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는 내린 눈이 사람들 발길에 짓밟히는 모습을 진정으로 보기 힘들어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눈을 확인하는 일이 이모 인생에 닥쳐온 최고의 고통인 것처럼 굴었다. 나는 축축하게 젖어오는 이모의 뜨거운 손을 잡고 어두운 거리를 달렸다. 달리는 우리두 사람의 머리 위로 눈은 점점 푸지게 쏟아지고 있었다.

참 이상한 밤이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내내 그 밤이 이상했고 이모가 이상했다. 그래서 마음자리가 오래 뒤숭숭했다.
그 밤, 첫눈은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채워줄만큼 많이 내렸다. 폭설은 아니었지만 다음날까지 세상의 모든 지붕 위에 소복이 쌓인 흰 눈을 즐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모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던 그 시각에는 별로 감동적인 적설량은 아니었다.
쌓이는 눈을 볼 수 있는 곳, 누구에게도 짓밟히지 않고 고스란히 추운 땅을 덮고 있는 흰 눈을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호흡이 가빠서 주저앉을 지경이 되어서야 이모와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이번에도 내가 그 사실을 이모에게 일러주었다. 여기는 서울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다는 강남의 번화가이고, 뒷골목까지 촘촘하게 모여있는 술집과 음식점과 노래방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첫눈 때문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달리는 틈틈이 이모를 설득했다. 좀처럼 내 말을 믿으려

들지 않던 이모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달리기를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이젠 됐어. 그만 돌아가자. 난 택시를 타면 돼. 나부터 갈게"
이모는 그럴 수 없이 침착했다. 여태까지 한 짓은 모두 그냥 해본 장난이었다는 듯이. 실제로 택시를 타고 떠나면서 이모가 남긴 작별의 인사가 그랬다.

"모처럼 신나게 잘 놀았다. 진진아, 주책없는 늙은 이모하고 놀아줘서 고맙다. 안녕!"
첫눈 내리는 거리에 남겨진 나는 얼마나 황당했던지. 이모는 진짜 나와 신나게 놀고 싶어했는데 혼자 여러 가지를 유추하고 분석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게 여겨지던지. 그래도 여전히 장난이 아니라고 우기는 내 속마음은 또 얼마나 강렬했던지.

이모와 헤어져 집에 돌아오니 김장우에게 두 번, 나영규에게 한번, 그렇게 세 통의 전화 메모가 있었지만 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나영규에게 전화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김장우에게 하기에는 내 감정이 영 복잡했다. 
그에게 전화를 하면 이모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모와 함께 첫눈 오는 거리를 달리다가 왔는데 아직도 해괴한 기분이라고, 이모한테 내가 홀린 것 같다고, 그런 이야기를 그에게 하고야 말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내가 여태도 고백을 하지 않았기에 김장우에게 내 어머니는 이

한 일은 이모가 추천한, 아니 이모를 사로잡은 노래, ‘헤어진 다음날‘을 반복해서 듣는 것이었다. 얼마나 되풀이 그 노래를 들었던가. 마침내 나는 가사집을 보지 않고도 노래를 따라 부를 수가있게 되었다.

그대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혹시 후회하고 있진 않나요. 다른 만남을 준비하나요.
사랑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가봐요.
그대 떠난 오늘 하루가 견딜 수 없이 길어요.
어제 아침엔 이렇지 않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오늘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어요.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가져갈 수는 없나요.
그대 떠난 오늘 하루가 견딜 수 없이 길어요.
날 사랑했나요.
그것만이라도 내게 말해줘요.
날 떠나가나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나영규와 헤어진 다음날 내 기분은 어떤 것일까.
나와 헤어진 다음날 나영규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방바닥에 턱을 괴고 엎드려 그 슬픈 노래를 듣고 또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노래는 나의 노래가 아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되고 있었다.

진진아
지난 며칠간 너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또 했는지, 정작 지금 편지를 쓰는 순간에는 너무 지쳐서 준비했던 그 많은 말들을 떠올릴 힘이 나지 않는다.
이 편지를 너한테 보내야 한다는 결심은 아주 쉽게 했었어. 너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에 없었어. 너라면 내가 다하지 못하고 가는 내 삶에 대한 변명을 마저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지. 너라면 나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어.

이제 끝내려고 해. 그동안 너무 힘들었거든.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참 할 말이 없구나. 그것이 나의 불행인가봐. 나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 힘들었던 내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말야.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그래서 그만 끝낼까 해.

나는 늘 지루했어. 너희 엄마는 평생이 바빴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돈도 벌어야 하고, 무능한 남편과 싸움도 해야하고, 말 안듣고 내빼는 자식들 찾아다니며 두들겨 패기도 해야 했고, 언제나 바람이 씽씽 일도록 바쁘게 살아야 했지. 그런 언니가 얼마나 부

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 무덤 속처럼 평온하게 말고,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 사는 것처럼 한번 살아보는 상상도 적잖이 해보았지.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튼튼한 성곽에 갇혀 있었고, 성곽을 부수자니 마음을 다칠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

나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나 때문에 그러는 것, 나는 정말 못견디겠더라.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묵묵히 사는 길도 있는데, 난 그것도 안 돼. 정말 안 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진진아
나, 여기서 그만 이 생을 끝내기로 했다.

죽는 일보다 사는 일이 훨씬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거든. 나는 용기가 없어서, 너무나 바보 같아서, 여러 사람이 크게 다치는 대형사고를 만나면 절대 생존자 명단에는 오르지 못할 위인이라는 것 잘 알아. 그러니 이 죽음도 뜻밖에 만난 하나의 사고라 여기자진진아
사고 뒤처리를 너한테 맡기고 가는 이모를 제발 용서해주길.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시간이면 나는 아마 떠났을 거야. 그때 나한테 와줘. 와서 나를 수습해줘. 이모부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시간은 그 이후일 거야. 숫자에 약한 내가 거듭거듭 시간을 계산하고 우체국에 가서도 물어보고 했으니 설마 틀리지 않겠지. 진실로,
이 마지막 일에는 실수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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