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짐승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알게 된지는 꽤 되었습니다. 언젠가 아는 분이 카톡 프로필에 이 책의 표지 사진을 올려 놓았더라구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첼로 뒤에 숨어버린 알 수 없는 여자의 두 다리가 묘하게도 안쓰러웠거든요. 제목을 떠올리지 않았는데도 단박에 슬픈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막연하게 언제 한번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죠. 작가와 소설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참 단순하고 기억은 의도하지 않아도 충분히 무책임하지 않은가요? 여자의 슬픈 각선미를 기억에 저장시켜 놓고 거기서 일 년이 더 흐른 후 엊그제 비로소 책을 덮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작년 여름엔 이 책을 스치기만 하고 잡아보지는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작가가 만약 작년 여름에 당신은 누구였느냐 묻는다면 그땐 당신을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책 한권 읽었다고 작가를 알 수 있다고 답할 순 없겠지만 알고 모름의 답이란 대체로 주관적 판단이니까요. 이 책은 이렇게 작년 여름의 나를 떠올리게 하며 슬그머니 그러나 끈질기게 다가왔습니다. 책과의 인연을 믿으며 읽는 시기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저로서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을 수는 없었던) 작년 여름의 나와 (이 책을 읽을 수가 있었던) 올 여름의 나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주인공은 자신을 지배하던 일상에서 한 사람이 사라진 후 더 이상 삶은 한 발자욱도 진보하지 못한 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삶을 이어갑니다. 삶이 제자리 걸음을 반복한다 하여 생의 의미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그랬죠. 인생에 너무 깊은 의미를 두지 말라고요. 토끼나 풀 한 포기처럼 그냥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서 주어진 삶이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뿐이라 생각하라고요. 사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살고 있던 터였습니다. 정체도 익숙해지면 남부럽지 않은 안도감을 주긴 하니까요. 하지만 어쩐지 특정기간 삶의 정체는 전체 생의 퇴보와도 같은 무게로 느껴지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죠. 말하고 글 쓰고 무언가 읽는 생활에 익숙하다보면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책 안보고 글 안 쓰고 살면 의미 찾기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한 건 있습니다. 굳이 찾고 밝히려 들지 않아도 삶은 또 다른 의미를 향해 자전하는 것이니까요.

이 책은 당분간 무엇에도 의미를 찾지 말자고 그러기 싫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보자고 남모르게 다짐한 제게 다시 의미를 찾아보라고 자꾸 귀찮게 하는 아이였습니다. 아마도 각자 우리의 생에 있어 어제까지 같이 호흡한 누군가 사라진다는 것. 그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이며 그 후의 변화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는 일생 일대에 다시 오지 않을 사랑을 잃어버린 여성의 입장에서 남은 생을 이야기 합니다. 아니, 결국 하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가는 것 외엔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강조할 뿐이니까요. 그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재앙으로 느껴지도록 작가는 삶의 의미를 끈질기게도 고통스럽게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남아 있기 전 지나버린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되묻습니다. 작가는 그때가 사십년 전이었는지 오십년 전이었는지 확실치 않다고 늘 반복합니다. 중요한 건 그 후로 사십 년 아니 오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때를 그리워하며 다른 건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앞으로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사는 날까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예요. 그 지점에 동의하기까지 소설을 다 읽어야 했어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요. 작가는 결국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래오래 설득하고 영원히 공감시키고 말아요. 대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자신의 인생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 시절에 말입니다.

 

작품 초반부에 주인공은 떠나간 남자를 회상하며 자기 인생 전체를 걸어버립니다. ‘태어나는 날부터 시작하여 내 인생 전체를 프란츠에 대한 오랜 기다림이라고 이해할 때만 내 인생이 의미를 갖는 것 같다’고 말이죠. 사실 얼마나 진부하고 상투적인 어법인가요. 그런데도 순간, 잠시 신선했다고 느꼈습니다. 살면서 그런 대상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동경일까요.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는 확신에 대한 존중일까요. 인생 전체가 어떤 한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라 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는 해석. 그건 아마도 계속해서 기다리겠다는 결의로 들리기도 하는데 이것이 혹시 그렇게 살아온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최대의 평가는 아니었을까 싶어서요. 그렇게 평가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숨을 쉬며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즉, 의미부여는 실제 무슨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대상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할 때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자신 이외에 세상 그 누구가 의미를 부여해주겠어요. 한다한들 자신만큼은 아닐 겁니다. 어차피 사랑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그래서 더 절대적이니까요. 그래야지만 기다림의 세월이 누구 앞에서든 강력한 떳떳함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한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누구나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사랑이 꼭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랑을 잃은 후 그 나머지인생이 의미 없을 수 있다는 데는 충분히 동의합니다. 사실 사랑에 대한 의미부여야 말로 얼마나 개인적이며 창의적일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런데, 그래서 인지 한 사람의 고백은 지극히 공감할 수 있거나 반대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 작가는 주인공의 프란츠에 대한 사랑의 근원을 원시시대의 공룡성으로 상징하더군요. 그런 원시성을 유전자로 지닌 주인공은 사랑이란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이라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너를 차지할 때만 사는 것이라는 뜻도 되지요. 나의 삶은 그러니까 나로부터가 아닌 철저히 너로부터만 생과 사의 여부가 결정나는 것. 사람들은 너 때문에 살기도 너 때문에 죽기도 하는데 그건 바로 사랑을 전제할 때 더욱 분명해지는 이야기인 것이죠. 이런 일은 누구와 얼굴 보며 말로 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사실 남의 사랑이야기야 말로 얼마나 유치하기 짝이 없고 말이 안되기 일쑤인가요. 그건 내가 남한테 남 이야기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죠. 그런 남의 사랑 이야기를 내 것 보다 더 이해시키는 작업이 소설은 아닐까 이 작품을 덮으면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소설의 재미와는 별개로 저는 사실 주인공을 이해하기는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일까요. 이 작품은 읽을수록 작가를 감탄하게 만드는 소설인가 봐요. 첫 번째는 사랑을 매개로 한 기억과 사랑이 사라진 노년에 대한 사유가 깊고 달콤한 꿀맛 같아요. 결국 인간은 사랑을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사랑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슬픈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기억자체는 ‘진주의 내부에 들어있는 이물질’처럼 조개를 성가시게 한 침입자일 뿐인데 조개 안에서 광택을 얻기에 소중한 가치를 부여받는다고 합니다. 조개처럼 이물질을 매끄럽고 아름답게 만드는 건 바로 인간의 영역이겠죠. 그것이 능력인지 노력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랑에 대한 단 하나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 대한 의미부여. 작가는 그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을 기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p90

 

 

두 번째는 공룡이 살았던 시대부터 주인공이 살아내는 시간까지의 물리적 거리와 동독과 서독, 그리고 미국 등 여행지를 배경으로 하는 공간성의 놀라울만한 압축입니다. 시공간의 축약은 마치 이 소설의 배경이 한 장소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박물관 학예사인 주인공의 성찰은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공룡 브라키오 사우루스를 지구상에 존재했던 동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슬픈 뼈대를 가지고 살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인간도 다를 것 없는 뼈대를 이루고 한걸음 한걸음 지금까지 발자국을 새기며 인생이라는 시공간을 걸어왔음을 깨닫게 합니다. 어느 누가 살면서 사랑하게 될 사람을 거대 공룡의 모형 아래에서 운명적으로 만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요. 이 구체적이고도 창조적인 환경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소설이 그저 그런 불륜과 통속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인공은 공룡의 뼈대와 발자국 아래에서 늘 생과 사를 고민하니까요.

 

마지막으로 과정으로서의 인간의 늙음과 결과로서의 죽음에 대한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입니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통해 여러 번 ‘사람이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여자는 프란츠가 떠나간 후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시간을 초월한, 어떤 숫자 도구에 의해서도 정렬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회상합니다. 그 이후로 계속 ‘바람이 통하는 어떤 공의 내부에서 살듯 그 시간 속에 살고 있’다고 그러나 ‘사랑으로 번민하는 인물의 상투적인 모습을 내가 가소로울 정도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알만큼’ 나이가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의 끝은 비극적이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라 결론짓습니다. 비극적이면서도 진부하게 끝나버린 사랑의 주인공은 결국 예정대로 노년을 맞이합니다. 노년은 죽음에 대한 준비로서의 쓸모밖에 없다며 작가는 주인공에게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전혀 부여하지 않습니다. 살면서 어떤 상태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말고는 달리 어찌할 바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산다는 것. 미래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과거만이 내일을 예견해주는 어제와 같은 오늘. 그곳의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문제는 당사자가 별로 벗어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싶습니다. 벗어나는 순간 삶은 끝나는 것일 테니까요.

 

이 책을 덮으면서 저는 시간의 속도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떤 일, 혹은 그 일과 관련된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그가 늘 느끼고 숨 쉬던 시간의 흐름과는 아주 터무니없이 다르게 각인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조직에 몸담고 있던 일 년은 그렇지 않았던 일 년과는 완전히 시계침의 속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의 만난 기간은 그렇지 않았던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거나 짧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삶의 일정한 어느 시기에 사로잡혀 꼼짝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나는 지나간 과거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실은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으면서 발자국을 떼는 시늉만 하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지금 나와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무언가는 과연 무엇일까, 갑자기 오늘을 되돌아 봅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구나 알다시피 어떤 선택을 했으면 그 결과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린 늘 나중에 안 좋은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지금을 택하고 순간을 늦춥니다. 대표적으로 사랑이라는 현재는 더더욱 나쁜 결과를 상상치 못하도록 힘이 세어지기 때문에 결과를 생각하기 싫어집니다. 아마 사랑을 잃게 되는 두려움이 눈앞의 많은 것을 놓치도록 하는 게 아닐까요. 주인공은 프란츠가 돌아오지 않자 방안에서 혼자 그를 오랫동안 사랑합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합니다. 어쩌면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은 인생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데도 그 결과를 바꾸기보다 미리 알게 된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합니다. 제가 슬픈 부분은 바로 여깁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였는데도 왜 주인공은 행복해지지 않았는지요. 어쩌면 우리 모둔 행복할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알면서도 눈감아버리는 존재들은 아닐까요.

 

불행하기 위해서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지만 더 불행해지기 싫어 이별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행복해지지는 않는 다는 거. 어쩌면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이별하기도 한다는 거. 원래 사랑은 행복과 불행과 상관없이 왔다가 가는 것인데 인간만이 지난한 의미놀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거. 왜냐하면 사랑이란 그렇지 않고서는 시작하거나 끝내야 할 필요성이 없는 것 일테니까. 역설적으로도 이 책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모두 사랑을 버리지 않나요.

 

어떨 땐, 지나온 모든 사랑을 추억하지 않고 더 이상 기억할 수도 없어 새롭게,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 작가는 지독한 사랑을 이로써 잊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질기게도 만나게 되는 악몽이 있는데 아마도 연기처럼 사라지길 소원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은 통일이 되기 전 파괴된 도시를 보고 그때가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것인지 모릅니다. 집 전체가 불에 탈 경우 ‘가구와 그림 책, 그리고 우리 삶이 구체화 되었던 다른 모든 것들이 어떤 순서로 재가 되는지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라지는 것은 순서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사라짐 전체, 결과로서 사라졌다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했던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 비로소 삶은 재건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여름이 내 불타고 있는 가슴보다 미지근하다 생각된다면 슬픈 이 소설을 읽어보세요. 다 잊고 더 이상 잊어야 할 것이 없을 때까지 또 잊고 마음이 공허하다 못해 마음자체도 사라진듯하여 깃털보다 가볍다 느껴지는 순간, 아니 내 존재 자체의 무조차도 실감나지 않을 때 아마도 고개 들어 새로운 누군가를 향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예견해봅니다. 인간은 슬프지만 그런 인간만이 슬픔을 겪을 수도 견딜 수도 지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는 거니까요. 최소한 브라키오 사우루스보다는 괜찮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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