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는 내린 눈이 사람들 발길에 짓밟히는 모습을 진정으로 보기 힘들어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눈을 확인하는 일이 이모 인생에 닥쳐온 최고의 고통인 것처럼 굴었다. 나는 축축하게 젖어오는 이모의 뜨거운 손을 잡고 어두운 거리를 달렸다. 달리는 우리두 사람의 머리 위로 눈은 점점 푸지게 쏟아지고 있었다.

참 이상한 밤이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내내 그 밤이 이상했고 이모가 이상했다. 그래서 마음자리가 오래 뒤숭숭했다.
그 밤, 첫눈은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채워줄만큼 많이 내렸다. 폭설은 아니었지만 다음날까지 세상의 모든 지붕 위에 소복이 쌓인 흰 눈을 즐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모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던 그 시각에는 별로 감동적인 적설량은 아니었다.
쌓이는 눈을 볼 수 있는 곳, 누구에게도 짓밟히지 않고 고스란히 추운 땅을 덮고 있는 흰 눈을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호흡이 가빠서 주저앉을 지경이 되어서야 이모와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이번에도 내가 그 사실을 이모에게 일러주었다. 여기는 서울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다는 강남의 번화가이고, 뒷골목까지 촘촘하게 모여있는 술집과 음식점과 노래방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첫눈 때문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달리는 틈틈이 이모를 설득했다. 좀처럼 내 말을 믿으려

들지 않던 이모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달리기를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이젠 됐어. 그만 돌아가자. 난 택시를 타면 돼. 나부터 갈게"
이모는 그럴 수 없이 침착했다. 여태까지 한 짓은 모두 그냥 해본 장난이었다는 듯이. 실제로 택시를 타고 떠나면서 이모가 남긴 작별의 인사가 그랬다.

"모처럼 신나게 잘 놀았다. 진진아, 주책없는 늙은 이모하고 놀아줘서 고맙다. 안녕!"
첫눈 내리는 거리에 남겨진 나는 얼마나 황당했던지. 이모는 진짜 나와 신나게 놀고 싶어했는데 혼자 여러 가지를 유추하고 분석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게 여겨지던지. 그래도 여전히 장난이 아니라고 우기는 내 속마음은 또 얼마나 강렬했던지.

이모와 헤어져 집에 돌아오니 김장우에게 두 번, 나영규에게 한번, 그렇게 세 통의 전화 메모가 있었지만 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나영규에게 전화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김장우에게 하기에는 내 감정이 영 복잡했다. 
그에게 전화를 하면 이모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모와 함께 첫눈 오는 거리를 달리다가 왔는데 아직도 해괴한 기분이라고, 이모한테 내가 홀린 것 같다고, 그런 이야기를 그에게 하고야 말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내가 여태도 고백을 하지 않았기에 김장우에게 내 어머니는 이

한 일은 이모가 추천한, 아니 이모를 사로잡은 노래, ‘헤어진 다음날‘을 반복해서 듣는 것이었다. 얼마나 되풀이 그 노래를 들었던가. 마침내 나는 가사집을 보지 않고도 노래를 따라 부를 수가있게 되었다.

그대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혹시 후회하고 있진 않나요. 다른 만남을 준비하나요.
사랑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가봐요.
그대 떠난 오늘 하루가 견딜 수 없이 길어요.
어제 아침엔 이렇지 않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오늘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어요.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가져갈 수는 없나요.
그대 떠난 오늘 하루가 견딜 수 없이 길어요.
날 사랑했나요.
그것만이라도 내게 말해줘요.
날 떠나가나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나영규와 헤어진 다음날 내 기분은 어떤 것일까.
나와 헤어진 다음날 나영규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방바닥에 턱을 괴고 엎드려 그 슬픈 노래를 듣고 또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노래는 나의 노래가 아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되고 있었다.

진진아
지난 며칠간 너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또 했는지, 정작 지금 편지를 쓰는 순간에는 너무 지쳐서 준비했던 그 많은 말들을 떠올릴 힘이 나지 않는다.
이 편지를 너한테 보내야 한다는 결심은 아주 쉽게 했었어. 너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에 없었어. 너라면 내가 다하지 못하고 가는 내 삶에 대한 변명을 마저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지. 너라면 나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어.

이제 끝내려고 해. 그동안 너무 힘들었거든.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참 할 말이 없구나. 그것이 나의 불행인가봐. 나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 힘들었던 내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말야.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그래서 그만 끝낼까 해.

나는 늘 지루했어. 너희 엄마는 평생이 바빴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돈도 벌어야 하고, 무능한 남편과 싸움도 해야하고, 말 안듣고 내빼는 자식들 찾아다니며 두들겨 패기도 해야 했고, 언제나 바람이 씽씽 일도록 바쁘게 살아야 했지. 그런 언니가 얼마나 부

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 무덤 속처럼 평온하게 말고,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 사는 것처럼 한번 살아보는 상상도 적잖이 해보았지.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튼튼한 성곽에 갇혀 있었고, 성곽을 부수자니 마음을 다칠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

나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나 때문에 그러는 것, 나는 정말 못견디겠더라.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묵묵히 사는 길도 있는데, 난 그것도 안 돼. 정말 안 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진진아
나, 여기서 그만 이 생을 끝내기로 했다.

죽는 일보다 사는 일이 훨씬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거든. 나는 용기가 없어서, 너무나 바보 같아서, 여러 사람이 크게 다치는 대형사고를 만나면 절대 생존자 명단에는 오르지 못할 위인이라는 것 잘 알아. 그러니 이 죽음도 뜻밖에 만난 하나의 사고라 여기자진진아
사고 뒤처리를 너한테 맡기고 가는 이모를 제발 용서해주길.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시간이면 나는 아마 떠났을 거야. 그때 나한테 와줘. 와서 나를 수습해줘. 이모부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시간은 그 이후일 거야. 숫자에 약한 내가 거듭거듭 시간을 계산하고 우체국에 가서도 물어보고 했으니 설마 틀리지 않겠지. 진실로,
이 마지막 일에는 실수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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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지적이 지금의 주리처럼 나쁜 결과에 대한 동기로 설명되는 일은 적절치 못한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주리에게 한번쯤은 내 아버지를 설명할 수도 있겠다고. 어쨌거나 내가 좋아하는 이모의 착한 딸이었다. 나는 계속 노력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어.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우리들 머릿속을 오고 가는 생각,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무엇으로 살았다는 증거를 삼을 수 있을까. 우리들 삶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것이 아버지가 가르쳐준 중요한 진리였어. 아버지가 잘못한 게 있다면 너무 많이 생각했다는 것이지. 자기 용량을 초과해버린 거야. 그러면 곤란하다는 것도 우리 아버지가 내게 남긴 교훈이고.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이 한평생 살고도 못 가르쳐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어. 그것으로 이미 우리 아버지는 자식한테 해줘야 할 의무를 다했다고 봐."
주리는 조용했다. 

술꾼이고 건달이며 성격파탄자인 아버지를 너는 정말 용서했니, 라고 그 침묵이 묻고 있었다. 나는 기꺼이 주리의 침묵에 대답했다.
"아버지는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어. 난 아버지를 사랑해."
"너희 아버진"

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처음으로 나, 안진진의 사랑을 상면한 이후 내 기분은 급격히 저조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나는 다만 이것이 사랑인가 하고 사랑을 묻다가 이것이 사랑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답했을 뿐이었다.

오직 그것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가라앉기만 했다. 걸음은 자꾸 허방을 디뎠고, 눈길은 쓸쓸하게 텅 빈 허공을 헤매었다. 마음자리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생겨서 거기로 가을 찬바람이 쉭쉭 드나들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누구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사랑을 만난 다음이 이렇다는 고백을 나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자매에게서 물려받은 기질로 잡다한 책들을 제법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영화광은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도 많이 보았는데, 그렇다면 모든 책과 영화들이 나를 속인 것이었을까. 사랑을 맞은 후의 느낌이 이토록 황폐한 것임에도

그가 물었다. 편안한 음성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꾼. 아, 지독한 술꾼."
김장우가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으며 한탄했다.
"왜 그랬어?"
"뭘요?"
필름이 끊겼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나는 조심스레 되묻는다. 내가 또 무슨 짓을 했는가.
"저 아래 나이트클럽에서 말야. 안진진이 날 때렸어. 기억 나?

내 뺨을 치고 내 등을 마구 두들겨 팼지. 날 가두지 말라고, 무섭다고 그랬어 마구 큰소리로 외쳤어. 가두면 죽이겠다고까지 그랬지. 내가 안진진을 그렇게 괴롭혔나 생각하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한번 물어보자. 안진진한테 나는 감옥이니?"

감옥 간수? 내가 그랬다고?
아, 나는 전율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대사였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난동을 부리던 그날 밤, 아버지가 말했었다. 당신은 나를 가두는 간수 같았어, 당신은 몰라, 그 절망이 얼마나 무서웠는지…………내 속에 아버지가 있었다. 행방불명인 아버지가 내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이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나는 더욱 더 김장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를 안고 있는 김장우의 팔에도 더욱 힘이 가해졌다.

"대답해봐. 나, 너한테 감옥이 될 것 같아?"
"아니요. 절대로 아니에요. 내 말은, 그 말의 뜻은, 장우씨를 너

무 사랑하게 될까봐 무섭다는 뜻이었어요. 정말이에요. 진심이에요."
"정말?"
"그래요. 어제 처음으로 확실히 알았거든요. 내가 지금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래서 감당하기가 어려웠어요. 사랑은 힘이 들어요."
그에게 거듭거듭 다짐했던 대로 내가 그에게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술이 깬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하는 말들이 모두 다 진실이었듯이.

나는 그날 아침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어머니를 사랑했으므로 나와 진모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또한 절대적이었을 것임을. 우리 모두를 한없이 사랑했으므로, 그러므로 내 아버지는 세 겹의 쇠창살문에 갇힌 것이었다. 아버지가 탈출을 꿈꾸며 길고 긴 투쟁을 벌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이란,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거리에서나, 비어있는 모든 전화기 앞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전화의 구속은 점령군의 그것보다 훨씬 집요하다.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란 단 두 가지 종류로 간단히 나눌 수 있다. 전화벨이 울리면 그 혹은 그녀일것 같고, 오래도록 전화벨이 울리지 않으면 고장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란,
버스에서나 거리에서 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유행가의 가사에 시도 때도 없이 매료당하는 것이다. 특히 슬픈 유행가는 어김없이 사랑하는 마음에 감동의 무늬를 만든다. 사랑하는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혹은 무의식적으로든 이별을, 그것도 아주 슬픈 이별을 동경한다. 슬픈 사랑의 노래들 중에 명작이 많은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유행가는 차마 이별하지는 못하지만 이별을 꿈꾸는 모든 연인들을 위해 수도 없는 이별을 대신해 준다.
유행가는 한때 유행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시작한사람들에게 대물림되는 우리의 유산이다.

사랑이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고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생애 처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의 눈과 코와 입을 그윽하게 들여다보는 나. 
한없이 들여다보는 나.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해준 그가 고맙다고 사랑하지 않고 스쳐 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예고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며칠 동안 사랑에 집착했다. 그리고 확인했다. 전화에 자유롭지 못한 나, 유행에 민감한 나, 거울 속의 내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는 나…………….
모든 것이 다 사랑이었다. 위험과 안전을 동시에 예고하는 붉은신호등의 사랑이 맞았다. 나는 김장우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약간의 무리를 감수한다면 사랑에 관한 앞서의 세 가지 메모는 나영규에게도 유효한 것이었다.
약간의 무리라는 것도 생각해보면 시간의 필요일 뿐 운명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김장우와의 사랑을 확인했던 시간만큼나영규와의 사랑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찰했다.

우선 전화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나영규의 경우에 있어서도 거의 의심할 바가 없었다. 유리 천장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던 그날 밤 이후에도 우리의 관계는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물론 사랑 혹은 결혼을 향한 발전이었고 그 모든 것이 다 전화의 공로였다.
정식으로 청혼을 했고 빠른 시간 내에 나의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는 부담감 때문에 솔직히 나는 나영규와의 만남을 의식적으로 피해 왔었다. 만날 때마다 나영규는 어김없이 숙제에 관해 질

문했다.
"이제 대답해줄 수 있지요? 어서요. 진진씨, 어서 대답해봐요.
나는 들을 준비가 다 되었어요."
그러나 나는 답변이 준비되지 않았다. 내가 나영규와 아주 많이 다른 점은 매사에 준비가 느리다는 점일 것이었다. 나는 처음 말했던 대로 계속해서 ‘3개월론‘을 밀고 나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석 달만 기다려줘요. 나는 많이 느려요. 영규씨보다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채근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영규는 더 이상 나를 재촉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는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인 상상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모든 여자들이 결혼을 결심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평균적으로 3개월은 걸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3개월이라는 시간이 평균적이든 아니든 나또한 그 이상 끌 생각은 없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명료해지리라.
이미 아주 많은 부분이 명료해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벌써 두달이 지난 지금, 나는 내가 나영규에게 해야 할 대답이 무엇인지 윤곽은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깊은 밤, 나영규와 전화를 하고 있으면 문득 이 남자와도 사랑을 하고 있다는 의혹이 나를 사로잡곤 했다. 나영규와는 만나서보다 전화로 대화를 나눌 때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를 하면 나도 아주 많은 이야기를 스스럼 없

이 할 수가 있었다. 전화선 저쪽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음성은 다정했고 섬세했다. 나는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하염없이 그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럴 때면 이 남자와 결혼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그는 늦은 저녁에 자주 전화를 했고, 나는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할까봐 화장실에 갈 때도 전화기를 들고 갔다. 만나자는 그의 요구는 적극 피했지만 전화가 올까봐 퇴근 후에는 집 앞 가게로의 짧은 외출을 삼가는 일도 있었다. 이것도 혹시 사랑일까......

유행에 민감해진다는 두 번째 메모도 나영규에게 아주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유행가의 경우에는 오히려 나영규에게 유리한 것인지도 몰랐다. 슬픈 사랑의 노래를 들을 때, 나는 늘 나영규를 떠올리곤 했다. 내가 그를 버린 다음, 그가 저 노래를 들으면 어떤 심정일까.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영규의 마음을 찌를 저 노래. 나는 나영규의 마음이 되어 슬픈 노래를 듣는 일이 많았다. 이것도 사랑일지 몰랐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는 사랑에 관한 세번째 메모는 확실히 김장우보다 나영규를 생각할 때 훨씬 더 경이로웠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심이었다. 언젠가 말한 대로 나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오직 결혼적령기에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미덕인 인간이었다. 거리에서 만인의시선을 받을 만한 미모도, 뭇 남성들의 표적이 될 만한 자랑스러운 배경도 전혀 없다. 그것이 부끄럽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

그것 때문에 사실 나는 상당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내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겠다는 지난봄의 그 부르짖음이,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온 힘을 다해 탐구하는 것이라던그 봄날 아침의 다짐이 무위로 그치고야 말리라는 공포도 느꼈다.
나는 정녕 그날의 다짐을 성취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스물다섯 이전의 졸렬했던 내 인생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부터라도 주어진 내 삶에 전력투구하고 싶다는 그 가상한 각오가 이렇게 무너지는가. 나에게 있어서 결혼은 전력투구할 내 삶의 중대한 출발점이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가질 수 있는 여러가지 결단 중에서 나는 결혼을 선택한 것이었다.

내가 결혼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제발 부탁이니, 누구도 비난하지 말기를 바란다. 여자 나이 스물다섯에 할 수 있는 결단이 꼭 결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나처럼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결혼 대신 공부를 택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 대신 자기만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으며, 결혼을 비웃으며 결혼할 나이에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는 여자도 분명 있다. 
나라고 해서 그 모든 길들에 대해 충분히 사색하지 않았겠는가. 이미 섭렵은 끝났다. 사색이 깊은 나머지 인생 자체가 졸렬해지고 말았다면, 이젠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나를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특별하고

한적한 오솔길을 찾는 대신 많은 인생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택하기로 했다. 삶의 비밀은 그 보편적인 길에 더 많이 묻혀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라는 명제 앞에서, 사랑이라는 난해한 감정 앞에서 거듭 혼돈을 되풀이하고 있었으니 괴로웠던 것은사실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마침내 중요한 단서 하나를 찾아내었다. 김장우와 나영규에게로 향하는 화살표의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 변별해낼 수 있는 하나의 단서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유사사랑인지 알 수 있는 하나의 단서 미리 말하지만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하는 특별사유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다 통용되는 앞서의 세 가지 사랑 메모와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사랑을 가려냈다.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나는 나영규 앞에서 솔직했다. 동시에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그 외 모든 정황은 있는 그대로 털어

놓았다. 나영규는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을 가감 없이 알고 있다. 나는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는 데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김장우한테는 그한테는 달랐다. 이모를 어머니라고 속인 것은 우연의 장난이었다 하더라도 김장우에게 내 아버지를, 내 어머니를, 내 남동생을 말하는 일은 고통이었다. 

현실 속에서 늘 우울한 김장우에게 나는 진정 보다 밝은 나, 보다 활기찬 나, 보다 어여쁜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이모를 어머니라고 믿으며 행복해 하는 그에게 양말을 팔았고 지금은 김치를 팔고 있는 어머니를 고백할 수 없었다. 지금 그가 품고 있는 나에 대한 사랑의 부피가 감소될 어떤 말도 절대 하고 싶지 않다. 그에게 감추었던 일들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 사랑이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은 결코 아니다. 김장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사랑의 유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이 욕망을 멈출 수가 없다. 이것이 사랑이다. 

김장우와 함께 떠났던 서해바다에서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그장렬한 비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누추한 나는 너무나 부끄러운 존재였다. 부끄러움을 누더기처럼 걸치고 그토록이나 오래 기다려온 사랑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지 않다. 저 바다가 푸른 눈 뜨고 지켜보는 앞에서는 더욱.
사랑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자에게는 스스럼없이 누추한 현실

을 보일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그일이 쉽지 않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이었다.

내가 두 사람 앞에서 판이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이유가 이것으로 설명되었다. 나는 김장우를 사랑하고 있다. 나영규에게는 사랑과 유사한 감정의 의사 사랑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일은 나영규에게 이 사실을 통고하는 일뿐이다. 내가 그에게 약속한  3개월의 유예기간도 서서히 다하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해야 되는 것인지 아직 나는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지금도, 이런 나를 사랑해준 나영규가 진실로 고맙다………….

"니네 엄마한테는 내가 첫눈 보자고 너 불러냈다는 말일랑 아예 말아라."
문득 이모가 내게 다짐을 했다. 이모도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추운 겨울을 지내야 할 진모를 생각해봐. 첫눈 오면 겨울인데, 내가 나빠. 난 정말 나쁜 이모야. 이러면 안 되는데......."
이모의 얼굴은 미안함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모는 그런 사람이었다. 미안하면 금방 얼굴이 붉어지고, 슬프면 금방 눈물이 고이는 사람. 이모에게는 모든 감정이 다 진실이었다.
"괜찮아, 이모, 진모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은 엄마가 모두 손을 써놓았어요. 우리 엄마, 세상일에 대해선 나보다 훨씬 유능하다고. 그런 점에서 나는 아주 바보거든."

"그래, 넌 좀 바보야. 날 닮았어......."
이모는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내 손을 꽉 쥐었다.

나는 이모를 많이 닮았지만 그러나 이모의 딸은 아니었다. 내가 이모의 딸로 태어났다면 나도 주리처럼 답답하고 재미없는 인간으로 성장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세상의 숨겨진 진실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

회사의 부장 한사람이 중증의 당뇨병 진단을 받고 나서 사흘을 울었다고 고백했다. 체구도 크고 평소 성격도 괄괄한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당장 위중한 병도 아니고, 병원에서 정해주는 식단표대로 먹으며 평소처럼 살면 되는 일인데왜 그러는지 처음에는 몰랐다.

"자네들은 몰라. 이젠 맛있다고 배부르게 밥 먹는 재미가 없어졌어. 밥 한 공기 이상 먹으면 죽을 줄 알래. 그뿐인 줄 알아? 퇴근후 술 한잔 하는 맛으로 사는 나 같은 사람보고 술 담배 안 끊으려면 병원에 오지도 말래는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젓갈이나 장아찌 같은 것인데 그것도 절대 안 된대요. 그것 말고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지, 이제 세상 사는 재미 다 끝났구나 싶으니 어찌나 절망적이던지. 이러구러 살다보면 또 익숙해지겠지만, 온갖 음식 다 먹다가 이제 와서 그렇게 살라면 어떡하냐구. 처음부터 아예 그런 음식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혹 견디기 쉬울는지 몰라도…………."
거구의 중년사내를 사흘 울린 식이요법,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주리에게는 처음부터 절망 따윈 없었을 수도 있었다. 젓갈이나 장아찌로 비유할 수 있는, 삶의 다른 방법들을 주리는 애시당초 알지 못한 채 성장했다. 세상이 그 애를 단련시킬 수도 있었겠으나 이모와 이모부의 성실한 방어로 그런 기회들은 철저히 원천봉쇄되었다.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이모와 내가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첫눈이 올지도 모를 저녁의 식사 메뉴는 해물 스파게티였다. 발제자는 이모였고 나는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닥쳤을 때는 누구 한 사람의 강렬한 주장만큼 고마운 일도 없는 법이었다.
"난 말야, 로마에서 먹었던 새콤하고 달콤했던 스파게티 맛을잊을 수가 없단다. 서울에서는 어디서도 그런 맛을 만날 수 없어서 내가 직접 만들어보기도 여러 번 했는데 늘 실패였지. 오늘 다시 로마의 추억에 도전해보는 것이 어떨까?"
그래서 나 안진진까지 덩달아 언제 갈지 모를 로마를 꿈꾸며 멋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로마의 이모부는 어땠어요? 이모는 보나마나 오드리 헵번처럼 굴었을 것이고."
"이모부?"
갑자기 이모부는 왜냐고 눈을 크게 뜨는 이모.
"아니, 이모부랑 같이 간 것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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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다양한 논의들이 있지만, 어떤 결론에 이르든 간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사람은 왕처럼 살고 어떤 사람은 돈 3만원이 없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어렵게 사는 것은 정의라고 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자유를 어떻게 배분해야 정의로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직장에서나 일상에서 조그마한 이익도 막상 분배하려면 각자 입장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에 쉽지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다만,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생각해보는 것은 좀더 쉬울 것 같습니다. 
저는 횡단보도가 참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보행자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면 큰 버스나 10톤 트럭을 비롯한 모든 차들이 일제히 멈추어 섭니다. 쌩쌩 달리던 그 모든 자동차들을 힘으로 다 멈추어 세우려면 얼마나 큰 물리력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법은 그 일을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해냅니다. 신호등만 바뀌면 강자인 차들 앞을 약자인 보행자들이 유유히 평화롭게 이야기도 나누고 손도 잡으면서 건너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고 횡단보도가 보행자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보행자들이 초록불일 때 횡단보도로 다닐 수있도록 함으로써 나머지 더 긴 시간과 더 넓은 공간에서는 자동차들이 마음껏 달릴 수 있습니다. 운전자와 보행자가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운전자

가 되고, 누구나 차를 놓고 걸어 다닐 때는 보행자가 됩니다. 그러니 대체로 횡단보도 시스템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습니다.

저는 이런 횡단보도에서 강자와 약자, 다수와 소수가 공존할수 있는, 그래서 정의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봅니다. 강자나 다수의 전반적인 우위를 인정하되 약자나 소수도 숨을 쉬고 다닐 수 있는 길을 터주고 

강자와 약자가 언제든 입장이 바뀔 수 있는 순환구조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굳이 논리적으로 해부하자면 
하나는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으로 다닐 수있도록 횡단보도를 깔아주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운전자와 보행자가 순환할 수 있도록 순환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주 잘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공허한 이상론보다 강자의 리그를 인정해 주면서 약자의 최소한을 높여가는 방법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횡단보도를 늘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호화롭게 살지는 못해도 누구나 
적어도 사는 듯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을 구상한 것은 2021년 「알쓸범잡」 방송에 출연한 직후부터였고, 그때부터 2024년 초까지 법무부에서 3년 남짓 일하면서 틈틈이 이 책에 관한 생각을 가다듬고 또 글로 정리했습니다. 

그러다 2024년 2월에 저는 공직을 떠났습니다. 세어보니 만 23년간 공직에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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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음식을 주지 않고 방치해 존속살해죄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은 사건입니다. 그의 아버지가뇌출혈로 쓰러져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코에 끼워진 호스로 음식을 계속 주입해주고, 대소변도 치워주고, 욕창이 생기지 않게 2시간마다 체위도 바꿔주는 간병인이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김씨는 시급 7천원 받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뿐 다른 재산이 없었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고모들은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김씨의 호주머니는 금세 비어갔고 월세 30만원을 여러번 연체했으며 휴대전화와 도시가스도 끊겼습니다. 
김씨에 따르면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에게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미안하다. 너 하고 싶은거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라. 필요한 거 있으면 아버지가 부를테니까, 그전에는 아버지 방에 들어오지 마라." 며칠 후 김씨가아버지 방문을 열었더니 부패한 냄새와 함께 아버지의 시신이발견되었고 김씨는 존속살해죄로 체포되어 수사와 재판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간병비를 다른 가족이나 국가가 마련해줄 수 있었다면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이사건에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고령화를, 김씨는 청년실업 문제를, 김씨의 가족은 가족해체로 인한 돌봄의 개인화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겪고 있습니다.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다는 것은 한 사람으로 치면 사이코패스의 엽기적 살인을 저지른 것 이상으로 패륜적인 행위를 했다는말입니다. 
나치는 유대인 600만명을 비롯하여 슬라브인, 집시,
장애인 등 1천만명 넘게 죽였습니다. 
독일군은 총알을 아끼기 위해서 ‘치클론B‘"라는 살충제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대전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 오랫동안 독일의 기성세때는 자국이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패전했기 때문에 그런 책임추궁을 당하는 것일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1960년대 후반 젊은 층을 중심으로 과거 부모 세대들이 일으킨 전쟁이 용인 가능한 수준을 넘어선 범죄였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후 알려진 바와같이 독일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는 아돌프 아이히만(AdolfEichmann)이었습니다. 그는 독일이 패전한 후에 아르헨티나로 도망가서 15년 동안 건설회사 직원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살았으나, 그의 아들이 하필 유대인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딸과 사귀

면서 아버지의 정체를 말하게 되자 그 여자친구가 이스라엘 정부에 신고하는 바람에 결국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 요원들에게 납치되었습니다. 
그는 1962년 사형이 집행되기 전 개월간 재판을 받았는데, 이 재판을 시종일관 관찰한 해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유대인 정치철학자는 아이히만이 악마가 아니라 오히려 성실한 관료였다면서, 사람이 거대한 기계속 톱니바퀴로서 관료제의 타성에 젖을 경우 선악에 대한 판단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명제를 제시했습니다. 
거대한 사회구조 안에서 인간은 개인적 도덕성의 수준과 무관하게 악마나 사이코패스가 하는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국내사례 중에서 정치적·사회적 분위기가 범죄를 야기한 경우로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떠오릅니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에 있었던 부랑자 강제수용소입니다. 

1987년에 이곳의 실상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을 때 이곳에서 폭력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사람의 수가 512명이었습니다. 
이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확인되는 사망자 숫자는 657명까지 늘어납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한국판 홀로코스트라고 하고, 형제복지원을 한국의 아우슈비츠라고도합니다. 제가 「알쓸범잡」 첫 방송에서 소개한 사건이기도 한데,
당시 촬영을 위해 그곳에 가보았을 때 1980년대 인권유린의 상

다. 감시와 감독을 해야 할 공무원이나 경찰이 그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가정폭력도, 학교폭력도, 직장 갑질도, 국가권력의 횡포도 그러한 닫힌 공간에서 창궐하게 됩니다. 
이른바 ‘도가니‘ 사건(인화학교 성폭력사건)도 폐쇄된 특수학교에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군대에서 수많은 가혹행위가 발생하는 것도군이 폐쇄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외부와 단절되어 폐쇄된 공간에서는, 마치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찼지만 환기가 안 되는 고깃집처럼, 고유한 질서와 규율과 문화가 사람들을 통제하게 됩니다. 
폐쇄공간에는 구성원의 최소한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의 기능이 침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닫힌 공간에는 비상구를 내놓아야 합니다. 안에서 밖을 볼 수 있고 밖에서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환기를 시킬 수 있는 창문도 나 있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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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폴(Europol) 홈페이지에서 가장 최근 수사 사례를 찾아보았습니다. 
2023년 5월에 유로폴이 발표한 수사 사례‘에 따르면, 유로폴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9개국은 공조 수사를 통해서 ‘모노폴리마켓‘(Monopoly Market)이라는 마약 거래 다크웹을 압수하고 이를 통해서 마약을 거래한 288명의 용의자를 체포하고, 필로폰과 코카인 등 850킬로그램의 마약 5,340만 달러의 현금 및 가상자산, 그리고 117정의 총을 압수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체포된 용의자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들도 서로를 직접 만난 적은 없을 것입니다. 
이 사이트를 개설한 용의자는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인데, 2022년 11월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위치가 발각된 뒤 체포되어 미국으로 송환되었습니다. 이들은 범죄의 대가를 가상화폐로 받아서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화폐거래소들을 거쳐 돈세탁을 한 후 세르비아에서 현금화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인 손정우가 만든 것으로 밝혀져서 큰 논란이일었던 ‘웰컴투비디오‘(Welcome to Video)라는 당시 세계 최대의 아동성착취물 공유사이트도 다크웹에 개설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포르노 사이트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동*미국 153명, 영국 55명, 독일 52명, 네덜란드 10명, 오스트리아 9명, 프랑스 5명, 스위스 2명, 폴란드 1명, 브라질 1명,

성착취물이라는 것은 
가령 5살짜리 여자아이를 강간하거나 심지어 신체를 훼손하는 영상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 사이트에는 아예 "15세 이상의 아동음란물은 올리지 말 것"이라는 배너가 떠 있고, 
영상의 분류로 
‘사춘기 이전 아동 하드코어물 ‘4세‘
‘2세‘ ‘2세 미만‘이 있다고 합니다. 
생후 6개월 된 아기에게 몹쓸 짓을 하는 영상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영상이 고가에 팔리기 때문에 아이들에 대한 유괴, 납치, 인신매매가 벌어진다고 합니다. 그 영상 중에는 실종된 아이에 대한 것도 있다고 합니다.

이 사이트가 문제가 된 계기는 
2013년 영국에서 발생한 
매슈 팔더 (Matthew A. Falder) 사건입니다. 
매슈 팔더는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의 엘리트 물리학 연구원인데, 미성년자 약취 유인해서 아동 포르노를 찍는 일을 하다가 발각됩니다. 이 범죄자가 자신이 만든 영상을 판 포르노 사이트는 바로 다크웹에 있던 ‘웰컴투비디오‘라는 사이트였습니다. 
비밀 유료회원이 세계 각국에서 3,400명이 넘었습니다. 영국, 미국, 독일을 비롯한 32개국의 수사기관들이 공조 수사를 해서 
300여명이 적발되었는데, 
그중에 240여명이 한국인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사이트를 만든 사람의 서버 IP 주소가 
한국이었습니다. 
결국 2018년경 미국 워싱턴 D.C. 법원이 대한민국 충남에 거주하고 있던 20대 손정우를 상대로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2개월 뒤 경찰이 손정우를 구속했습니다.

현재 이러한 다크웹 운영자를 잡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공조수사와 방대한 데이터 분석이 필요하므로 품이 많이 듭니다.
그러나 인공지능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범죄를 쉽게 포착할수 있는 다양한 기법과 장치가 나오고 있어서 수사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기술이 범죄 수사를 수월하게 하는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200만년 전이지만, 농업혁명이시작된 것은 1만 2천년 전이고, 과학혁명이 시작된 것은 불과 500년 전입니다. 
그렇지만 현대인의 삶의 필수품을 만들어준과학기술의 탄생은 그 500년 중에서도 지극히 최근에 이루어졌습니다. 
가령 1840년대 이전에는 수술할 때 마취제 없이 양팔과 다리를 붙잡고 실시했습니다. 
증기기관차가 첫선을 보인1825년 이전에는 세상에 기차가 없었습니다. 
독일의 카를 벤츠가 최초의 삼륜 자동차를 선보인 1885년 이전에는 세상에 자동차가 없었습니다. 
라이트형제가 비행에 성공한 1903년 이전에는 비행기도 없었습니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기 전에는 인간이 대기권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이전에는 일반 사람들이 인터넷을 쓰지 않았습니다. 2003년 이전에는 페이스북이 없었고,

2007년 이전에는 아이폰이 없었습니다.

발전된 과학기술이 반드시 좋은 쪽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원리와 같은 20세기 최신 물리학자식이 등장하자마자 가장 천재적인 물리학자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핵무기입니다.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는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뒤에야 원폭의 개발과 사용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2023)에 나오는 대사가 절묘합니다.

"사막의 돌을 들추려거든 그 안에서 뱀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해야 한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양면성을 고려하면, 새로운 과학기술이 탄생할 때마다 그것을 활용하는 새로운 범죄가 등장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미국에서 최신 기관총이 나오면 군과 경찰보다 마피아 조직이 먼저 손에 넣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최신 과학기술이 나오면 수사기관보다 범죄자가 먼저 범죄에 활용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종국에는 방대한 예산과 인력을 보유하고 있는 정부가•기술을 확보하고 장비와 시스템을 구축해서 그런 범죄자를 잡을 수 있게 되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 사이에 시민들이 범죄의 위험에 노출됩니다. 
신기술이 자주 나올수록 범죄자와 수사기관의 과학기술 활용 시점 사이의 괴리는 커질 것이고 그만큼 범죄가 판칠 공간이 넓어지게 됩니다. 

예측하고 그에 걸맞은 과학적 수사기법을 서둘러 마련하는 프로세스가 별도의 조직, 예산, 법령을 토대로 제도화될 필요가있습니다.

•저는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형을 집행하면서 EU와 마찰이 생긴다거나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의 평판이 안 좋아진다는 우려도 있지만, EU는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 일본, 베트남, 싱가포르 등과도 경제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형을 하고 안 하고는 주권 사항으로서 우리나라 정부와 국민들이 정의와 필요성을 고려해 결단할 사항입니다. 
2019년에 성인 9,852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사형제를 찬성하고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집행해야 한다.
는 의견이 51.7퍼센트, 사형제는 유지하되 지금처럼 집행은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37.9퍼센트, 사형제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7.8퍼센트였습니다.

 민주주의주권국가에서는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사형을 집행할지 여부도 국민의 뜻을 살펴서 적법한 권한을 가진 기관이 결정할 일입니다. 
다만, 사형집행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사형수 중에서 유영철, 강호순과 같이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범만을 집행하자는 말도 있지만, 사형수들 중에서 일부만 선별해서 집행하거나 집행하지 않는 것은 그 기준과 근거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유영철, 강호순은 최근 범죄 관련 방・일본정부가 2019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1퍼센트가 사형이필요하다고 답하고 56퍼센트가 피해자와 유족들의 감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살인범이 감옥 활보 안돼" 인권 중시 1. 사형 집행하는 이유」 조선일보 2023.8.31. A4면,

송에서 자주 언급되어 널리 알려졌지만 그보다 과거에 사형이확정된 사형수들도 그 잔혹성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법에 엄연히 사형제도가 있고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하는 데도 행정부가 이를 집행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정의에 반하고, 
유족에게 근거 없이 고통을 주는 것이며, 
사형에 찬성하는 국민 다수의 뜻에 반하고, 법과 재판의 권위를 전체적으로 손상시키며, 흉악범죄를 억제할 수 있는 중요한 효과를 놓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형 여부는 우리나라의 주권 사항이므로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거나 눈치를 볼 일도 아닙니다.


* 1993년 사형이 확정되어 사형수 중 최상기간 수감 중인 원인식은 1992년 ‘원주왕국회관 화재사건‘의 범인입니다. 아내가 다니는 예배당에 불을 질러 15명을 숨지게 하고 25명을 다치게 했습니다. 1997년 사형이 확정된 ‘막가파두목 최정수는 1996년 강남에서 차를 몰고 가던 40대 여성을 납치해 깊이 1.5미터의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했습니다. 2009년 사형이 확정된 정상진은 ‘논현동 고시원 방화사건‘의 범인입니다. 자신이 살던 고시원에 불을 지른 뒤 달출하는 이웃에게 흉기를 휘둘리 6명을 숨지게 하고 7명을 다치게 했습니다.
2016년 사형이 확정된 임도빈은 강원도 고성군 육군 22사단 GOP에서 동료병사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해 5명을 숨지게 하고 7명에게 중상을 가했습니다. 「여성 생매장한 막가파 두목, 26년째 수감・・・ 국내 사형수 59명은 누구 조선일보 2023. 8. 31. A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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