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無所有 - 법정 스님의 수필: 소유의 의미와 무소유에 대한 깨달음
법정 / 포레스트위즈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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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무소유'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하필 가시가 돋쳤을까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가시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어진다."

모든 건 관점에서 시작한다. 타의에 의해 '무소유'하면 '가난'이 되지만 자의에 무소유하면 '해방'이 된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장미꽃에 돋은 가시'와 '가시에 핀 장미꽃'처럼 명확하게 다르다. 흔히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처럼 관점의 차이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사람은 세계를 가만히 두고도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관점의 차이이며 이것을 갈고 닦는 것을 '수행'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관점을 가진다. '남산'을 두고 '남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남쪽'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두고 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은 정의된다.

'소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음이 아니다. 설령 '무소유'를 말씀하신 '법정 스님'조차, 그의 '이름'을 소유했고 '무소유'에 대한 철학을 수요했다. 본디, '무소유'는 역설을 맞는다. 그러나 그가 말한 '무소유'는 단순히 '갖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말한 '무소유'는 집착을 끊어낸다는 의미다.

무언가를 소유할 때, 우리는 대상에 '집착'을 갖는다. 그것이 본래 자신의 것이었다는 강한 집착은 단순히 '관념'일 뿐이다. 우주에서 '본래 나의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으며 세상에 잠시 빌려 쓰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본래 '내 것'이 없다는 없다는 인식은 '무소유 철학'의 근본이다. '내것'은 없다. 불교 철학에서 말하길 아상, 즉 '나' 또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마당에 '나'의 '소유물'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철학으로의 불교는 과학적 인식이 근간이 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꽤 중요한 이슈다. 특히 '양자역학'과 연결하여 '불교와 도교철학'은 자주 사용된다. 모든 것은 '관찰자'가 중요하며 관찰하는 자가 없을 때, 그것은 오롯이 확률로만 존재한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과 '도교' 심지어 '기독교'마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같다는 것이다. 옛 성인들은 자신들의 찾아낸 본질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정리했다. 다만 그것을 전달하는 '학자'들은 그것에 '학문'과 '종교'의 이름을 빌어 분석하고 분류하고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용어'와 '언어'가 생겨났고 하나의 진리가 수백만 조각으로 쪼개어 단번에 인식하기에도 어렵게 변해졌다.

'도교'는 세상 만물의 근본 원리나 본질을 '도'라고 정의했다. 노자가 말했던 '도가도 비상도' 즉,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는 더 이상 '도'가 아니다. 그것은 정의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다. 우리 언어가 가진 한계를 뛰어 넘는 하나의 덩어리를 뜻 한다. 이것은 섞이고 뭉치고, 분리되고 혼합된다. 아주 서서히 규칙적이면서 불규칙적이고 겉이면서 속이고, 안이면서 속이다. 하나의 촛불이 어두운 방을 밝힐 때, 그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명확히 존재하지 않듯. 아주 작은 단위로 무수히 그라데이션되어 있다. 이것은 '도가'에서 말하는 '세상 만물'이다. '도'의 관점에서 '나' 또한 '도'의 일부다. 불교 철학에서는 그 반대이다. '우주만물'로 시작하여 '나'로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 '나'로 확장하여 '우주만물'로 확장된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옷을 입는다. 옷을 입지 않더라도 사람을 구성하는 성분에는 미생물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일부인 손톱과 머리카락은 죽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케라틴이라는 단백질로 만들어진 섬유질 구조물일 뿐이다. 즉 우리몸에 털과 각질을 포함해 다양한 구성 성분은 실제로 몸에 착용하는 '옷'만큼이나 '나'와 다른 무언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른 무언가'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식상 나를 확장하여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과 각질까지 자아로 인식한다. 또한 입고 있는 옷과 안경 때로는 어떤 악세서리까지 그것을 '자아'로 인식한다. 이렇게 나의 인식 범위를 넓히다다 보면, 나의 범위는 가족과 친구, 친지를 넘어 '상대', '국가', '인류'로 까지 확장된다. 이런 자아의 확장을 무한대로 확장하면 우리를 구성하는 '수소'와 '산소', '탄소'를 포함한 작은 원자 알갱이를 공유하는 세상 만물로 확장된다. 결국 '나'를 확장하면 그 끝에는 '우주'를 만난다. 이것은 금강경의 철학이다.

즉, 소유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다. 고로 자아를 확장하는 순간, 상대에게 가 있는 나의 소유물도 결국은 '나'의 확장일 뿐이며, 상대 또한 '나'일 뿐이다.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 '빼앗겼다'라는 인식을 하지 않듯. 무소유란 실제로 갖지 않는 것이 아닌 가짐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인식을 달리하는 일이다.

결국 무소유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과 '상황', '감정'에서도 적용이 된다. 어떤 인연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상황도 머물러 있지 않으며, 어떤 감정에도 휩쓸리지 않는 것이 무소유의 핵심이다. 모든 것은 조금씩 섞여가며 바뀌고 섞이고 달라진다. 결국 감정, 사람, 상황 모든 것은 영원불멸할 것 같은 인식의 착각 속에 우리를 괴롭히지만 그런 것들은 한낱 바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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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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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한창 좋아하던 노래 중 'SG워너비'의 '한여름 날의 꿈'이라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과는 '날'과 '밤'이라는 하나의 차이가 존재한다. 우연하게 이 노래를 접한 것은 이범수, 이선균 배우가 출연한 '뮤직비디오' 때문이었다. 이 뮤직비디오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을 배경으로 한다. 한 때 가장 친했던 친구 둘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이때 벌어지는 다양한 감정이 '뮤직비디오'와 함께 '노래'로 재구성 되었다. 이 노래와 뮤직비디오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쏙 빼다 닮았다. 비극과 희극이 섞여 있는 이 음악이 다루는 '사랑' 이야기는 어느 하나는 이루어지고 어느 하나는 이루어지지 못할 안타깝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희곡의 제목은 왜 '한여름 밤의 꿈'일까.

어린 시절에 내가 가장 무서워 했던 꿈이 있다. 나는 형체없는 존재였는데 나의 아래로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이 절벽은 가파르다 못해, 경사도가 수직에 가까웠는데, 이 수직의 절벽을 십 수마리의 악어가 엉금엉금 기어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같은 꿈을 꽤 여러 차례 꾸었다. 단 한번도 악어가 나에게 도달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고 난 뒤에 이마와 베개는 흠뻑 젖어 있었다. 가만 돌이켜 보면 꿈속에서 나는 팔도 다리도 없는 그저 관찰자에 불과했다. TV화면처럼 악어가 절벽을 기어 올라오는 그 장면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그 비현실적인 꿈에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는가.

아마 꿈이라는 것의 특성 때문에 그런듯하다. 꿈에서 느껴지는 '공포', '사랑' 따위의 감정은 그것이 비록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이라 하더라도 '감정'만큼은 진실하다. 그 감정은 실제보다 더 실제같다. 현실에서 느껴지는 공포스러운 감정과 사랑하는 감정 그런 것들이 사실은 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요정과 마법이 등장하고 때로는 신화속 인물들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거기에 흠뻑 이입할 수 있는 이유는 '감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여름 밤의 꿈'은 무더운 여름날 생생하게 꾸웠던 나의 '악어 꿈'과 같이 '감정'에 깊게 몰입된 꿈의 이야기 일지 모른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감정. '사랑'이다. 셰익스피어는 '한여름 밤의 꿈'에서 사랑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참사랑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다' 또한 '사랑은 저급하고 천하며 볼품없는 것을 가치 있는 형체러 바꾸어 놓는다'

이 두 가지 메시지는 사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사랑'은 모든 것에 해답처럼 보일 때가 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어떤 철학을 막론하고, 어떤 음악과 시를 막론하고 역사는 '사랑'을 말한다.

다만 대부분의 고통 또한 '사랑'과 엮여 있다. 고백에 거절 당하거나, 연인들 사이에 오해나 갈등 또한 마찬가지다. 스치듯 지나가는 자에게 가질 수 없는 섭섭함이나 갈등, 오해, 증오는 때로 가장 가까운 사람과 일어나는 일이며 그 완성은 없고, 완성으로 가는 길은 아픔을 수반한다.

'한여름 밤의 꿈'은 고대 아테네의 신비한 숲에서 일어나는 네 명의 연인과 요정들의 이야기다. 글에는 '사랑의 묘약'이 등장한다. 단순히 눈가에 뿌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변덕스럽게 바뀌어 버리는 사랑의 대상은 그 불확실성을 보여준다. 희곡은 사랑을 반대하는 아버지로 부터 시작한다. 또한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이가 내가 사랑하는 이와 같이 않으며, 내가 사랑하는 이가 다른 이를 사랑하는 복잡한 형태의 실이 무성의하게 얽혀 있다. 다만 어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실타래가 완전히 정리될 때, 우리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 않는가.

사랑의 경로에서 만나는 다양한 장애물과 극복해야할 시련들 이런 것들은 때로 '마법'이나 '신화' 같은 이야기로 각색되어 있어도 여전히 우리에게 공감을 준다. 희곡을 통해 보여지는 '사랑'은 사실 누구에게나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이야기다. 거기에는 '사랑의 묘약'이나 '요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만큼 비상식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초능력적인 힘'이 있다. 때로 어떤 경우에는 그 여장 중에 만나는 오해와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꼬꾸라지는 경우가 있다. 다만 어떤 사랑도 완성을 향해 나아갈 뿐 완성이란 없기에 우리는 목적지 없는 여정의 어느 부분에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일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이해를 공부하고 사랑에서 겪는 실패와 실망으로 더 강인한 내면을 갖게 한다. 또 다른 사랑에 대처 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기도 한다.

배우고 성장하고 변화하고.

때로는 어떤 사랑에는 '실패'라는 이름이 붙기도 하지만 그것은 멀리 봤을 때, 실패가 아닌 완성의 조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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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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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에 '스티킹 포인트'라고 있다. 웨이트 운동에서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더이상 들어올릴 수 없는 지점이 있는데 이 지점이 '스티킹 포인트'다. 트레이너들은 이 포인트부터 '성장'이라고 여긴다.

실제 무하마드 알리에게 한 기자가 몇 개의 팔굽혀펴기를 하는지 물었을 때, 그가 답했다.

"처음부터 갯수를 세지는 않습니다. 고통이 느껴지면 그때부터 숫자를 셉니다."

모든 걸 소진 한 후의 투쟁이 진짜 투쟁이다.

노인과 바다는 벌써 여러차례 읽은 책이다. 단순히 줄거리를 묻는다면 노인이 물고기 잡는 소설이다. 그 짧은 한 줄의 줄거리가 어떻게 이 소설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 놓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 책이 바라보는 시기와 시선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읽히기 때문이다.

노인과 바다는 줄거리를 알고 있더라도 언제나 흥미롭게 읽힌다. 청새치를 잡아 올리는 노인의 분투가 여지 없이 드러난다. 대상과 자신의 투쟁에서 이기고 지는 과정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무언가를 투쟁할 때, 겉으로 보기에 밋밋해 보이는 결과물이라도 거기에는 수많은 생각이 담겨져 있다. 좌절하다가 다시 시작하고, 포기했다가 재도전한다. 현상은 모든 걸 결과로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과정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노인이기에 쉽지 않겠지."

"노인이지만 대단하다."

결과를 두고 단순히 평가 내리기에 그 과정에는 실패와 성공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노인과 바다'는 엄청나게 많은 '대화'가 들어 있다. 다만 아니러니 하게도 이 소설에 등장 인물은 다섯이 채 되지 않는다. 거기에 소설의 99%는 노인이 망망대해 바다에서 겪는 일이기 때문에 노인이 대화할 상대는 전무하다. 초기에 노인과 함께 대화하는 '소년'을 제외하고 '노인'의 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 나머지 대화는 어디서 이루어지는 걸까. 그 모든 대화는 청새치, 상어, 바다 등이다. 다시말해 이 소설은 '노인의 독백'으로 이뤄져 있다.

헤밍웨이가 주인공을 '노인'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대단했던 청년은 이제 노인이 되어 가까스로 투쟁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언젠가 젊은 시절에도 그의 특기는 인내였다. 하루를 꼬박하고 한참이 흘러도 끝나지 않는 팔씨름에서 기어코 이겨내던 그 것은 '힘'이 아니라 '인내'의 산물이다. 노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든 것을 소진한 후에도 결코 그것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것을 행하는 와중에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고민도 하지 않는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그것을 이내 뒤집으며 번복한다. 이 과정이 '투쟁'이다. 그깟 청새치나 상어가 아니라 노인이 투쟁을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내가 이 소설을 다시 읽은 이유는 내 안의 목소리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를 괴롭히는 수많은 생각이 따라온다. 나의 삶의 모토인 '주체성', '긍정' 또한 이런 생각에게 한없이 나약하고 초라할 뿐이다. 내 머릿속을 괴롭히는 그런 부정적인 것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너는 할 수 없을 거야"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나의 모토가 '긍정'이지만 그런 생각은 나의 의지를 넘어서 '자동'으로 생성된다. 결국 나는 부정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흔든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나저나 지금 해야 할 일부터 처리하고 생각하자.'

배보다 큰 물고기를 어떻게 배에 실을지 노인은 고민하지 않는다. 상어가 물어 뜯는 와중에 그 투쟁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그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고민을 하고, 생각도 하지만, 이내 그것을 세차게 흔들며 자신을 다잡는다.

다 소진한 무기들, 식사와 물. 그런 것들이 하나씩 소진되더라도 노인은 그저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모든걸 소진 한 후의 투쟁. 그때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동기부여와 에너지가 충만하고 왜 해야 하는지도 명확하고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과 환경도 완벽할 때, 그때의 도전은 진짜가 아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소진되고 스스로의 의심이 스스로를 갉아 먹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정신을 차리다가를 반복하는 그런 나약해진 그 지점.

자신의 약점이 여실하게 자신에게 보여질 때, 그때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노인과 바다는 단순히 물고기를 낚는 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데 우리가 우리에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알려준다.

이 소설은 사실, 몇 번의 소설을 읽었으나, 가끔 구독하여 영상으로 뜨고 있는 유튜버 '만만송' 님의 추천을 보고 재독했다. 누군가가 '추천'하는 책을 볼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을까.'

그러고 나면 역시 책은 다른 의미로 읽혀진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두 번째에는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느껴진다. 헤밍웨이는 이 소설이 너무 다양한 각도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저 노인이고 그저 소년이고 그저 낚시하는 이야기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독자는 거기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낸다. 생각해보면 지는 낙엽을 보고 청춘이나 쓸쓸함을 떠올리는 것은 '낙엽'이 그 의미를 숨겨 두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낙엽'을 보고 그런 마음을 찾아내서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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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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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의 70%가 물인 것 처럼, 태양 구성의 70%는 수소다. 정확히 말하면 태양의 74%가 수소다. 이것은 지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태양의 수소가 지구에 중요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상대성 이론'을 비롯한 여러가지 물리 법칙과 이론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커다란 보자기를 사방에서 잡아 당겨 팽팽하게 만든다고 해보자. 이렇게 팽팽하게 잡아 당겨진 보자기에 볼링공을 하나 올려 놓는다. 이렇게 되면 보자기는 볼링공의 질량 때문에 아래로 쳐진다. '보자기'의 모양이 왜곡된 것이다. 이렇게 볼링공 때문에 왜곡된 보자기 위에 다시 구슬을 놓아보자. 어떻게 될까.

구슬은 왜곡된 보자기의 곡선을 타고 볼링공에 '탁'하니 붙을 것이다. 그것이 '중력'이다. 이때 '보자기'는 시공간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은 '중량'이 시공간을 왜곡한다고 생각했다. 볼링공과 구슬처럼 왜곡된 시공간에 있는 물체는 더 무거운 쪽에 달라 붙도록 된다.

이것이 지구가 태양의 궤도에 붙어 있는 이유이다. 태양은 엄청나게 무겁다. 그러나 이런 태양 또한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무수하게 많은 '입자'의 집합체다. 태양은 엄청나게 많은 '수소'의 집합이다. 각개의 수소가 개별로 존재하다가 우연히 그 질량으로 시공간을 왜곡하면 그 주변에 있는 수소 원자들은 조금 더 무거운 수소 원자 근처로 달라 붙는다.

구슬 두 개가 놓여 있는 보자기에 세번째 구슬이 달라 붙는 것 처럼 말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지나가던 구슬이 하나 둘 씩 모인다. 이렇게 모여진 형태가 '태양'이다. 태양은 '수소'의 집합이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해서 '입자'들이 모이게 되면 강한 압력이 생긴다. 압력이라는 것은 열이 된다. 이유는 이렇다.

모든 원자는 떨고 있다. 서로 거리가 멀리 있을 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다가, 점점 가까워 지면 떨림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두대의 스마트폰 진동을 켜고 1미터 간격으로 두자. 그렇다면 이 스마트폰은 서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진동이 울리는 스마트폰을 딱 붙여 서로 맞대어 보자. 그렇다면 양쪽의 떨림은 서로가 서로를 미세하게 때린다. 이렇게 떨리게 되면 운동량이 커진다.

이때 나오는 공식

E=mc²

에너지는 질량 곱하기 속도의 제곱

물론 '수소 원자' 하나의 질량은 엄청나게 작다. 그러나 여기에 곱해지는 '속도의 제곱'이 빛의 속도에 가깝다면 어떤가. 에너지는 무한대로 커진다. 즉 밀도가 높아지면 온도는 올라간다.

이렇게 밀도가 높으면 열이 발생한다. 서로 서로 미세한 떨림이 무수하게 때리면서 충돌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두 원자는 결국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이렇게 합쳐지는 현상을 뭐라고 부를까. '핵융합'이다.

쉽게 말해, 밀가루 반죽 덩어리 두 개가 있다고 해보자. 밀가루 반죽 덩어리 표면에는 밀가루를 붙여 서로 붙지 않게 해 두었다. 이때, 이 밀가루는 서로 붙어 있어도 금방 뗄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을 아주 강하게 붙인다면 어떻게 될까. 이 두 개의 반죽은 결국 하나가 된다.

자, 다시 보자기로 돌아와서, 보자기에 둥근 밀가루 반죽이 있다. 이 밀가루 반죽을 하나를 놓고 두를 놓고 셋을 넣고 무수하게 놓는다. 결국 보자기는 아래로 묵직하게 내려간다. 그래도 꾸준히 밀가루 반죽을 넣는다면, 결국 밀가루 반죽은 서로 서로 합쳐진다.

그것이 핵융합이다. 핵이 융합할 때, 그 입자의 속도는 빛의 속도처럼 빠르다. 고로 다시 E=mc²

열이 발생한다.

태양은 엄청나게 많은 '수소' 덩어리였다. 이 수소들이 점차 압력을 받으면 결국 하나로 결합된다. 그렇게 결합되어 만들어진 원소가 '헬륨'이다. 결국 태양은 수소가 헬륨으로 결합되며 만들어진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가 '복사'의 형태로 매질 없이 진공의 우주를 건너 지구로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양 내부에서 '핵융합'은 고르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태양 또한 자전을 하기 때문에 극지방과 적도에는 속도의 차이와 온도의 차이가 발생하고 대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 와중에 극하게 온도가 낮아지는 '구간'이 생기는데, 이것을 '흑점'이라고 한다.

이름을 '흑점'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바늘 구멍 같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흑점은 최대 5만 킬로미터를 넘어서기도 한다. 참고로 지구의 직경이 12만 킬로이니, 지구의 4배나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급격하게 에너지가 낮아지는 경우는 꽤 주기별로 발생하는데 대략 9년에서 14년마다 반복된다.

지구의 역사에서 12세기 정도가 되면 흑점의 영향으로 급격하게 온도가 내려가는 구간이 생긴다. 이때, 지구는 '소빙하기'를 맞이 한다. 소빙하기는 지구를 차갑게 만들었다. 지구가 차가워지면 태양복사열을 받아 '바닷물'을 증발하던 현상도 느려진다. 즉 강수량이 낮아진다.

낮아진 강수량과 기온 때문에 몽고 평야 지대에서는 초원이 넓게 펼쳐지며, 초목생활을 하던 '유목민'들이 말을 타고 확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게 된다. 또한 '가축'을 이용하여 장거리 여행 또한 가능해진다. 이 시기에 동양과 서양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교류가 생기는데, 이때 문화와 경제적 교류 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풍토병도 함께 이동된다. 이렇게 해서 14세기 중반에는 유럽의 인구를 3분의 2로 줄인 흑사병이 대규모로 발발한다.

흑사병은 사실 유럽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업과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던 유럽은 도시 밀집 지역이 많았고 비위생적인 환경이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농작물의 흉작으로 인한 '대기근'이 함께 발생하면서 흑사병은 엄청난 속도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단순히 신체적 병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흑사병은 문화적, 역사적 변화를 만들어왔다. 접촉에 의한 질병이기 때문에, '의심'과 '고립'이라는 현상을 만들어 낸다. 이 시기에 유럽의 문화적 변화는 다양했다. 유럽은 신체적 접촉을 최소화하는 춤의 형태로 사교 문화를 바꿔 갔다. 또한 남자들은 행커치프를 왼쪽 앞주머니에 꽂아 놓는 패션의 변화도 만들었다. 사람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질병을 가져온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몸에 '향수'를 뿌리기도 한다. '향수'는 단순히 냄새를 가리는 것 뿐만 아니였다. 그 속에 함유된 '허브'가 질병의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을 주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피해로 엄청나게 많은 숫자가 갑자기 사라지자, 유럽에서는 노동력 부족이라는 상황에 쳐하게 된다.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노동자의 임금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이렇게 토지에만 의존하던 지주들은 결국 힘을 잃는다. 그리고 중상주의, 산업주의, 자유주의 사상이 생겨난다. 1776년에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이라는 책이 쓰여진다.

21세기에 발발한 코로나 또한 비슷한 영향을 끼친다. 미국은 '유럽'과 국경을 통제 했다. 코로나는 분리주의를 더욱 가속화 시켰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점점 '사회적 거리두기'를 문화로 받아 들였다. 국가와 세계가 분리되고, 그 비어진 공간을 '기술'이 대체했다. 사람들은 사람과 어울리기 보다 '기계'와 어울리기를 즐겨하고 결국 애플, 인스타그램, 유튜브 처럼 비대면 소통을 돕는 기술 회사들이 더욱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가만히 보면 AI의 발전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연결 지을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주체적인 선택을 하는 만물의 영장이라 할지라도, 여타 동물들 처럼 환경에 영향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태양의 흑점 활동과 역사를 연결하는 연구는 완성단계이 이르지는 않았지만 꽤 의미 있어 보인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당시의 유럽을 이야기하는 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은 알제리의 도시, '오랑'에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이 소설을 10년 전에 읽었던 이들은 아마 이 소설에 대해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코로나19를 겪은 우리로써 이 이야기는 '상상'이 아니라 '경험'과 '기억'이다. 행정과 윤리, 개인의 사랑이 질병이라는 환경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혹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 많은 부분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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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10분 계산력 : A2 - 유아 7세~초등 1학년 날마다 10분 계산력
애플비북스 편집부 지음 / 애플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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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한다고 하면 거들 뿐이다.

도와 달라하면 도와주지 않는다. 다시 읽어보라고 할 뿐이다.

잘 한다고 칭찬하지 않는다. 한다고 칭찬할 뿐이다.

맞으면 기뻐하지 않는다. 틀리면 '보석을 찾았다!'라고 말해준다.

아이가 문제집을 가져 오더니 옆에 앉는다. 바스락 바스락 거리더니, 문제를 푼다. 가만 지켜본다. 한 아이가 문제를 풀기 시작하니, 옆에 아이가 문제집을 가져온다. 그렇게 그닥 요청하지 않는 공부 시간이 시작됐다.

꽤 했던 것 같다. 안 하겠다고 하면 하지 말라고 한다. 하겠다고 하면 하라고 한다. 그 뿐이다. 다만 아빠가 있는 자리에 오고 싶어 할 때, 책이라도 가지고 오라고 한다. 한참을 문제를 풀던 아이가 '채점'을 해 달라고 한다.

다율이가 푼 문제를 채점하다가 틀린 문제를 발견한다. 가차없이 표시한다. 표정이 어떻게 바뀔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도 가차없이 표시한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하더니, 이내 울고 만다.

"근데 왜 우는거야?"

묻는다. 아이가 맞은 걸로 해달라고 떼를 쓴다.

"왜 틀렸는데, 맞은 걸로 해?"

그러자,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하고 떨어진다.

"틀린 거는 보석을 찾은 건데, 왜 없애?"

아이에게 틀린 거는 보석이라고 말한다.

옆에 있는 아이는 100점이었다. 아이에게 말했다.

"어이그, 바보같이 하나도 안 틀렸네."

그러자 아이가 다시 묻는다.

"아빠. 안 틀리는게 좋은거야."

그러면 다시 말한다.

"안 틀린게 뭐가 좋아. 보석을 하나도 못 찾은 건데."

농담반 진담반 이렇게 말하자, 아이가 말한다.

"아빠, 이런 건 보석이 아니야."

그러더니 자기가 모아두던 보석함을 가져온다. 거기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보석이 잔뜩 쌓여 있다.

"이런 게 보석이거든?"

가만히 지켜보더니 다시 묻는다.

"너 그걸로 아이스크림 바꿔 먹을 수 있어?"

"아니"

"그런데 틀린 문제 찾아내면 나중에 아이스크림으로 바꿔 먹을 수가 있어. 바보야."

아이가 '아 그렇구나' 한다.

그러다니 자기도 틀린 문제가 있다며 보여준다.

"아빠, 이거 틀린 거 사진 찍어주면 안돼?"

그러더니 틀린 문제를 인증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이가 틀린 문제를 자랑스럽게 펴고 사진을 찍는다. 드디어 웃는다.

"보석은 잘 모아 두었다가, 다시 공부 해야돼. 그거 잊어먹거나 까먹으면 절대 안돼!"

그러자 아이가 말한다.

"어이그, 누가 보석을 잊어버리냐?"

그러더니 틀린 문제에 '브이 표시가 아니라 하트 표시를 해놓는다.

가만보면 학창시절이나, 성인이 된 후나 오답노트가 가장 중요하다. 무언가를 계속 진행하고 반복하다보면 자신이 계속 같은 부분에서 실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고 지속되면 그것이 더이상, 실수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아이는 수학문제를 배웠지만 나는 인생을 느꼈다. 그렇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같은 실수를 하고 있다는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그것을 잘 모으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다음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데 말이다.

요즘은 그것을 '메타인지'라고 그럴싸하게 부르지만, 그냥 단순히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지겹게 들었던 말이다.

사람에게는 아는 영역이 있고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또한 자신이 알고 있다고 아는 영역과 알지 못한다고 알고 있는 영역이 있다. 다만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것. 다시 더 깊게 들어가 보자면, 그자체를 모른다는 것 조차도 모른다는 것이다.

가만 보면, '일기'를 쓰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메타인지'를 향상시키는 꽤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살다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잊고, 어떤 실수를 하고 있는지를 잊고, 어떤 성공을 하고 있는지를 잊는다.

이상하게도 학창시절에 배운 배움의 노하우를 '배움'의 노하우로 그치고 '삶의 노하우'로 사용하지 못한다.

얼치기로 때려 맞춘 정답에 자만하고, 최선을 다한 오답에 좌절하며, 맞춰놓고 성장하지 못하고, 틀려 놓고 성장하지 못한다. 과연 성실하게 답을 적어놓고 그 정답과 오답을 진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받아들인 정답에 수긍하고 오답에 안도감을 느끼며 다음 단계로 진화해 나가고 있는가.

돌이켜보면 삶이 덧셈, 뺄셈보다 지극히 어려울 것 없는 난이도 임에도 혼자서 정답없는 문제에 직면했다고 착각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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