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쉬는

공기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1975-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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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잃어버린 편지들 中

"인간의 권력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 (p.11)

헌법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건 사실이지만, 법률은 국가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처벌한다. 언제 국가가 이 말이나 저 말이 제 안전을 침해한다고 외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p.12)

어떤 이유로 그녀는 그에 대해 불만을 품었는데, 가장 비현실적인 관계(그녀가 알지 못하는 마스투르보프와의 관계)에 가장 구체적인 감정(눈물 속에 구체화된 감정)을 씌운 것처럼 가장 구체적인 행동에 추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불만족에 정치적 명칭을 붙일 줄 알았다. (pp.14-15)

아옌데 암살은 러시아의 보헤미아 침공에 관한 기억을 금세 뒤덮어 버렸고, 방글라데시의 유혈 사태는 아옌데를 잊게 했으며, 시나이 사막 전쟁은 방글라데시의 울부짖음을 뒤덮었고, 캄보디아 학살은 시나이를 잊게 했으며,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깡그리 잊을 때까지 사건이 이어졌다. (p.19)

그렇다,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훨씬 똑똑했다. 그들에게는 웅대한 계획이 있었다. 모두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계획이었다. 그들에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큰 꿈이 없었고 단지 낡고 지루한 몇가지 도덕적 원칙밖에 없었다. 그 원칙을 그들은 기존의 질서라는 구멍 난 팬티나 기우는데 사용하려고 했다. 따라서 이 용감한 자들, 열광하는 자들이 미적지근하고 조심스러운 자들을 쉽게 이기고, 자신들의 꿈인, 만인을 위한 정의라는 목가를 실현하려고 서두른 것은 놀랍지 않다.
나는 만인을 위한이라는 말과 목가라는 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언제나 목가를, 꾀꼬리가 노래하는 정원을, 조화의 왕국을, 세상이 인간을 소외하지 않고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외하지 않으며, 세상과 모든 인간이 유일하고동일한 물질로 만들어진 그런 왕국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바흐의 숭고한 푸가ㅢ 음표 하나 하나가 되고,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의미 없고 불필요한 검은 점으로 남기에, 벼룩처럼 잡아서 손톱 밑에 대고 뭉개 버리면 그만이다.

목가를 위해 필요한 기질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외국으로 떠나고 싶어했다. 하지만 목가란 본질적으로 모두를 위한 세상이므로, 망명을 원하는 사람들은 목가를 부정하는 사람들로 간주되어 외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철창 뒤로 가게 되었다. 곧 수천, 수만 사람들이 똑같은 길을 걷게 되었는데, 개중에는 고트발트에게 털모자를 빌려 주었던 외무부 장관 클레멘티스같은 공산주의자들도 많았다.
영화관 스크린에서는 수줍은 연인들이 손을 맞잡았고,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법정에서는 간통이 엄중하게 체벌되었다. 꾀꼬리들은 노래했고, 클레멘티스의 시체는 인류의 새 아침을 알리는 종처럼 흔들거렸다.
그러자 지적이고 급진적인 이 젊은이들은 문득, 그들이 품었던 이상과 닮지 않게 되었으며, 그들이 한 행위가 드넓은 세상에 나가 고유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기묘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 행위는 그들이 품었던 생각과 더 이상 닮지 않았고, 행위 주체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이 똑똑한 젊은이들은 그 행위를 하고 난 뒤 비명을 내질렀고, 그 행위를 부르며 비난하고, 뒤쫓고 추적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재능 넘치고 똑똑한 세대에 관해 소설을 쓴다면 제목을 `잃어버린 행위 사냥`이라고 붙일 것이다. (pp.20-22)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길 바란다. 나는 그가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사랑했다고 말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얘기다. 마치 그의 삶은 해방되어 갑자기 미레크의 이해관계와는 전혀 들어맞지않는 고유의 이해관계를 갖게 된 것 같았다. 내 생각에는 이런 식으로 삶이 운명으로 변하는 것 같다. 운명에겐 미레크를 위해 새끼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의향이 없지만(그의 행복과 안전과 유쾌한 기분과 건강을 위해) 미레크는 자신의 운명을 위해 무엇이건 할 각오였다.(운명의 위대함과 명료함, 아름다움과 스타일, 이해 가능한 의미를 위해서.) 그는 자기 운명에 책임을 느꼈지만, 그의 운명은 그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p.26)

대개 역사적 사건들은 별다른 재간 없이 서로 닮는다. 하지만 보헤미아에서 역사는 전대미문의 실험을 단행한 것 같다. 그곳에선 옛날 방식대로 한 무리 사람들(한 계층, 한 민족)이 다른 무리에 맞서 일어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한 세대의 남녀가) 자신들의 청춘기에 맞서 일어섰다.
그들은 자기 행위를 붙잡아 길들이려고 애썼고, 어느 정도는 성공하는 듯했다. 1960년대에는 영향력을 점점 더 획득하여 1968년 초에 그들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바로 이 후자의 시기를 일반적으로 프라하의 봄이라고 부른다. (p.32)

그가 그의 인생 사진첩에서 그녀를 지우고 싶은건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지웠다. 그녀와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당 선전국이 고트발트가 역사적 연설을 한 발코니에서 클레멘티스를 사라지게 했듯 그는 그녀의 이미지를 사라지게 하려고 그것을 마구 긁어댔다. 미레크는 공산당이 그러듯, 모든 당이 그러듯, 모든 민족이, 인간이 그러듯 역사를 다시 썼다. 사람들은 나은 미래를 만들고 싶다고 외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미래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무심한 공허에 불과할 뿐이지만 과거는 삶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 얼굴이 우리를 약올리고 화나게 하고 상처 입혀, 우리는 그것을 파괴하거나 다시 그리고 싶어한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바꾸기 위해 미래의 주인이 되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전기와 역사를 다시 쓰고 사진을 다시 손 볼 수 있는 암실에 접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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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17. SAT

 아침부터 미리 끊어둔 조조영화 시간을 맞추기위해 서둘러야했다. 눈떠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7:32a.m. 영화는 9시에 시작이었다. 사실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조조영화를 예매한 것은 주말마다 늘어지고 게으르게 퍼져있는 나 자신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주말에 늘어져있는게 가끔씩은 좋을 때도 있지만 그것도 너무 자주하다보면 너무 늘어져서 일어날 생각도 하기 싫어지고 월요병이 도지고, 주중 일상이 힘겨워지는 나비효과가 있기때문에 바람직한 습관이 아니다. 그리하여 영화관에 도착해보니 나 말고도 3명이 같은 상영관에 앉아있었다. 궁금했다. 저 사람들은 뭐 때문에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여기 앉아있을까..ㅋㅋ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참 예뻤다.)

 

  내가 토요일 아침부터 보겠다고 선택한 영화는 <The Age of Adeline>. 어느날의 교통사고로 시간을 잃어버린 여자의 이야기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녀는 그날의 사고로 29세의 나이에서 멈췄다. 뱀파이어도 아니고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면 그 날 사고로 그녀는 벼락을 맞았고 그 전류(?)가 그녀의 DNA에 변화를 일으켜 노화가 일어나지 않게되었다는... 설정이었다. 사실 조금은 황당한 설정이었지만 영화가 2시간이나 남았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기로했다. 그 설정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 이후로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가였다. 늙지 않는다는 것이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닐것이다. 늘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하고,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자연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순리를 따르고 있기때문이다. 결국 그녀의 곁에는 그녀의 비밀을 아는 오직 한 사람. 그녀의 딸만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자신의 어머니보다 늙은 모습으로 어머니의 삶을 바라봐준다. 이 둘의 관계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모녀는 서로를 어머니와 딸로서 대할 수 없게된다. (물론 둘만 있을때엔 다르겠지만) 딸이 어머니의 표면적인(?) 나이를 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어머니의 친구로, 어머니로, 심지어 할머니로 자신을 소개해야하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매번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집, 직장을 찾아야했고 그렇게 세상에 스며들기위해 늘 긴장한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연은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게된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밀어내고 묻으려 애썼던 인연들은 오랜 시간을 돌아 결국 그녀 자신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끝에서 그녀는 그녀에게 돌아온 그 모든 시간들을 함께 견뎌줄 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고장난 시계는 다시 돌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가 더이상 그녀에게 소중한 이들을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시간을 견딘다는 것은 우리처럼 평범하게 시간의 순리를 따라 늙어가는 사람에게나, 아델라인처럼 영원히 늙지 않는 사람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의미에서. 우리처럼 멈추지 않는 시계를 가진 사람들은 그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기위해, 소중한 순간을 붙들기 위해 애쓴다. 반면 아델라인은 그런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홀로 그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둘 다 매우 힘든 여정일 것이다만. 적어도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후자보다는 전자의 삶을,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디는 삶을 택할 것이 분명하다.

 

  암튼 이 영화를 보고난 후 시간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되었다. 시간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잡아둘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그렇게 기록을 남기고 사진도 찍고 그걸 다시 돌아보고 하게된다. 나에게 소중했던 순간을 다시 떠올리고 들여다보고 싶어서. 뭐라도 흔적을 남겨서 내가 그 때 그렇게 행복했구나, 슬펐구나, 힘들었구나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그 때는 너무 당연하고 너무 일상적인 것이라 잘 몰랐는데 나중에 자꾸 생각나고 돌아가고 싶어지는 순간들도 있다. 잡아두지 못해서 더 아쉽고 생각나는.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이 생각나고 그 시간을 함께 공유한 것이 매우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과 만나면 그 순간을 함께 떠올리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 이 영화를 보면서 두 영화가 떠올랐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와 <인터스텔라>. <벤자민 버튼>은 노인으로 태어나 아이로 죽는 기묘한 운명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 시간이 멈춘 것이든 시간을 역류하는 것이든 자연스럽지 못하고 평범하지 못한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인터스텔라>에서는 우주에서 생긴 시공간의 왜곡으로 인해 우주와 지구 사이에 생긴 시차로 아버지와 딸이 (아델라인과 딸의 시간이 엇갈린 것처럼) 나이가 엇갈리게 된다. <인터스텔라>에서도 그 나이의 엇갈림이 묘하게 느껴졌는데, 아델라인과 그녀의 딸을 볼 때도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묘함이 느껴졌다.

우주와 지구 사이의 시차로 서로 엇갈린 나이의 아버지와 딸을 마주하게 되는 상황. 어쩔 수 없이 모녀의 관계를 숨기고 자신의 어머니를 자신의 친구로, 딸로, 심지어 손녀딸로 대해야만 하는 상황.

 

    

(자신에게만 거꾸로 흐르는 시간을 숙명으로   (할머니가 된 딸과 그녀의 손주들을 마주하게 되는 매튜 맥커너히..)

받아들이고 살아야만 하는 브레드 피트..)  

 

 

+ (그냥 영화에 대한 이야기) 모든 영화는 어떤 어쩔 수 없음에 대한 변명이다. 좋은 영화는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좋은 변명을 하고, 그냥 그런 영화는 그 상황에 대해 제대로 변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떤 치밀하거나 모든 것이 이치에 맞는 설명이 아니라, 어떻게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또 다른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불러오게 되었는지, 그 많은 노력과 애씀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여기에 서있는 것인지. 그 사람이 서있는 자리를 이해하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더 나아가자면 그 사람의 상황에 몰입하게 하고, 내가 만약 그 자리에, 그 상황에 놓였더라면 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그렇게 다른 이들의 어쩔 수 없음을 들여다보게 하고, ‘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갖게 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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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끌려서 읽게된 책이다. 나는 뭐고, 무엇이 되어야하며, 무엇으로 존재해야하는지 '쓸데없는' 생각을 잠재우기 위해 골랐지만 읽을수록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목처럼 '뭐라도 되겠지'로 결론짓게 되었다. 뭐라도 되겠지.

 

블라인드를 모두 내리고 낮잠을 자다 깼을 때, 어두운 작업실에서 방향 감각을 일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혼자서 천장을 올려보면서 생각한다. 나는 뭘까. 곰곰이 생각해도 내가 뭔지 잘 알 수 없으므로 오랫동안 멍하니 천장을 본다. 나는 1이긴 한데, 뭐에서 뭘 빼고 남은 1인지, 아니면 무수히 많은 1을 곱해서 생겨난 1인지, 늘 1이었던 것인지, 어느 순간 1이 된 건지, 도대체 나는 뭔지, 그렇게 오랫동안 1을 생각한다. 내가 작업실을 마련한 것은, `싱글`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이프`가 뭔지 깨닫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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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핀란드라는 낯선 땅에 일본식 음식점을 차린 사치에.

  어디로든 멀리 떠나기 위해 눈을 감고 지도를 찍어 핀란드까지 찾아온 미도리.

  20여년간 병든 부모님을 간호하다가 평화와 고요를 찾기위해 떠나온 마사코.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떠난 남편에 대한 분노, 원망과 그리움으로 마음 속에 가시가 박혀있던 핀란드 여인.

 

 

<카모메 식당>은 자신만 알고있는, 누구나 하나씩 간직하고 있는 상처를 가진 사람들과 그들에 대한 위로에 관한 영화다. 오랜 시간 사치에의 식당 자리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마티 아저씨를 뜻밖의 상황에서 마주치게 되었을 때,사치에는 배가 고프다며 미도리, 마사코와 함께 오니기리를 만든다. 그리고 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게 먹겠습니다" 한 마디를 외친 후 다 같이 오니기리를 한 입 무는 순간. 모두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위로의 맛을 느낀다. 적어도 나는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사치에는 어렸을 적 일찍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집안일을 도맡아하곤 했는데, 1년에 두 번 아버지께서 오니기리를 만들어주셨다. 바로 운동회와 소풍날. 오니기리는 자기가 만든 것보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주었을 때 더 맛있는 법이라며. 그래서 오니기리는 사치에에게 그 따뜻함을 기억하게 하는 '소울푸드'인 것이다. 그녀의 소울푸드는 핀란드의 어느 도시, 어느 골목 식당의 식탁에서 다른 누군가의 위로가 되었다.

 

 

  나만의 소울푸드는 뭘까? 생각해보니 아직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따뜻한 위로의 맛은 음식만이 아니라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가끔씩 느낄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몰라 못다한 말, 그 때 나의 기분, 그리고 너의 기분을 짐작하고 이내 누군가를 그리고 그 때의 나를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글과 영화가 있다. 어쩌면 카모메 식당에서 그들이 함께 먹은 오니기리가 이런 맛이 아니었을까.

 

+ 오니기리하면 생각나는 일본 영화가 하나 더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치히로가 처음 유바바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엄마와 아빠는 정말 돼지가 되어버렸고 돌아갈 길이 막막한데 이 때 치히로에게 하쿠가 건내준 것이 바로 오니기리였다. 그 오니기리를 눈물과 함께 적셔(?) 먹으며 치히로는 두려움도 함께 삼키게 된 듯 했다. 그러고보면 오니기리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배고픔만이 아니라 마음의 빈 곳까지 채워주는 소울푸드가 맞나보다.

 

 

 

+ 갑자기 오니기리 한 입을 크게 앙 베어물고 싶다. 

 

+ 미도리 역을 맡았던 가타기리 하이리는 <나의 핀란드 여행>이라는 책을 통해 <카모메 식당>을 찍는 한 달간 핀란드에 머물며 생긴 에피소드와 감상을 밝히기도 했다. 내가 핀란드를 여행하게 된다면 그녀의 책을 꼭 읽어보고 가야지.

 

+ 아래는 내가 영화를 보며 간직하고 싶었던 말들이다.

 

"수줍기도 하지만 항상 친절하고 언제나 여유롭게만 보이던 것이 제가 알고있던 핀란드인의 이미지였어요. 하지만 슬픈 사람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군요."

" 물론이죠. 세상 어딜가도 슬픈 것은 슬픈 것이고,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법이잖아요."

"세상이 끝날 때 꼭 저도 초대해주셔야해요."

" 이 시간부로 예약 확정되셨습니다."ㅎㅎ

"하루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고있는데 tv에서 핀란드가 나오는거예요."

"뉴스에서요?"

"네. 기타소리 흉내내기 대회.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참가자들이 마치 기타를 치는 것처럼 흉내를 내는 경기죠. 누군가 챔피언이 되는거죠. 또, 부인업고 달리기 대회, 휴대폰 멀리 던지기, 사우나에서 오래 견디기 등. 우스꽝스러운 경기를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어요. 정말 아무 걱정도 없이. 세상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처럼 보였죠.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롭게 여겨졌어요. 그래서 여길 오게 된거죠. 아무 목적없이."

"근데 왜 핀란드인들은 그렇게도 고요하고 편안하게 보일까요?"

"저도 궁금하네요."

"숲이요. 우리에겐 숲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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