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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오늘의 일본문학 12
아사이 료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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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트위터 유저라면 누구나 한번쯤 공감해 봤을 말이 있다.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라고.  영국 유명 축구 감독 말이라나. 굳이 유명인들의 트위터 망언 사례를 떠올릴 것도 없다. 짬짬 시간 날 때는 물론 해야 할 일도 미뤄놓고 한참 스마트폰을 터치하다보면 하루에도 열두번쌕 내가 이게 뭔 짓인가 싶으니까. 그리고 그 말을 또 트윗하고 있지.


  명확한 목적도 맥락도 없다. 그런 잡담을 한없이 되풀이 생산할 뿐 아니라 남이 올려놓은 잡담을 내려 보느라 몇 시간을 보낸다. 세상에 이렇게 쓸데없는 일이 또 있을까? 트위터는 정말 인생의 낭비인 게 분명하다. 인간이라면 어느 세대,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했을 법한 낭비 말이다. 오로지 발화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하루 몇 시간을 투자한다. 식욕 성욕 배설욕 수면욕 따위가 인간의 생존과 관계된 것이라면, 발화욕은 그야말로 인간이 사는 보람,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미있게, 널리, 적은 비용으로 편하게 이야기를 가공하고 전파할 수 있을까. 인간의 많은 발명품은 이 수다욕구를 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매체의 발전에 따라 우리의 발화 방식도 끊임없이 변했고, 그와 맞물려 사상과 사회 역시 변화했다.
 그리고 현대 국경을 초월한 최고의 잡담 창고는 누가 뭐라 해도 SNS일 것이다. 거기서 오가는 정보의 대부분은 아무 쓸데없는 잡담, 평범한 일반인들의 일상 단편이다. 어떤 의미있는 주제로 토론이 오간다 해도 SNS의 특성 - 즉 짧은 잡담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한 가지 정보도 공적인 것이 없다. 누구나 언제든 끼어들 수 있고 자신만의 맥락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배출할 수 있다. 그야말로 1세기 전에는 불가능했던 대화 방식. -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방식의 변화 자체로도 재미있는 수다를 떨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되 별로 의미는 없는, 그래서 별 거부감 없이 공감 추천을 올려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아사이 료의 신작 소설 [누구] 는 딱 그런 이야기이다. 트위터에서 열심히 인생을 낭비하는 20대 여섯 명을 등장시키고 이들이 트위터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보여준다. 이 소설의 인물들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건 트위터 멘션 캡쳐, 중반 줄거리는 그 인물들 중 한 명의 시점에서 밋밋하게 전개된다. 이 소설의 소재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소설의 메인 퀘스트인 '취업'은 현대 도시에 사는 20대는 모두 실시간 플레이 중인 네버엔딩 과업이다. 게다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도 매우 공감할 만하다. 얄팍한 트위터 안에서 허세부리지 말고 진짜 자신으로서 하루하루 살아가자고. 건실하고 좋은 주제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있지 않았다. 주인공들이 너무나 평범해서? 별다른 기승전결이 없는 일상의 전개라서? 주인공이 매력적이지 않아서? 아니다. 이 작품이 제게 떨어진 조명을 한껏 살려내지 못한 것은 제 소재와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이다. 강철스프링곱슬머리를 데려다 조선시대 비녀를 꽂으려는 시도같달까.
  이 작품은 '트위터'라는 소재를 거의 살려내지 못했다. 잘 쓴 소설이었지만 무난한 소설이었다. 무엇보다도 소설은 트위터의 속도감과 자발적 참여를 끌어낼 수 없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낯선 일본인 여섯 명의 트위터를 강제 팔로 당한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그 멘션들 안에서 내 마음대로 맥락을 만들어 볼 수 있었다면 좀 더 흥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엄연한 화자=주인공이 존재한다. 사건의 흐름은 이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순서에 맞추어 진행된다. 즉 이 트위터 멘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소설의 고정 화자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이러니 습관적으로 트위터 새로고침하듯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빠져들지 않게 된다. 


  또 하나 문제는 이 소설의 구성상 작가의 메시지가 트위터 멘션과는 상관없이 전달된다는 데 있다. 이 소설에서 트위터는 거의 작은 일기장으로만 쓰인다. 기이할만큼 소통 기능은 보이지 않는다. 화자가 다른 인물들의 계정을 스토킹 하기만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본의 트윗 사용 방식이 이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전자라고 해도 주인공 외 인물들마저 트윗을 통한 소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건 문제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다른 인물의 트윗에 대한 감상을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직접 구두로 전달한다. 한 번 전달 할 때마다 한 인물의 설교조 연설이 길게 이어진다. 꼭 반 학급회의 시간에 임원이 일어나서 발표를 하듯 말이다. 그런 연설이 있은 후 대상 캐릭터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것도 간접적으로만 나올 뿐이다. 트위터는 여기서도 완전히 빠져 있다. 


  이렇게 소설 구조에서부터 트위터라는 소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재미있는 시도를 할 기회를 잃어 버렸다. 소설에 나오는 발화도구는 트위터에 화상 통화 등 최첨단인데 그걸 다루는 소설은 전형에서 안주해 버린 것이다. 전형이 나쁠 것은 없지만, 소재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썼다면 안주했다고 표현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이 외에도 대체 왜 이 소설의 인물들은 지인 뒷담화용 부계정을 돌리면서 트위터 잠금 기능을 쓰지 않는 것인지, 그것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주인공이 왜 잠금기능을 쓰지 않는지는 다른 인물의 추측이 붙긴 했다. 하지만 왜 다른 인물들도 잠금기능을 쓰지 않는 것인가?) 넘어가자.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만약 트위터의 기능을 살려서 좀 더 '멘션 대화'를 잘 보여주는 작가가 폭로하려 했던 주인공의 이중적 모습도 더 잘 들어났을지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글쎄. 주인공보다는 주인공의 부계정 트위터를 일부러 찾아내 면박주는 리카 쪽이 더 괴팍해 보인다. 뭣보다도 리카는 그걸 일부러 폭로해서 몇장에 걸쳐 설교를 할 입장도 아니었다. 주인공이 계속 열등감을 느끼며 이상화하던 고타로도 아니고 사랑하던 미즈키도 아니었으니까. 리카는 주인공에게 관찰자인척 허세를 부리는 걸 그만두라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굳이 트위터를 하지 않더라도 항상 관찰자 아닌가. 주인공이 품고 있는 열등감과 허세는 물론 짜증스럽다. 작가의 의되대로 아주 익숙하고 평범한 찌질함이다. 주인공의 그런 마인드가 답답하고 지루해서 초반부에는 이 소설을 읽기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 안에서 이렇게 주제를 공공연히 내비칠 만큼 주인공이 문제적인 모습을 보였나? 던져진 문제들은 얼만큼 무르 익었나? 그 부분에 대해선 회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내가 작가의 주제의식에 공감하고 주인공에게 내 자신을 꽤 발견했는데도)

 

  그래서 이 소설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내 생각 한줄 요약:

 

'좋아요. 좋은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트잉여가 죄인가요?'

 

 

  SNS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의 '잡담' 방식을 결정할 것이고, 우리가 이야기를 소비하는 방식도 그에 맞게 변해 갈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를 이용해 새로운 이야기를 풀려고 고심하는 이야기꾼들이 세계 도처에 많을 것이다. 과연 소설은 어디까지 SNS를 흡수할 수 있을까. SNS는 소설을 얼마나 바꾸어 놓을까. 소재와 주제와 글맛이 착착 붙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나오길.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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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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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꼬프 [개의 심장], [악마의 서사시]

 


 “차라리 나를 이 자리에서 쏴 죽여 줘. 그러나 단, 아무 신분증이라도 좋으니 하나만 만들어 줘. 그러면 네 손에 입이라도 맞추마.”

 - 악마의 서사시- 중, 298p


  미하일 불가꼬프의 책은 이번에 처음 접했다. -개의 심장-과 -악마의 서사시- 두 편, 20세기 냉전의 주인공이었던 ‘소련’ 한복판에 살았던 작가의 글이라니 더욱 관심이 생겼다. 마침 [카탈로니아 전기]나 [중국의 붉은 별] 등 르포들을 보며 내가 20세기 초에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새삼 깨닫고 있던 차였다. 게다가 공산 혁명 한복판에서 혁명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환상의 힘을 빌어 풀어 나가다니 기대를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죽 읽은 소설은 우리나라 70, 80년대 소설들을 연상시켰다. 분단이데올로기와 독재로 유발된 사회 모순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는 수많은 소설들. 최인훈의 [크리스마스 캐럴] 이나 남정현의 [허허선생] 시리즈,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등. 모두 뒤틀린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환상 기법을 차용한 소설들이다. 이 환상이 암시하는 대상과의 거리는 소설마다 제각각이다. 아주 적나라하게 비판 대상을 노출시키는 소설도 있는가 하면 중간에 렌즈를 끼워놓아 의도적으로 익명성을 만들어내는 소설들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건 환상이 이 소설들 속에서 날카로운 메스의 역할을 해냈다는 거다.

 

  불가꼬프의 두 소설은 한없이 적나라했다.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날선 갈고리들로 뒤덮어 풍자 대상을 한껏 찍어내는 식이랄까. 특히 첫 소설 [개의 심장]이 그러했다. 화상을 입고 죽어가던 떠돌이 개 샤릭은 인간의 뇌와 생식기를 이식받은 개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 결과는 그야말로 ‘재앙’ 그 자체. 샤릭은 개의 본능과 인간의 지식을 맞물려 더없이 추한 존재로 ‘변신’해 간다. 나는 소설을 읽기 전 막연히 ‘개인간’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리라 생각했다. 정작 책 표지를 펼치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용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불가꼬프는 이 소설을 통해 소련 공산 혁명에 대한 자신의 결론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샤릭이 개인간으로 거듭나는 실험 자체가 소련 혁명의 축소판이다. ‘인민을 위한’ 혁명이 그 누구보다도 브루주아적인 인텔리의 수술실 안에서, 무자비하고도 무책임하게 벌어졌다. 배곯고 무지한 인민은 그저 그 실험에 이용당한 것뿐이다. 그 결과 그가 설령 개일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인간에 가까운, 개인간이라 해도 말이다. 샤릭이 스스로 샤리꼬프라 명명하고 인간으로서 독립하려 할수록 그가 역겨운 존재라는 것만 두드러진다. 그의 무례하고 무절제한 행동때문에 이식수술과 실험을 한 의사의 집안은 난장판이 되고 만다. 이 개인간이 특히 밉살스러운 순간은 공산 혁명 이론에 대해 얻어들은 것을 주워섬길 때다. 무지와 폭력욕이 이론의 탈을 쓰고 불쑥불쑥 휘둘러진다. 이야말로 불가꼬프가 보는 소련 혁명의 실체인 것이다.


  이어지는 소설 [악마의 서사시]는 이 샤리꼬프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을 보여주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실직한 성냥관리 공무원이다. 소설은 주인공이 겪는 일을 순차적으로 보여주지만, 거기에는 어떤 맥락도 없다. 모든 사건들이 밑도 끝도 없이 정면충돌한다. 작가가 독자들을 위해 만드는 플롯이라는 게 없다. 이 사건들의 유일한 공통점이란 불가꼬프가 살던 소련 사회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 모음이라는 것이다. 마치 일간지 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모든 사건들을 한 사람에게 퍼부은 것만 같다.


  실제로 주인공은(즉 당시 소련을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은, 더 나아가 현대 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우리들도)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과 연루 되어 있는 게 맞을 것이다. 다만 자각하지 못할 뿐. [악마의 서사시]는 과감하게 그 모든 파편들을 의식 위로 끌어올렸다. 주인공은 모래폭풍에 휘말리듯 어처구니 없는 일에 계속 휘말린다. 이 모래폭풍은 가면 갈수록 거세어질뿐 절대로 누그러들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누구나 주인공처럼 외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뭐라도 좋으니 내 신분만 보장해줘.’ 감상 첫 부분에 인용해 놓은 문구다.


  100년 가까이 전 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날이 서 있는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건 진심으로 부러운 일이다. 책을 덮으며, 환상 역시 현실의 필요에서 온다는 사실을 곱씹었다. 이야말로 소설가만이 할 수 있는 문제제기 방법 아닌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작품류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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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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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의 -파과-

 


  하루하루 마모되어가는 여 킬러가 있다. 평생을 ‘현역’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늙음이란 곧 육체의 훼손이다. 그녀의 몸에 퍼진 자잘한 금과 녹은 이제 어떤 기름칠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크고 작은 부상이 늘고 실수를 연발한다. 닳고 깨어진 틈바구니마다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회한 때문에 그녀는 자꾸 멈춰 선다. 그녀는 고장 나고 있는 것이다. ‘그 고장을 고칠 수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뚜렷이 직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고장을 촉발하는 젊은 의사가 하나, 그녀의 변화를 용납할 수 없는 젊은 킬러가 하나 있다. 둘 다 아들 뻘 남자. 그녀에게는 자신이 젊은 의사에게 품은 감정도 젊은 킬러가 자신에게 품은 감정도 모두 영문 모를 것이다. 묵묵히 헤아리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다 알 수 없는 않는 감정. 문드러진 과일이 터져 흐르듯 늙은 육신에서 새어나오는 그 무언가. <파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즐거움을 주었다. 소설은 예상했던 것보다 성실했고 묵묵했다. 허세만 부리는 소설들은 꼭 다 읽어도 대체 내가 뭘 씹었나 감이 안 오곤 하는데 이 소설은 분명 질겅하니 씹히는 게 있었다. 일단 그것만으로 이 글을 읽은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펼치기 전 내가 ‘별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는 것’, 그리고 나름 맛있게 읽었는데도 '뒤끝맛이 아주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딱 잘라 말해 나는 구병모 작가의 문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언뜻 작가의 문장에 대한 칭찬을 보곤 했는데 내게는 이 문장이 도저히 미문(내지 장점)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이들에게는 개성적인 문장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특성을 보여주는 문장이 첫 장부터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작가가 만연체 덩어리를 툭툭 던질 때마다 흐름이 끊긴다. 이 문장 안에 정말 이 단어들이 다 필요한 걸까? 이런 문장이 나올 때마다 잔돌투성이 밥을 주걱째로 퍼먹는 기분이었다. 먹는 내내 내가 알아서 잔돌을 발라 뱉으며 먹어야 하니까.


 게다가 여주인공이 첫 등장하는 지하철 장면은 극히 지루하다. 지하철의 일상적인 모습도 모습이지만, 거기서 주인공을 도드라지게 하는 작가의 방식 자체가 평범하달까. 여주인공이 뭔가 독특한 사람이라는 건 충분히 알았으니 제발 다음으로 넘어가줬으면 싶어지는 구간이었다. 이후 여주인공 캐릭터가 의외로 실체감이 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첫 장에서 받은 나쁜 인상을 해소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장을 넘길수록 읽기는 편해졌다. 주인공의  ‘방역 활동’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부분부터는 흥미가 생겼다. 이 소설 특유의 설정 교차가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도 거기서부터다.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는 독특한 설정이 두 가지 마련되어 있다. 하나는 ‘흔해빠진’ 노파이자 킬러라는 직업 설정, 또 하나는 흔해빠진 ‘노파’이면서 젊은 남성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여자라는 설정이다. 여주인공은 두 설정이 만든 틈바구니에 끼인 채 멈춰 서 있다. 그녀의 시간은 ‘류가 죽은 시점’에서 정지해 버렸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게 된들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과연 입체감있는, 혹은 현실적인 노파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멈춰선 자의 심리' 표현은 인정할 만 하다.

 

  글에 있어 문장이란 가장 기본적인 요소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읽을 만 했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냥 호평으로 이 감상을 끝맺을 수 없다.
  문장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글을 평범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노년의 시각으로 본 세상 풍경’이다. 이 소설 주인공이 세상을 해석하는 시각은 너무나 평이하다. 굳이 그녀의 독특한 이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할 필요조차 없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만의 독특한 생각은 있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이 주인공에게서는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소소한 갈등을 빚는 에피소드들은 거의 성격이 비슷비슷하다. 이기적인 젊은이, 염치없는 중년, 지치고 구질구질한 노인. 주인공은 킬러로 살아온 세월이 무색하게도 세상을 보는 눈이 평범한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게다가 문제는 그 시선이 일반적인 노인의 것조차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다수익명의 인터넷 여론과 흡사하달까? 노인과 젊은이가 부딪는 걸 목격할 때마다 포털사이트 덧글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듯한 반응이 죽 나열되는데, 이때마다 글 텐션이 훅 떨어진다. 결국은 이 할머니도 그냥 늙어가는 게 억울한 많은 노인들 중 하나인건가, 싶어 실망감도 들었다. 

 

  이런 두어 가지 문제 때문에 나는 끝내 이 소설이 아쉬웠다. 간만에 좀 색다른 인물 관계가 부각된 소설이 나왔는데도 말이다. 자신도 형체를 뚜렷이 말할 수 없는 집착이 동인이 되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주인공이라니 좋지 않은가. 제 늙은 가슴 속에 아직 말랑하게 흐르는 연심을 직시한다는 것도 흥미롭고. ‘늙음’을 담담하게 바라보고자 한 노력은 일단 끝까지 일관되었으니 그것만으로 값어치가 있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요소를 질겅질겅 씹다가도 자꾸 잔돌이 탁탁 걸리니. 아. 역시 내게는 맛있되 아쉬운 글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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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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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

 - 슈테판 츠바이크 / 남기철 / 이숲에올빼미 / 2011.11.01




  - 이제는 우리의 삶을 부정할 필요가 없어졌잖아. 우리는 우리가 파괴할 자격이 없는 어떤 것을 파괴하려고 했던 거야. … 한 줌의 돈만 있으면 내 안에서 아직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들을 밖으로 펼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실현될 수 없는, 내가 지금 꺾어버린 이 나뭇가지처럼 시들어가고 있는, 단지 꺾어버렸기 때문에 시들어가고 있는 것들 말이야. 내 안에서 더 자랄 수도 있는 어떤 것들…… 

 -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 – 425~426p



  전쟁이 오스트리아를 덮쳤다. 음식도 돈도 한줄기 미소도, 모든 것이 모자라 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영영 지워지지 않는 그늘이 드리웠다. 숨 막히는 전시 사회, 뼛골까지 삭은 채 시골 우체국에서 시들어가던 여자가 있다. 육 년 동안이나 전쟁터를 떠돌았으나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 남자가 있다. 둘은 대화를 섞자마자 서로가 무엇에 분노하는지, 무엇을 박탈당했는지 이해한다. 출구 없는 세계, 계속 그들을 메마르게 하는 가난, 앙상한 두 손 쥔 채 분노에 떨다 죽어야 한다는 무력감, 서로 묶여 있는 굴레가 같다는 걸 안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리고 마침내 위로할 힘마저 고갈된 그들이 자살을 결심했을 때 마지막으로 남자가 제안한다. 여자가 관리하고 있는 돈으로 그들이 박탈당한 것을 되찾지 않겠냐고. 남자가 횡령을 제의하고 여자가 동의하는 그 순간, 이야기가 멈춘다. 원고가 끝나 버렸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는 두말할 것 없이 미완의 작품이다. 소설은 두 남녀가 마침내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 아무 예고 없이 단절된다. 내용 역시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지 못한 채 불균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는 보잘것없는 우체국 직원 크리스티네가 뜻밖의 호화 호텔 휴가를 누리며 겪게 되는 변신과 몰락을 절반 넘게 다룬다. 딱 일주일, 크리스티네의 단 꿈이 이어진 것은 그녀 인생 28년 중 일주일 뿐이었다. 그동안 여자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천국의 문 안에 들어선다. 너무도 쉽게, 옷 한 벌을 갈아입은 것만으로. 스위스 호텔에서의 여름은 아름다웠다. 원할 때면 언제든 쏟아지는 고급 의상과 장신구, 풍족한 식사와 신사들의 관심. 그곳에서 무책임하고 갑작스럽게 쫓겨났을 때 여자는 처음으로 자신이 전쟁 때문에 무엇을 빼앗겼는지 자각한다.

  독자들은 이 소설의 제목을 보고 흔히 이 호텔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끝날 거로 생각할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특기, 풍부하면서도 입체적이고 드라마틱한 인물 심리 묘사는 이 소설에서도 매 페이지마다 살아있다. 즉 크리스티네의 폭발적 상승과 하락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인 소설이 완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려한 호텔 생활 뒤로, 작가는 다시 길게 크리스티네의 절망을 그린다. 

  그녀는 자신에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들, 그것들과 자신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에 분노한다. 그 영원히 마르지 않는 황금 분수는 터무니없는 공상에 불과한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허름한 우체국 사무실 벽을 원망하게 되는 것은 그녀의 잘못일까? 그저 허영심이라는 열기에 애꿎은 가슴을 태우는 것은 가련한 우체국 직원의 착오일 뿐일까?

  그런 그녀 앞에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열아홉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 인생의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시절을 전쟁에 상납했다. 그 보상으로 그가 받은 것은 국적마저 불명확한 비정규직 인생. 육 년 동안 어린 시절의 꿈도, 생계 유지 수단도 잃은 그에게 남은 건 분노와 수치심뿐이다. 소설 후반부 절반은 그들이 가까워지는 과정과 그에 따른 관계 진전을 메인 스토리로 끌고 간다. 가난한 두 연인의 보잘것없는 연애사이니만큼, 앞쪽의 바쿠스 연회장을 연상시키는 부분과는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변화는 이야기 방식에서 발견된다. 앞 전반부에서 작가는 크리스티네의 스팩터클한 변신을 카메라에 담듯 묘사했고, 크리스티네의 심리 여과 없이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주로 남주인공 페르디난트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즉 페르디난트의 긴 연설, 한탄, 분노에 넘치는 웅변으로 주제 '전쟁에 의해 영영 박탈당한 세대의 괴로움'이 전달되는 것이다. 


  - 아니야. 프란츠. 내가 자네를 비난하는 게 아니야. 자네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알고 있어. –중략- 자네가 선량한 친구라는 것을 잘 알아.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잘못된 점이자 어리석었던 점이야. 우리는 너무 착하고, 의심할 줄도 몰랐어. 그래서 우리는 이용만 당했지.

    하지만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앞으로 절대 안 속을 거야. 내가 아직 사지가 멀쩡하고 목발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으니 행복한 것 아니냐는 따위의 이야기에 설득당하지도 않을 거야. 숨 쉴 수 있고 먹을거리 있으면 충분하지 않으냐는 이야기, 그 정도면 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에 설득 당하지도 않을 거야.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신도, 국가도, 삶의 의미라는 것도 믿지 않아. 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생존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을 거야. 그런 권리를 찾지 못하는 한, 세상이 내 인생을 빼앗아 갔고 나를 속였다고 생각할 거야.

   - 본문 318p


  페르디난트의 감정상태에 대한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는 크리스티네의 섬세한 감정 묘사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야기 전달 방식이 페르디난트라는 한 인물의 등장으로 확 바뀌어버리는 것은 완성도 측면에서 볼 때 그리 매끄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크리스티네는 ‘특유의 내성적이고 의존적인 성격 탓인지’ 분명 페르디난트의 말에 동의하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저 공감을 감정적으로 표현하고 그를 감싸줄 뿐이다. 중반까지 휘몰아치는 감정의 파고를 드러내며 더없이 매력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춤추던 크리스티네의 존재감이 확 줄어들어 버리는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이 균형감을 갖추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면 크리스티네의 호텔 유희 부분이 한층 줄어들거나 페르디난트의 등장이 훨씬 빨랐어야 했다.

  또한, 주제 심화 차원에서도 이러한 페르디난트의 난입은 문제를 노출한다. 전쟁에 직접 참가해서 손가락 불구까지 된 페르디난트의 문제의식과 후방에서 가난에 찌든 나날을 보내다 한 차례 화려한 휴가로 충격을 받은 크리스티네의 그것은 절대 같은 층위일 수는 없다. 물론 그 둘을 가두고 있는 거대한 굴레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둘은 ‘이 모든 것이 전쟁 때문이며, 그들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것 또한 전쟁뿐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 둘의 분노가 과연 같은 종류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당장 둘은 상황의 급박함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게다가 페르디난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사회상과 크리스티네가 바라는 회복된 삶의 질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앞쪽에서 섬세하게 묘사되었던 크리스티네가 이런 차이를 무시한 채 덮어놓고 그와 나는 같다고 공감을 표하는 것은 그다지 그녀답지 않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주제 ‘전쟁 이후 피폐해진 젊은이들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성급한 진행인 듯 보인다. 


  이러한 여러 가지 불완전한 요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는 독자를 도취경으로 이끄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읽는 이의 심장을 움켜쥐고 깊이 끌어당기는 힘이 소설 전체에 작용한다. 아무 전조도 없이, 그것도 가장 중요한 순간 이야기가 끊겼는데도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의 상은 흔들리지 않는다. 

  인생의 매 중요한 순간마다 그 순간이 지나갈 때까지 성공 여부는 아무도 얼 수 없지 않은가. 뜨겁게 고민하느라 차갑게 식어가던 두 남녀가 성공할지 안 할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이 총 대신 강탈을 선택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 순간이 그들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다. 그들이 횡령 계획을 진행하든 하지 않든, 모든 일이 잘 풀려 그들이 오래 함께 하든 금방 헤어지든, 성공하든 하지 못하든 그런 차이는 궁극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페르디난트가 짠 장문의 계획서대로 모든 것은 장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구성도 불안정하고 줄거리도 끊긴 소설을 끌고 가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모든 글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발산하기 위한 무대 장치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아주 훌륭한 확성기다. 그는 페르디난트의 입을 통해 직접 전후 오스트리아 사회의 모순과 도태를 고발한다. 크리스티네와 그녀를 둘러싼 호텔 인물스케치를 통해 제 욕망을 상류층의 나태한 양상을 그린 것은 훗날 페르디난트의 비난 실례가 된다. 작가는 실로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 한 쌍을 통해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전체를 상대로 화풀이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화풀이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인물들의 생생함이라는 것이다. 그는 제 매력적인 문투로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의 어조와 행동을 끌어낸다. 그의 묘사로 태어난 인물들은 도자기 사이에서 홀로 피부와 뼈와 피를 나눈 자들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작가는 인물들의 성격과 생각의 변화, 대화의 혼선을 다른 이의 눈과 귀에 확고하게 박아 넣는다. 그는 뻔하고 천박한 욕심들을 단순히 더러운 것 이상으로 채색해낸다. 크리스티네의 허영심도, 페르디난트의 엉뚱한 분노도, 싸구려 호텔에서의 역겹고 초라한 하룻밤마저도 말이다. 그것이 몇 세기 전 섬나라의 실존 여왕이건 가상 설정 속 시골 우체국 여직원이건 츠바이크의 문장을 타고나면 둘 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어느 장르에서건 제 글 속 인물의 심리를 마음껏 펼쳐 보인다. 그의 글에서 긴장감은 인물이 '비밀'을 숨김으로써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모조리, 마음의 흐름까지 그대로 보여주면서 긴장감이 올라간다. 책을 덮고 나면 독자는 나비의 날갯짓을 쫓다 정신 차려보니 화단 한가운데까지 침범한 아이 꼴이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야말로 모든 이야기의 핵심이며 '인간의 감정'만으로 가장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조건에 충실함으로써 츠바이크 소설은 공고한 세계를 구축해 낸다. 자살이나 절도 외에는 '미래'를 얻을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빠른 파멸이냐 조금 더 돌아가는 길이냐 선택의 기로에 선 남녀를 보여준 채 소설은 끝난다. 횡령은 영원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 채' 남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츠바이크의 인물의 생생함은 독자들로 하여금 책장 바깥에서 어른거리는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실재하지 않으나 우리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의 뒷모습을 쫓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잘 쓰인 소설의 마력 아닐까. 이런 마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비록 미완성 작품이라 할지라도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여자가 남자의 시선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을 내밀며 대답한다. - 좋아, 한 번 해보자. 

      - 본문 461p


  결국, 그들은 어떻게 될까? 몇만 프랑을 얻는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중요한 건 그들이 박탈당했다고 믿는 것이 정말 그들이 박탈당한 것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전쟁을 통해 정말 박탈당한 것은 무엇을 박탈당했는지 확인할 능력이다. 그들은 외면에 익숙해지고 핍박에 수치심을 자극당하느라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열병에 걸린 나머지 환상 속 우물을 향해 고개를 처박는 환자들이나 매한가지 상태다. 크리스티네가 전쟁을 통해 잃은 건 안정감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서민의 일상이다. 스위스 호화 호텔에서의 환락의 밤이 그녀가 박탈당해 못 견딜 것은 아니다. 페르디난트는 너무 모멸을 많이 겪은 나머지 화를 내야 할 상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의 예민한 정신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찔러댄 수치심을 가라앉히지 못해 항상 과민상태에 빠져 있다. 그들은 몇만 프랑을 횡령해서 자신들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무엇을 해야 이 끔찍한 예속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모른다. 이 소설의 '열린 결말'이 한없이 씁쓸한 것은 결국 남녀주인공들이 또 다른 수렁으로의 길을 재촉했다는 것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은 어디까지 변신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세계에 사는 독자 나는,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의 탈을 쓴 작가의 열변에 손을 꾹 쥐며 공감한 나는 어디까지 도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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