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지 않고도 강해지는 방법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젊은 세대들은 반드시 알아두길 바란다.-최배달(일본 가라테 창시자)





'바람의 파이터' 최 배달은 1923년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라테를 창시해 세계 곳곳에서 내로라하는 무인들과 한 판 시합을 벌여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맥주병을 반 토막 내고, 더는 싸울 인간이 없다며 황소와 격투를 벌였던 그의 매섭고 단단한 손은 '신의 손'이라 일컬어졌습니다. 생전에 가라테의 전승과 보급에 힘을 쏟고, 영문판 가라테 입문서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지요.

위의 말은 그가 생전에 자주 한 말로, 일본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명언으로 꼽힙니다.

후루이치 유키오는 "학력 콤플렉스 약점은 하루 30분 공부로 간단히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 자신 또한 '하루 30분'이라는 지속적인 공부 방법으로 다양한 분야의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쓴 책<무엇이든 아침 30분만 계속하면 성공한다>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난 사람들에게 자주 권합니다.'다른 사람이 좀처럼 할 수 없는 일을 하세요.' 그러면 대다수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알고는 있지만, 좀체 실행하기 어려워요.'"

즉, 실행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뜻이 됩니다. 실행이 어려우니까 차별화가 가능합니다. 거꾸로 말해, 쉬우면 차별화가 불가능하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지금은 다달이 할부금만 조금 내면 휴대전화를 손에 쥘 수 있는 세상입니다. 당신에게 휴대전화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타인과 차별화를 꾀할 수 있을까요?어림도 없겠지요. 하지만 휴대전화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는, 휴대전화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타인과 차별화가 분명히 생겼습니다.

휴대전화를 들고 술집 따위에 가면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지요. 매월 휴대전화를 유지하고 사용하는 비용이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휴대전화를 가지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희소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비쌌던 휴대전화를 지금은 웬만한 사람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당신에게 휴대전화가 있다고 해서 주위 사람이 "휴대전화가 있다니, 대단하네요"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그럴 리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대학교 졸업자이기 때문에, 자가용이 있기 때문에, 액셀 프로그램을 다루기 때문에 차별화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간단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가가치가 생기는 법입니다. 가령 공인 회계사 자격증 혹은 의사 면허가 있거나, 영어에 능숙하거나, IT시스템 개발이 가능하다면 차별화가 됩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공인 회계사나 의사 면허를 쉽게 딴다면 부가가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좀처럼 실천하기 어려운 일을 한다면 부가가치가 생깁니다.

매일 조금씩 시간과 노력과 돈을 투자해서 꾸준히 공부를 계속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사람과의 격차가 커집니다.

혹시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시간과 노력과 돈을 투자하지 않고 차별화를 할 방법은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단언하건대, 그런 방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벌써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겠지요.

그럼에도 '시간과 노력과 돈을 투자하지 않고 편하게 할 방법이 있을 터'라고 믿고 부지런히 그 방법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찾아다니면 됩니다. 그러십시오. 당신에게 주어진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 있지도 않은 방법을 찾는 데 전부 소모되고 말겠지요. 그러는 동안에 부지런한 길을 실천했다면 몇 가지 가능성은 열렸을 텐데 말이지요.

있지 않은 방법을 평생 찾아다니는 사람은, 불만족 100퍼센트로 인생을 마감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쪼록 당신이 선택한 길이니 당신의 자유입니다.

일본 기업인인 와타나베 미키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옆 사람과 비교하지 마라. 어제의 자신과 비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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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 아버지 "아들아, 밖에 나가 놀아라"
연합뉴스 | 입력 2009.06.22 11:48 | 누가 봤을까? 10대 여성, 제주

(서울=연합뉴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와 그의 아버지의 부자관계는 분명히 독특하다.

역사상 최대의 부를 일궈낸 인물 중 한 사람인 빌 게이츠는 자선사업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고 그의 아버지는 275억달러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자선기구인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공동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올해 53세인 빌 게이츠는 작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의 일상근무에서 물러났고 83세인 아버지 게이츠는 1998년 시애틀의 저명한 법률회사인 프레스톤 게이츠 & 엘리스(K & L게이츠)에서 은퇴했다. 자선재단 일은 두 사람 모두에게 제2의 인생인 셈.

두 사람은 요즘은 서로 상담하고 조언하는 사이지만 당연히 오랫동안 아버지가 아들에게 중요한 조언을 해왔다.

CNN머니는 21일 미국 경제전문지 포츈이 두 사람과 동시에 파리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소개했다.

--아버지에게서 얻은 가장 훌륭한 조언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을 하도록 북돋워주는데 탁월했다. 그들은 내게 밖에 나가 수영이나 축구, 풋볼과 같은 여러 가지 스포츠를 하도록 격려했다. 나는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랐다. 무의미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편하게 느끼는 일에만 매달리는 대신 내가 잘 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지도력을 키울 기회에 노출시키는 결과가 됐다.

--아들에게 특별히 마음먹고 해준 조언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자식을 양육하는 과정이었나요.

▲집사람이나 나나 그 문제에 관해 어느 정도 분명했다고 생각하지만 주로 무의식적이었다. 우리는 그냥 아들이 밖에 나가 이웃 소프트볼 팀이라든지 그런 데서 놀고 그래야 한다고 느꼈다. 우리는 그게 아들에게 좋고 아들이 그걸 즐길 거라고 생각했고 나중에 보니 좋은 조언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빌 게이츠) 당시 내가 잘 하지 못했던 것도 결과적으로 좋았다.
--아주 쉬운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우리 부모들은 가족을 양육하는 게 늘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안다. 새 책에서 일요일 만찬과 성탄절에 같은 종류의 잠옷을 입는 것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런게 정말 효과가 있나요.

▲한 가족의 경험으로 볼 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함께 모이고 자신이 뭘 하려는 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족의 전통, 예컨대 여행을 함께하고 언제나 저녁자리에 같이 앉고 생각을 공유하는 것 등이 정말 큰 차이를 만든다. 우리는 부모가 화합하는 방식으로 자발적으로 하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배웠다.

--일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을 텐데 다른 아버지와 아들처럼 불편한 순간도 있었지요?
▲물론 그렇다. 나는 내가 키우기 쉬운 아이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에는 완고하게 고집을 세우는 기운이 넘치는 애였다. 내가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이었을 때 학교를 그만둬야 할 직업을 제의받은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교장선생을 만나 사정을 알아보고 난 후 "그래. 가서 해볼만한 일"이라고 말하는 걸 보고 몹시 놀랐다. 대부분의 불편한 일은 내가 아직 뭔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당신들은 훌륭한 업무관계는 물론 가까운 가족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비결은.
▲젊은 애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옳은 일을 북돋우는 것이다. 빌의 어머니와 나는 우리가 다니던 교회의 부모효율교육에 참여한 적이 있다. 거기서 그들이 가르치고 강조한 것은 자식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하는, 정말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었다. 자식들과의 관계에서 이 말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정말 출발이 좋은 것이다. 나는 내 아들의 열렬한 팬이며 아들이 훌륭한 시민이요 탁월한 사업가라고 생각한다.

(빌 게이츠) 역할 분담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밀어붙이는 형이다. "이 모든 걸 못할 이유가 뭐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버지는 지혜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다. 우리가 회의를 하고 일정과 비용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버지는 누구라도 멈춰 서 생각해보도록 하는 논평을 한다.

--아들이 언제나 충고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아들이 하버드대학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뭐라고 했나요.

▲처음에는 얼마간 떠났다가 돌아가겠다고 했다. 방점은 돌아가겠다는 데 있었다. 돌아온 후 두 번째는 회사가 있는 곳으로 가 거기서 일을 더 해야겠다고 했다. 두 번째가 훨씬 걱정스러웠다. 회사는 손이 달리고 있었고 빌이 도와야 할 폴 알렌이 바로 거기 있었다.

--당신의 또 한 명의 스승인 워렌 버핏에게서 얻은 가장 훌륭한 조언은.
▲많은 조언을 받았지만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일을 단순화하는 그의 솜씨다. 그의 일정표를 보면 정말이지 간단하다. 일을 요약해내는 그의 능력은 천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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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 성공스토리] 노르웨이 라면왕으로 통하는 이철호씨


 

◆ 한상 성공스토리 ◆

"노르웨이에서 라면을 먹고 싶다면 '미스터 리(Mr. Lee)'를 찾으세요."

노르웨이 라면계 전설 이철호 씨(72ㆍ사진)는 '미스터 리'가 노르웨이에서는 라면을 뜻하는 고유명사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가 만든 라면 브랜드 '미스터 리'가 무려 20년 이상 노르웨이 라면시장 점유율 80% 이상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철호 씨가 오슬로 근교 한 식당에서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차고 있는 돌핀 전자시계를 들어보이고 있다.



덕분에 그는 노르웨이에서 '라면왕'으로 불리며 총리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2000년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 때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미스터 리' 조국의 대통령으로 소개될 정도였다.

이씨가 라면을 처음 노르웨이에 도입한 것은 1970년대 중반 그가 요리사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17세의 나이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르웨이 땅을 밟았다. 처음엔 청소나 접시닦이 일을 하다 한 호텔 주방장 눈에 띄어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어 프랑스에 요리유학까지 갔다. 이씨가 60년대 중반 독일에서 노르웨이식 뷔페 식당을 열어 대박을 터뜨렸을 때 그의 주요 고객에는 독일 총리 등 유명인들이 포함됐다. 그가 다시 노르웨이로 초빙돼 요리사로 일하던 71년 그는 스웨덴 정부로부터 한국 출장을 요청받았다.

이씨는 한국 출장에서 처음으로 라면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는 "한국에서 라면을 처음 맛보았는데 진짜 맛있었다"며 "요리사로서 노르웨이에 꼭 소개하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노르웨이인들에게 낯선 음식인 라면을 소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우선 한국 라면을 노르웨이시장에 팔기 위해 거쳐야 하는 각종 통관 절차가 3년 이상 걸렸다. 특히 방부제 등 성분검사 통과가 까다로웠다. 게다가 노르웨이인들은 라면 요리를 할 줄 몰라 라면을 그냥 버리기 일쑤였다.

결정적인 문제는 한국 라면이 맵고 얼큰해 노르웨이인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그는 해결책을 찾으러 노르웨이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스를 가지고 한국의 유명 라면회사 연구소를 방문했다. 연구진과 함께 노르웨이인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라면 스프를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이씨는 "프랑스 독일 등에서 요리사로 일한 경험을 되돌아 보니 나라마다 독특한 소스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노르웨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소스를 먼저 알아놓은 다음 거기에 맞추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주로 매운맛을 빼고 기름진 맛을 더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처음에 한국 라면을 그대로 도입했다가 입맛에 맞게 바꿔서 출시한 이후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며 "당시 한국에서 노르웨이로 컨테이너 단위로 주문하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매출 증가와 함께 그가 주력한 부분은 홍보였다. 벌어들인 수익 중 필요한 경비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홍보에 투입했다. 그는 신문 방송 광고는 물론 한국 여행 경품까지 걸었다. 한국을 알리면 라면도 자연스럽게 알려질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미스터 리' 라면 표지에는 '소고기맛' '닭고기맛' 등 한글이 꼭 적혀 있는데 이것도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덕분에 노르웨이에서는 라면의 원조가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알려져 있어 일본 라면이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사업이 계속 승승장구하던 89년 어느날 이씨는 갑자기 자신의 라면 회사를 노르웨이 최대 식품회사에 넘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팔아치우자 그의 주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이씨는 "내가 100살도 못살텐데 내가 없어도 '미스터 리' 라면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며 "동양 사람들이 자기 묻힐 묘를 만들고 죽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더욱이 그의 딸 3명이 모두 사업을 물려받을 뜻이 없다고 밝혀 그는 더 쉽게 '미스터 리' 라면 사업을 넘길 수 있었다.

이씨는 90년부터는 라면 개발만 필요에 따라 해주고 한국과 노르웨이를 양국에 홍보하는 일에 전념해오고 있다. 그는 또 세계 최초로 해산물대학교를 노르웨이에 설립하는 것을 추진 중이며 인천 송도에는 '리틀 노르웨이'라는 노르웨이 타운 건설도 추진 중이다.

한편 그는 한국인들에게 노르웨이에 와서 다양한 사업을 해볼 것을 권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노르웨이에서 근면성실한 한국인이 성공하기 쉽다는 설명이다.

◆ 노르웨이선 '빨리빨리' 안통해

"노르웨이 사람들과 일하려면 서둘러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몇 년이 걸려도 꾸준히 일을 해야만 합니다."

라면왕 이철호 씨는 노르웨이에서 사업 성공 비결을 묻자 이같이 대답했다. 신뢰를 쌓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도 있으나 노르웨이인 특성이 뭔가를 즉각적으로 하는 데 익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만일 누군가가 노르웨이인에게 어떤 부탁을 하면 그냥 지나가는 말로 생각하고 부탁을 바로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며 "1년 후, 그리고 2년 후 꾸준히 부탁하면 진실성을 깨닫고 기꺼이 들어준다"고 말했다.

이씨는 따라서 한국 사람들이 막 덤벼들었다가 안 된다고 바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노르웨이에는 공무원 부정ㆍ부패가 거의 없어 뇌물로 매수하려는 생각은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노르웨이에서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절차에 보통 3~7개월이 걸리는데 이를 앞당기기 위해 무슨 수를 쓰면 오히려 추가 조사를 받게 돼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이씨는 노르웨이 언어 습득도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노르웨이인은 대부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으나 현지 언어를 모르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사실 50년여 전 노르웨이로 이민 올 당시 자신의 영어 능력을 믿었으나 노르웨이어 습득의 중요성을 깨닫고 숙달되기까지 하루 3시간씩 자며 현지어 공부를 했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마지막으로 한국인으로서 노르웨이에서 사업을 한다면 한국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추천했다. 그의 '미스터 리' 라면은 1970년대 중반 출시될 때부터 갖가지 한글을 라면 겉봉에 넣었는데 호기심을 자극하는 등 고객들 관심을 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오슬로(노르웨이) = 윤원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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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

 
 
입식타격기 국내 최강자를 가리는 'K-1 맥스코리아' 결승전이 열린 지난달 20일 서울 서초동 센트럴시티 밀레니엄 홀.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신장 173㎝의 그는 자기보다 10㎝가량 큰 상대와 주저없이 맞붙었다. 하지만 긴 팔과 긴 다리를 이용한 상대방의 공격이 매서웠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상대방의 왼손 훅이 그의 턱에 꽂혔다. 첫 번째 다운이었다.

카운트 '세븐(7)'에서 그는 일어섰다. 하지만 다운의 충격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심판이 '파이트'를 외치자 비틀거리는 그의 얼굴에 상대방의 체중을 실은 미들킥이 작렬했다. 10초 만에 다시 다운.그의 패배를 직감한 팬들의 아쉬운 탄성이 신음처럼 흘러 나왔다.

그러나 그는 카운트 '에이트(8)'에서 오뚝이처럼 또 일어났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지면 안 된다는 승부사의 본능이 발동했다. 간신히 공격자세를 취한 그를 향해 상대방은 승리를 예감한 듯 서둘러 킥을 날렸다. 수십만 번 이상 연습했던 동작이 본능적으로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정신도 덜 수습한 상태에서 그는 날아오는 킥을 오른손으로 제치고 상대방 얼굴에 강력한 왼손 카운터 펀치를 꽂았다. 승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링 위에서 울었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챔피언이 된 아빠에게 달려온 딸을 품에 안은 채 감격의 눈물을 흘린 그의 이름은 임치빈(29).두 번의 다운 끝에 한 번의 카운터 펀치로 역전극을 일궈낸 그는 요즘 세계무대 도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 'K-1 맥스코리아' 챔피언에 이어 세계대회인 'K-1 월드맥스'를 준비 중인 임 선수를 그의 체육관인 서울 강남구 역삼동 칸짐에서 만났다.

▼우승을 축하합니다.

"오랜 기간 준비한 결실을 거두게 돼 기쁩니다. 대진 운이 좋지 않아 1회전부터 3라운드 판정까지 가서 체력적인 부담이 있었지만 누구보다 많은 훈련을 소화한 끝에 극적인 우승을 할 수 있었어요. 결승전에서는 경기 초반 두 번 다운을 당했지만 훈련을 할 때 보디 공격에 대한 대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죠.맷집은 괜찮습니다. "

▼격투기를 직업으로 삼은 계기가 있나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이것저것 했어요. 고교 시절에는 무에타이(주먹과 발을 모두 사용하는 타이식 복싱)를 하다 보니 강한 남자에 대한 동경이 생겼습니다. 대학교 때 처음 아마추어 경기에 나갔는데 우연히 이겼어요. 그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두 번째,세 번째 경기에서 연달아 지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기왕 하는 거 최고의 파이터가 되자고 마음 먹고 직업으로 택했죠."

▼다른 선수보다 키가 좀 작아서 불리하지 않나요.

"결승전에서 맞붙었던 이수환 선수보다는 10㎝ 정도 작죠.큰 상대와 붙을 때는 무섭다기보다는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 손해를 봅니다. 킥이나 펀치의 파워에서 밀리거든요. 웬만한 상대는 저보다 크니까 그런 면에서 약간 불리해요. 하지만 작은 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신장의 불리함은 빠른 스피드로 극복할 수 있어요. 모든 게 완벽한 선수는 없으니까요. 파이터로서 저의 장점은 스피드뿐만이 아닙니다. 전문가들은 저의 동체시력(움직이는 물체를 보는 시력)이 좋다고들 해요. 상대의 신장이 커도 펀치와 발차기가 날아오는 걸 볼 수만 있다면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키가 작아도 파워에서 밀리지 않도록 힘을 키우는 훈련을 많이 하죠."

▼연습벌레라고 하던데요.

"남들보다 많이 하려고 노력하죠.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는 맷집 강화 훈련에 중점을 뒀어요. 특히 복근과 보디 강화 훈련을 열심히 했죠.하루 100㎏이 넘는 헤비급 선수에게 배만 200대씩 맞는 훈련을 했으니까요. 온 몸을 골고루 맞았죠.또 스피드를 강화하기 위해 30초 안에 발차기를 80번 하는 연습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무하마드 알리의 유명한 말처럼 링 위에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려면 연습밖에는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 밖에도 연결동작을 본능적으로 할 수 있도록 만드는 훈련을 꾸준히 했습니다. 결승전에서 카운터 펀치를 날린 동작 있잖아요? 상대의 발차기가 날아오면 손으로 방어하고 들어오는 상대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그 동작은 정말 10년째 연습하는 동작이에요. 수십만 번은 연습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연습해야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거든요. "

▼링 위에서 무섭지는 않습니까.

"링 위에서는 최대한 즐기려고 노력해요. K-1 최강자였던 피터 아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나는 링으로 출근한다'고요. 그만큼 링 위가 편하다는 의미겠죠.저도 링을 편안하게 생각하고 즐기려고 합니다. 제가 연습한 기술들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로 보자는 거죠.맞으면 정말 아프죠.아무리 맷집 강화 훈련을 해도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아파도 제 기술을 활용하는 데 집중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다운당했을 때,그리고 상대방을 다운시켰을 때 기분이 궁금합니다.

"다운당하고 나면 정말 아무 생각도 안듭니다. 개그 프로그램 중에 그런 게 있잖아요? 자신한테 최면을 걸면서 '레드 썬!'하면 정신이 나갔다가 돌아오면 아무 기억도 안나는….그런 기분이에요. 정신을 차려 보면 제가 링 위에 누워 있죠.내가 왜 누워 있는지 처음에는 파악이 안 됩니다. '여기가 어디지?' 하는 순간적인 기억상실 상태가 되는 거죠.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일어나라고 소리치는 세컨의 외침이 들려옵니다. 그 소리가 한 줄 동앗줄과 마찬가지죠.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싸우러 왔고 방금 전에 한 대 맞았다는 것을 순식간에 깨닫는 거죠.상대를 다운시킬 때는 정말 손맛이 옵니다. 묵직한 느낌,있잖아요? 야구선수가 홈런을 치고 직감하듯이 격투기 선수들도 상대를 무너뜨리는 펀치를 날리고 나서는 쾌감을 느낍니다. 상대를 다운시키고 나서는 중립 코너에 가서 기다리죠.그거 아세요? 모든 격투기 선수들이 쓰러진 상대를 보는 그 순간,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을.'제발 일어나지 마라'는 주문을 외우죠.기도하는 심정이에요. 상대가 일어나면 절망스럽죠.그래도 다시 싸웁니다. 저는 프로 파이터니까요. "

▼다른 운동도 잘 하나요.

"격투기는 이것저것 많이 배웠어요. 대한민국 남자라면 다 가지고 있다는 태권도 초단 자격증부터 프로 태권도 4단,킥복싱 4단,격투기 4단,모두 합쳐 13단이네요. 취미로는 축구를 좋아합니다. 소속사 직원들이 축구를 할 때면 저도 끼워 달라고 하는데 아시다시피 제 발차기를 잘못 맞으면 다칠까봐 그 쪽에서 말려요. 저도 부상 위험이 있어서 자제하는 편이고요. "

▼체중 감량이 어렵지는 않나요.

"제 원래 체중은 70㎏이 안 돼요. K-1 맥스의 체중 규정이 70㎏이거든요. 오히려 체중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계체량을 맞추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은 74㎏ 정도 나가는데요,시합 전 하루 정도 굶고 계체한 다음에 늘립니다. "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아침에 일어나면 달리기를 한 시간 정도 합니다. 집이 분당인데 근처 율동공원을 네댓 바퀴 정도 돌아요. 그리고 집 근처 웨이트 트레이닝장에 가서 1시간 반 정도 근력훈련을 합니다. 점심을 먹고 체육관에 나와서는 2시부터 6시까지 기술훈련을 해요. 7시 정도에는 집에 들어가죠.규칙적인 생활이에요. "

▼두 아이의 아버지잖아요.

"딸이 다섯 살,아들이 네 살입니다. 링에서는 격투기 선수이지만 집에 가면 아이들한테 꼼짝 못합니다. 집에 가는 순간 제 몸은 놀이터가 되요. 아이들이 타고 노는 놀이기구인 거죠.제가 경기를 하는 날이면 아이들이 경기장에 와요. 이번 대회 나갈 땐 딸아이가 꼭 이겨 링 위에서 자기를 안아달라고 하더라고요.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앞으로의 계획은요.

"세계대회인 K-1 월드맥스에서 우승하는 것입니다. 이번이 네 번째 도전이죠.지금까지 세 번 출전했는데 모두 1회전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강자들이 많지만 다시 한번 도전해서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요. 이겨도 져도 링은 여전히 제 놀이터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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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 完治 후 찾아온 척추암



그녀의 다리는 네 개다. 크고 작은 상흔들로 뒤덮인 목발 두 개는 나이테와 같다.

서강大 張英姬(장영희·영문학) 교수는 생후 한 살 무렵 앓은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1급 장애인이다. 몇 년 전 美 하버드大 방문교수 자격으로 보스턴에 있을 때 그녀는 우연히 유방암을 발견했다. 두 번의 수술을 받고 귀국했을 때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흠, 역시 장영희군. 남들이 무서워 벌벌 떠는 암을 이렇게 초전박살 내다니…』

그런 그녀에게 또다시 불운이 찾아왔다. 2004년 9월 척추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결국 2001년부터 3년간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북 칼럼을 접어야 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쓴 칼럼에는 삶에 대한 절절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이 죽을 힘을 다해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난 확신한다>

張교수를 만나기 위해 서강大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목발을 짚고 인문대학 연구실로 향하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에밀리 디킨스의 詩 「희망은 한 마리 새」를 번역하며 張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할 때, 가만히 마음속 깊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한 마리 작은 새가 속삭입니다. 「아니, 괜찮을 거야. 이제 끝이 날 거야. 넌 해낼 수 있어」 그칠 줄 모르고 속삭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2000년에 수필집 「내 생애 단 한 번」을 출간하면서 『덤덤한 삶을 혐오한다』고 하셨던데.

『(웃음) 어떤 사람이 불운한 삶을 원하겠어요. 평범한 것에서도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심심한 걸 싫어했어요. 주위에서 「공기 좋고 햇볕 많이 드는 자연에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지내라」고 하지만 제가 워낙 일을 많이 벌여 놓고 복잡하게 지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이 없는 삶은 얼마나 심심한 삶일까요. 지지고 볶고 살아도 사람 속에서 사는 게 훨씬 재미있지 않나요?』

―말이 빠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도전적으로 들립니다.

『제 말투가 이북 사투리 같다고 해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모두 이북 출신이십니다. 제자들이 제 말투가 「엄마」 하지 않고, 「오마니」 하듯 「옴마」 라고 한다고 그래요. 저는 모르죠(웃음)』

―성격이 쾌활하신데 누구의 영향을 받았나요.

『1남5녀의 셋째로 형제가 많은 가정에서 자랐어요. 게다가 조카가 10명이나 됩니다. 만나면 엄청 시끄럽습니다. 딸들은 멀리 살아도 늘 바글바글합니다. 형제가 많은 집에서 살았다는 게 성격 형성에 굉장한 도움이 됐다고 봐요.

저는 「걸림돌이 디딤돌」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살아오며 장애인이라는 조건이 걸림돌이었지만 언제나 디딤돌로 쓸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었어요』

불쑥 점심은 무얼 먹었는지 물어보았다. 장기로 삼는 요리가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생태찌개를 먹었어요. 저는 요리하는 데 굉장한 흥미와 취미가 있어요. 식탐도 있습니다. 케이블TV도 요리채널을 좋아하고, 치과 같은 데 가면 여성잡지의 요리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요리할 기회가 많지 않아요. 제 일을 하는 데도 시간이 빠듯해요』


요리에 굉장한 흥미와 취미


―문득 드는 생각인데, 요리책을 쓰시면 아주 재미있게 쓰실 것 같아요.

『요리책이 아니라 다른 글도 재미있게 쓸 자신이 있어요(웃음). 연령대의 눈높이에 맞게 글을 쓰는 재주가, 감히 있다고 생각해요. 유치원생을 위한 책은 아이들의 놀이와 호기심에 맞게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카가 10명인데 거의 함께 살며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막내 조카가 여섯 살이고, 제일 큰 조카는 결혼을 해서 애까지 낳았으니 굉장히 범위가 넓어요』

張교수는 하우스먼의 詩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를 인용하며 조카 준서에 대한 안타까움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 조카가 사랑에 빠졌다. 말수가 줄어들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눈은 피안의 세계를 향한 듯 허공을 헤매고…. 맞다, 바로 짝사랑의 징후다. 하지만 준서야, 아파도 사랑해라. 사랑도 연습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아픔을 겪고 나서야 너는 아름다운 삶의 진주를 만들 수 있단다>


내게 선택은 사치였다

―살아오며 인생의 진로를 바꿀 만한 중요한 선택이나 결정을 한 일이 있습니까.

『선택은 제게 사치였어요. 살아오며 선택의 여지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학창 시절, 하다못해 대학 진학까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어요. 장애인은 초등학교를 제외하고는 입학시험을 보지 못하게 했어요. 그땐 특수학교도 없었어요』

그녀의 아버지 張旺祿(장왕록·前 서울大 명예교수·1994년 작고) 박사는 딸을 일반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장애 학생을 받아 주지 않아 張교수가 상급학교에 입학할 때마다 선친은 노심초사 학교를 찾아가 읍소한 것이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버지는 마치 神託(신탁)처럼 인생의 길잡이가 됐다』고 한다.

張교수가 高3이 되자 선친은 여러 대학을 찾아 사정을 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우여곡절 끝에 서강大 영문과 학과장이던 브루닉 신부를 찾아가 통사정했다고 한다.

<신부님은 너무나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말씀하셨다.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습니까?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나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張교수의 회상이다.

『대학을 들어가기도 힘들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도 취업할 데가 없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게 큰 불운이지만, 역설적으로 행운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뇌가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할 만한 고뇌가 필요 없었어요. 선택이 없었던 것이 제겐 가장 좋은 선택이었어요』

서강大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때였다. 당시 서강大에는 박사과정이 없어 연세大에 응시했다. 면접시험장에서 그녀는 「우리는 학부 학생도 장애인은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張교수는 몇 달 후 뉴욕주립大에 진학해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1985년 귀국했다.

『연세大에서 저를 받아 줬다면, 유학을 가지 않았을 거예요. 당시 그럴 만한 용기도 없었어요. 부모님과 동생들이 완벽하게 수발을 들어 주니, 낯선 땅 기숙사에 살며 모든 것을 혼자, 내 몸으로 꾸려 가며 공부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유학은 저의 선택이 아니었어요. 정말 새옹지마라고 할까요, 당시엔 너무 상처받고 슬펐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분(면접관)들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날 용기와 동기유발이 된 겁니다』

―어떻게 유학 준비를 하셨습니다.

『초벌 번역해서 아버지께 드리면, 「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저를 믿으셨거든요. 아버지는 책을 내실 때 서문에다 「원고정리를 도와준 딸 영희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는 표현을 늘 하셨지만, 저는 흡족할 수 없었어요.

제 이름으로 책을 내고 싶었고, 특히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제 성취감을 위해 철저하게 부모님 몰래 유학 준비를 했고, 뉴욕주립大로부터 입학허가와 스칼라십을 받고서야 말씀드렸습니다.

유학을 떠나기 두 달 전이었어요. 이미 준비하고 말씀드렸더니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떠나는 비행장에서 난리치고 울었지만』


張旺祿 원칙,「눈 가리고 아웅하지 말라」

張교수의 선친인 故 張旺祿 박사는 저명한 영문학자였다. 서울大 영문학과·同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아이오와大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미국 문학을 번역, 소개해서 美 컬럼비아大에서 주는 「미국문학 번역상」을 받았다. 또한 채택률 1위의 중·고교 영어 교과서 집필가이기도 했다.

번역서 및 저서로 「그리스, 로마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달과 6펜스」, 「가던 길 멈추어 서서」, 「압살롬 압살롬」, 「영문학사」, 「미국문학사」, 「헨리 제임스 소설론」 등이 있다. 영역서로는 「나무들 비탈에 서다」(황순원) 등이 있다.

―선친께서는 엄하셨습니까.

『아뇨. 하나도 엄하지 않으셨어요. 또 자상하지도 않으셨어요. 자식들하고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셨어요. 제자들 수발이 먼저였어요. 집안일은 어머니가 도맡으셨는데, 「공부해라, 마라」는 식의 말씀도 없으셨어요. 구두장이 아들이 맨발 벗고 다닌다고, 제게 개인적으로 영어를 가르치신 적도 없었습니다』

―채택률 1위의 교과서 대표저자로서 부녀가 共著(공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친께서 돌아가신 뒤 지금도 대표저자가 돼 중단했던 교과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張교수님께서는 「張旺祿 원칙」을 여러 번 강조하셨더군요.

『「눈 가리고 아웅」 하지 말라는 것이 아버지의 철칙이셨어요. 같이 밥 먹다가도 막힌 문장이 생각이 나시면, 그냥 국그릇에 수저를 놓은 채 서재로 가셨어요.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자기 일을 그만큼 사랑하는 것이지만 정성을 쏟아야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독자들은 저자가 얼마나 시간을 투자했는지 분명히 안다고 하셨어요. 열 시간 걸려 책을 쓰면, 열 시간짜리 책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수준이 낮고 어린 독자들이라 해도 정성이 들어간 책은 금방 알아차린다는 거예요.

특히 선친께서 가장 엄하셨던 게 교과서 작업이셨습니다. 교과서를 쓸 때 「한 페이지에 무엇이든 하나를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을 누누이 강조했어요』


문법을 알아야 제대로 된 영어 가능

―영어를 잘할 수 있는 비법이 있으면 알려 주시죠.

『아무리 발음이 예쁘고 유창하다 해도 문법을 몰라 글이 엉망이면 영어를 잘한다고 할 수 없어요. 요새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아요. 원어민 수준도 많아요. 워낙 학원에서 영어를 잘 가르치니까.

하지만 영어 쓰기를 시켜 봐요. 다 무너져요. 문법적으로 논리가 없고, 깊이도 없고, 창의성도 없어요. 어느 정도까지는 「영어로 배낭여행 잘 다녀온다」, 「영어로 잘 논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언어라는 것은 말하기·듣기·읽기·쓰기를 다 잘해야 합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3인칭 단수를 빠뜨리고 「she work」 라고 쓰면, 영어를 잘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어린 시절, 시험공포증이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세월이 흘러 이젠 학생들에게 아주 점수가 짜고 까다로운 교수로 입소문이 났더군요.

『학생들이 다른 수업에서 100을 투입하면 A학점이 나오는데, 제 수업에서는 200의 功을 들여도 A학점이 안 나온다고 해요. 어쩌면 제 기대치가 높다고 할까요? 저는 많이 읽히려고 해요. 또 대학 때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가장 읽기 좋은 두뇌 상태예요.

제가 대학 다닐 때 읽은 소설의 장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까지 기억나지만 요즘은 지난주에 읽은 책의 주인공 이름조차 가물가물할 때가 있어요. 학생들에게 원서 두 권을 읽히며 한 학기를 끝낼 수도 있지만, 윽박질러 가며 열 권을 다 읽혀도 학생들이 모두 따라와요. 그러니까 이왕이면, 열 권을 다 읽히는 게 낫죠. 당연히』


에이허브 선장의 도전

張교수는 『스무 살 무렵인 1970년 초 휴교령과 시위로 수업을 할 수 없게 돼 소일거리로 읽었던 책들이 결국 문학을 일생의 업으로 삼을 수 있는 밑천이 되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19세기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의 「백경(Moby Dick)」은 자신의 영혼에 지표를 제시해 준 작품으로 기억한다.

「백경」은 거대한 흰고래를 잡기 위해 포경선 피쿼드號(호)의 선장 에이허브가 겪는 모험담이다. 에이허브가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백경을 잡으려고 사투를 벌이지만 결국 자신도 죽고 피쿼드號도 침몰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그녀는 어느 산문에서 선장 에이허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나는 운명론자도, 그렇다고 비운명론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에이허브를 기억하려고 노력합니다. 설사 운명이란 것이 있어서 내가 내 삶의 승리자나 패배자가 되는 것이 나의 자유 의지와 무관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싸우겠습니다. 에이허브처럼, 에이허브는 인간의 무능과 허약함에 반기를 들었고, 단지 삶이 그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동냥자루가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의 노력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죽음을 가져왔지만, 굴복하는 삶보다는 도전하는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문학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

―에이허브 선장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외다리 에이허브 선장이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백경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쫓는 게 아닙니다. 사실 백경은 「마분지 가면」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은 그저 「마분지 가면」일 뿐이라고 봤어요.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계획적인 어떤 힘이 가면 뒤에서 은밀히 움직이며 인간을 놀리고, 꼭두각시 삼으려고 호시탐탐 노립니다. 마치 운명의 힘이나 神의 힘이랄 수 있어요.

에이허브는 「이 백경이라는 가면을 쳐부수고 정체를 봐야겠다. 나중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해도 괜찮다. 벽 속에 갇힌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야겠다」며 운명에 봉기를 든 겁니다.

심지어 「태양도 나를 모욕하면 쳐부수겠다」고 해요. 굉장히 멋있어요. 그래서 이 구절을 가끔 학생들에게 인용하는데, 모비딕은 가르치기에 너무 두껍고, 학생들이 지겨워해서 몇 障(장)만 골라 가르쳐요. 끝내 에이허브 선장이 죽고 그의 포경선도 침몰하고 말지만, 운명에 결국 패배할지언정, 그래도 한번 운명에 맞서 싸워 보고자 하는 도전 의지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어요』

―교수님은 문학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동력이 없는 저를 문학이 풍부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학창시절 그림을 꽤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그림을 그리려면 밖을 돌아다녀야 해요. 아무리 그림을 그리려 해도 물리적 조건이 허락지 않으니까 불가능했지요. 반면 공부하고 책 읽는 일은 하루 종일 꼼짝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기동력이 없으니 아무리 하고 싶어도 물리적 조건 때문에 불가능한 일들이 많았지만 문학은 달랐습니다』

―문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나요.

『구원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어떤 구원이냐에 따라 조건이 다를 수 있겠지만…. 언젠가 한 학생이 제게 「교통사고를 당한 이를 문학이 어떻게 살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난감했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학이 무슨 마술을 가르치거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의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어느 분야보다 생명의 귀중함을 알려 준다」고요. 누구를 직접 구할 수는 없지만, 구할 수 있다는 마음이 바로 문학이라 생각해요.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문학입니다』


백혈구 수치와의 신경전

張교수는 나와 만나기 전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요즘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 검진을 받는다. 완치됐던 유방암이 뼈로 전이된 게 2004년 9월의 일이니 벌써 17개월이 흘렀다. 매주 병원 신세를 져야 하지만 그녀의 표정엔 어두운 기색이 없다.

―병원은 일주일에 몇 번 가시나요.

『일주일에 한 번 갑니다. 오늘 오전에 갔고 인터뷰가 끝나면 다시 가야 해요. 오전에 뼈 검사를 위해 주사를 맞았는데 세 시간 뒤 다시 검사를 해야 한다네요』

―쉬셔야 하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아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근데 백혈구가 엄청 떨어졌더라구요. 원래 정상인의 백혈구는 5000~6000인데, 글쎄 800으로 떨어졌더군요. 의사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습니다. 사실 어제(2월27일) 강원도 홍천에 있는 콘도에서 영문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했어요.

가는 게 힘들었고 스케줄이 빡빡했지만 새내기를 환영하는 것이 교수로서의 의무였어요. 그래서 갔는데 엄청 힘들더라고요. 백혈구는 피곤하면 그대로 떨어지는데… 깜짝 놀랐어요. 「백혈구가 떨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은 왔지만 그렇게 떨어질 줄 몰랐어요』

―평소엔 백혈구 수치가 얼마나 나옵니까.

『글쎄 1500~2000은 나와요. 어쨌든 백혈구를 증진시키는 주사를 맞았습니다』

―비교적 암투병 사실이 많이 알려지면서 교수님의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의 경계가 무너진 것 같아요. 자신의 삶이 알려진 데 대한 부담은 없나요.

『정기적으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데, 화면 하단에 제 경력이 자막으로 떴습니다. 장영희는 무슨 학교 출신이고, 어떤 책을 썼는지가 나오고 맨 마지막에 「현재 암투병 중」이란 말로 제 경력사항이 마무리되더군요.

「아, 이제는 암까지 내 경력의 일부구나」 하고 생각하니 참 우습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뒤집어 생각하면 저의 투병이 주위에 힘이 되고 있어 다행입니다. 병원에 가면, 많은 사람이 다가와 「용기를 얻었다」고 말해요. 정말로 단 한 분이라도 저를 보고 「봐라. 나도 저 사람처럼 아파도 실실 웃으며 다녀보자」고 생각할 수 있다면, 저한텐 기가 막힌 기쁨이고 보람일 거예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神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한다. 「일어서는 법」은 넘어져야 알 수 있는 것이지만, 張교수의 밝은 생각은 사람들에게 「기쁘게 넘어지는 법」을 가르친다. 겹겹의 고통을 딛고 선 그녀에게 神은 어떤 존재일까?

절대적인 존재가 함께해 주시리라는 믿음, 표출되는 믿음이 아니라 제 의식 저편에 깔려 있는,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제 동생들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기도를 너무 잘해요. 하지만 저는 성체조배를 위해 다섯 시간 동안 꼬박 앉아 있지 못해요. 심심해서…. 가족들은 다들 밤새워 기도하죠. 새벽이 되면 가족들이 제 수발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드리곤 해요. 저는 자고 있고(웃음)』

그녀는 탁월한 문장가이기도 하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 『文福(문복)이 있다』고 말할 정도다. 소설가 박완서는 『정확하고 온화하게, 그리고 표 안 나게 강한 글을 쓴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완벽한 올빼미형

번역서로 「종이시계」, 「햇볕드는 방」, 「톰 소여의 모험」 등이 있고 선친과 함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살아 있는 갈대」, 「스칼렛」 등을 共譯(공역)했다. 김현승의 詩를 번역해 「한국 문학 번역상」을 수상했으며, 2000년 출간해 지금까지 33쇄나 찍은 「내 생애 단 한 번」으로 「올해의 문장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출간한 문학 에세이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현재 14쇄를 찍었다.

―글은 보통 언제 쓰나요.

『완벽한 올빼미형입니다. 대부분의 글은 자정 무렵부터 새벽 3~4시까지 쓰고 잠이 듭니다. 그리곤 오전 11시쯤 일어나요. 그래서 첫 수업은 늘 낮 12시30분에 시작해요(웃음).

한 문장 쓰고 고민하고, 괜히 부엌에 가서 냉장고 문 열어 보고, 집안일 참견해 보고, TV를 켜기도 해요. 그러니 글을 한 편 쓰는 데 시간이 굉장히 걸려요. 책 서문 하나 쓰는 데도 며칠 걸립니다.

조선일보에 북 칼럼을 연재할 당시, 「지금 마감이 끝났다. 대기하고 있다」고 독촉할 때도 「지금 갑니다」를 몇 번이고 반복한 뒤 간신히 데드라인을 지켰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데드라인이 있어야 글 쓸 거리가 떠오르거나 영감이 떠오르는 타입입니다. 「내일 아침까진 목에 칼이 들어와도 글을 넘겨야 한다」면, 그때부터 슬슬 쓰기 시작해요』

張교수는 약 14년 동안 英字신문 「코리아타임스」에 「미친 조각 이불」이라는 영문 칼럼을 써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었다.

『1986년부터 2000년까지 썼어요. 1986년이면 제가 30代였는데, 가장 왕성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영어로만 썼어요. 굉장히 좁은 독자층이었지만 소위 마니아들이 많았어요. 칼럼을 그만 쓰겠다고 하자 신문사 측에서 한 편이라도 더 써 줬으면 했어요. 당시 글을 읽어 보면 「그때 잘 썼구나」는 생각이 들고, 몇 편은 제 맘에 꼭 들어요. 일부는 영문으로 출판했고 나머지는 미국 출판사를 찾고 있어요』


임팩트 강한 寓話 쓰고 싶다

―우리말과 영어 중 어느 쪽이 글쓰기가 편합니까.

『두 개의 언어를 안다는 것이 때론 악조건이에요. 영어로 쓸 때는 미친 듯이 우리말이 방해해요. 반대로 우리말로 쓸 때는 자꾸만 영어가 들어와요. 서로가 서로를 방해합니다. 그러다 보면, 영어도 우리말도 아닌, 소위 죽도 밥도 아닌 경우가 생겨요』

―소설을 쓸 계획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맨날 TV를 보면 복통이 터집니다. 「어떻게 저렇게 쓰나, 대중의 시간을 낭비하는 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비판하는 능력은 있어도 쓰라고 하면 못 쓸 거예요. 소설은 또 다른 재능을 요합니다. 하지만 장기계획을 갖고 영어로 써보고 싶어요』

―대강의 뼈대는 세워 놓으셨나요.

『말하면 사람들이 웃을 거예요. 짧지만 임팩트가 강한 寓話(우화)를 쓰고 싶습니다. 내용은 이런 식입니다. 핵전쟁이 나서 땅 위의 모든 생물체가 죽었어요. 그러나 땅속 깊이 씨앗이 묻혔어요. 온갖 씨앗이 다시 한 번 생명을 얻어서 꽃을 피우는 꿈을 꾼다는 이야기입니다. 씨앗마다 나름의 특성이 있으니, 재미나게 쓸 거예요. 전 밋밋한 이야기를 안 해요』

張교수는 인상 깊게 읽은 수필집으로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꼽았다.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꼽히는 이 작품은 시각과 청각의 중복장애를 딛고 선 헬렌 켈러의 작품이다. 그녀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 대해 『너무나 절절해서 멀쩡히 두 눈 뜨고도 제대로 보지 않고 사는 내게는 차라리 충격이었다』고 했다.


사흘만 걸을 수 있다면

張교수에게 「만약 사흘 동안 두 발로 걷게 된다면 어디를 가고 싶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답변은 담담했다.

『저는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사실 사흘만 걷겠다는 열망은 없어요. 일생을 걸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죠. 사흘만이라는 전제조건이 너무 제한적이기에…』

그러나 두 발로 내딛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는 않았다. 그녀의 소망은 강렬하면서도 따스했다.

『아이스크림 콘을 손에 쥐고 걸어가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콘을 먹으며 걷는 모습을 보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조카 손을 잡고 파도 치는 백사장을 걷고 싶어요. 파도가 치면 종종 뒷걸음치며 물러서는 소박함을 느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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