬에서 몇십 년에 한 번씩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코끼리처럼 포효한다. 나를 봐달라고, 나를 기억해 달라고, 나를 잊지 말라고.
이제 그 섬의 코끼리는 당신의 선택을 기다린다. '있을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 나는 코끼리가 존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는 '존재의 유레카'를 향한 로드맵이 되어 줄 것이다.
기억은 늘 다른 형태입니다. 오래된 필름처럼, 때론 디지털 화면처럼. 그러나 질감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저마다 코끼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섬에 코끼리가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떠한 코끼리를 기억합니까? (이서안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 북레시피, p. 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