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윤이형 작가에 대해 찾아보고 있는데,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윤이형 작가가 이제하 작가의 외동딸이라는 사실 같은 것. 여러 기사를 보다가 한 부분에 눈길이 머물렀는데, 최근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고 인터뷰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이 말에 꽤 공감했다.


"우리 사회의 남녀 갈등 양상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는 어떤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남녀 갈등과 대립은) 옳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설 안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부부가 헤어질 때 원한에 가득 차서 서로를 미워하는 건 각자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된다고 봅니다."


사실 이 소설(<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의 인상적인 대목 중에 하나는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대목이다. "결혼이 남미의 오지로 떠나는 위험한 여행이라면, 아이의 양육자가 되는 일은 우주선에 탑승해 미지의 행성에 정착하기 위해 떠나는 것과 같다. 앞서 간 여행자들의 데이터는 제대로 전송되어 오는 법이 없으며 우주선 안에서는 시간이 지구에서와 다르게 흐른다.(p.45)" 나는 이것을 조금 비틀어 보고 싶다. 남녀가 결혼하는 것은 어쩌면 지구인과 외계인이 같이 미지의 행성을 탐사하기 위해 떠나는 스타트렉 같은 것이 아닐까(<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합쳐봤다). 남녀 중 누가 지구인이고 누가 외계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어떤 네 발로 걷는 외계인이 두 발로 걷는 지구인에게 너 왜 두 발로 걸어?라고 묻는다 해도 지구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해의 시작이란 결국 이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 개인 혹은 집단(남자이든 여자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의 어떤 것을 결국 (어떤 집단에 소속된)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 데리다는 "용서란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해란 것도 사실 어쩌면 비슷한 것이 아닐까. 이해란, 결국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최근 데리다의 책 <용서하다>가 나왔다. 나부터 읽어봐야 할 듯.)


아무튼 윤이형 작가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 이번달 Axt의 메인 작가가 윤이형 작가던데 읽어봐야 할 것 같다. Axt를 이번 달에는 건너뛸까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사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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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TV를 끄고 정말 오래간만에 책을 읽었다. 머리 속에 있는 '아무 생각 없음' 버튼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TV'라는 스위치를 끄고, '책'이라는 스위치를 찾아서 켜는 일은 정말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무거운 몸을 들기 싫어서 애써 발로 전등 스위치를 켜듯이 어찌어찌 해냈다.


그래서 겨우 집어든 것은 며칠 전에 사놓고 던져놓은 이상문학상 작품집이고, 잠들기 전까지 읽은 것은 겨우 대상 수상작인 윤이형의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한 편이지만, 어찌되었건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의 감상이 들었는데, 하나는 이 소설이 대상을 받을만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은 현재의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위로 섞인 작가의 대답이라는 것이다. 사실 '위로 섞인 대답'이라는 말은 조금 웃기는 말인데, 위로면 위로고, 대답이면 대답이지, 위로 섞인 대답일 것은 무엇인가. 그렇지만 나는 결국 작가란 아무도 요청하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을지라도 현재에 대해 무엇인가가 답을 내놓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는 현재의 젊은이들을 서로 날서게 만드는 하나의 문제, - 이른바 페미니즘 이슈 - 라고 통칭할 수 있는 어떤 문제에 대해 무엇인가 작가로서는 대답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답은 또다른 <82년생 김지영>이 아니라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사실 이 소설은 그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아니 어떻게 보면 상관이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우회하는 이 방식이야말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면으로 부딪혀서 말하기에는 이미 많은 것들이 부정확한 사실들과 왜곡된 주장으로 구부러져 있으며, - 구부러진 거울을 정면으로 보면 구부러진 얼굴만 보일 뿐이다 - 하다못해 이런 졸려서 쓰는 잡글을 쓰는 데에도 조심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작가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제는 그만 싸우고, - 그러니까 희은과 정민이 싸우다 지쳐 모종의 결단을 내린 것처럼 - 무엇인가 다른 방식을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아니, 나는 그들이 내린 선택이 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그 결과에 이른 어떤 과정, 그러니까 왜 그 사이에 첫 번째 고양이(의 죽음)와 두 번째 고양이(의 죽음)가 놓여져 있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록으로 끝나는 마지막은 너무 작위적이었기에 그렇게 훌륭했다고 보지는 않지만, 나는 왜 두 가지의 죽음 사이에 이들의 이야기가 놓여져 있나, 그들의 선택에 무엇이 작용했나를 생각했다.


나는 적어도 작가가 이들을 - 그러니까 현재의 남성 젊은이들, 그리고 여성 젊은이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남녀 주인공의 입장에서 비교적(비교적에 이런 구차한 설명을 달아야 한다는 것이 슬프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 무게는 차이가 나고, 여성 작가이니 무게 중심은 아무래도 희은에 더 쏠려 있다.) 번갈아 서술되어 있다는 사실도 그 하나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해하려고 애쓴다는 사실에 있다. 위로는 결국 최소한의 이해, 혹은 이해하려고 애씀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이제 젊다고 말할 수 있기에는 매우 애매해져 버렸지만, 그래도 그 애씀에서 모종의 작은 위로를 받았으니, 그래도 읽기 잘했다고 말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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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 2019년 제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윤이형 지음 / 문학사상사 / 2019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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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이 이상문학상 우수상이라니, 이상문학상도 끝났구나, 라고 중얼거린 후, ‘바로구매‘ 버튼을 클릭했다. 이상문학상을 사는 건 새해의 어떤 정해진 일과 같은 것, 느릿느릿 읽으면서 봄을 기다려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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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는 지하철에서 3편의 영화를 보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어쩌면 이 첫문장을 보신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출근을 도대체 어디로 하기에, 3편이나?


아니, 그 3편의 영화를 (읽어)보았다,는 말이다. 허문영의 <보이지 않는 영화>에 실린 3편의 리뷰. 사실 지하철에서는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나는 영화는 절대적으로 사이즈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들여다보는 영화, 더구나 사람들에게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는 상황에서 보는 영화라면, 그것은 이미 영화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그것은 그 영화를 싫어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작은 화면으로, 게다가 안좋은 화질로 본 어떤 영화를 우연히 극장에서 다시 보게 된 경우가 있었는데, 내가 본 영화는 그 영화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영화로 나에게는 받아들여졌다.


내가 서두에서 일종의 낚시질을 한 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허문영의 글들이 적어도 영화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정 부분을 본 것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 쓴 3편의 영화를 사실 아직 모두 보지 못했고,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나 예고편 등으로 짧게 본 것이 전부이지만, 그의 묘사는 이상하게도 영화의 일정 부분을 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사실 그의 묘사력이 뛰어난 편이 아닌데도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가 묘사하는 그 장면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글을 읽으면서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계속 이미지화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실제의 영화(장면)를 보는 것도 거의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그 스크린은 이미지화되어 우리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같은 장면을 봐도 다르게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그 이미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이미지는 더 생생해진다. 보지도 않은 영화의 이미지가.


허문영은 계속 질문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질문의 빈도라기보다는 사이즈다. 허문영이 묻는 것은 어떤 장면의 의미나, 그 장면이 소구하는 무엇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장면이 불러오는 영화라는 것의 작동방식이다. 혹은 그 장면이 단적으로 드러내보이는 영화라는 것의 메커니즘이다. 그 질문들은 점점 커져, 거의 걷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특히 오늘날의)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폭력 이미지, 그것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혹은 영화는 죽음을 어떤 식으로 넘어서는가, 혹은 넘어서려고 애쓰는가. 아마도 누군가는 이 마지막 문장을 보고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떠한 것도 죽음을 넘어서지 못하는데, 고작 영화따위가?


그렇다. 사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도전이다. 허문영은 일단 벽을 먼저 세우고는 그 벽을 넘어서려고 애를 쓴다. 그 과정에서 벽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거대해진다. 어느 틈에 가면 벽을 넘어서려고 애쓰는 것인지, 그 벽을 더 단단하고 거대하게 만드려고 애쓰는 것인지 모호해진다. 그러나 그의 글들이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순간이다. 거대한 질문과 작은 답, 혹은 거대한 질문에의 도전. 그리고 예정된 실패.


개별 영화들을 다룬 2부보다, 영화의 윤리라는 거대한 질문에 도전한 잡문 성격의 1부가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 늘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답을 찾아서 제시하려는 욕망. 나는 당신보다 이 영화에 대해 이 만큼 더 알고 있어, 그러니 그것을 말해줄께,라는 식의 소아적인 욕망. 그래서 질문은 자신이 답을 낼 수 있도록 늘 빈곤해지고, 유혹에 쉽게 흔들린 글들은 이제 영화가 아닌 것을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한다. 영화가 아닌, 자신이 본 영화,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들.


영화를 보면서(어쩌면 세상을 보면서도) 왜 우리는 눈앞에 현전한 것을 종종 보지 못하며, 거기 없는 것을 종종 보았다고 느끼는가.(p.7)


그래서 그는 예정된 실패를 알지만, 거대한 질문을 쌓아나가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결국은 계속 볼 수밖에 없다. 계속 봄으로써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계속 배반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반복하여 본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우리의 욕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고자 하는 욕망, 그 욕망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허문영은 말한다. "우리가 응시해야 할 것은, 이 한 편의 영화 이전에 그 욕망과 충동일 것이다 (p.247)."

그것이 아마도 그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영화'이다.



덧.

그래서 물론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이 3편의 영화를 봄으로써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배반당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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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8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2 0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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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16: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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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힘든 이야기이다. 부서지려고 하는 것들, 혹은 이미 부서진 것들, 그리고 부서진 것들을 어떻게든 끌어모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계속 부서져나가는 마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는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명확한 답이 없는 이야기, 그러나 어떻게든 그 답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들.


김일란, 이혁상의 <공동정범>을 보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다. <두 개의 문>에 이은 용산참사를 다룬 연작선상에 서 있는 다큐. 2009년 1월 20일 새벽, 경찰은 용산 철거민들이 망루를 짓고 농성에 들어간 지 25시간만에 이례적으로 이른 진압을 시도하였고, 진압과정에서 철거민들이 지은 망루가 불타오르며 철거민 5명과 경찰 특공대원 1명이 사망에 이르렀다. 이후 수차례 재판이 열렸고, 그 과정에서 화재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찰은 이를 시위자들의 화염병에 의한 것이라 단정짓고, 망루에서 탈출하여 생존한 전원을 공동정범(共同正犯)으로 기소하고, 그들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 영화 <공동정범>은 그 '공동정범'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니까, 이 '공동정범'들의 위치는 사실 특별하다. 그들은 (경찰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가 법집행의 정당한 권리를 방해한 범죄자이지만, 동시에 동료를 잃은 이들이기도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죽을 뻔한 위기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살아남은, 아직까지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이들 중 한 명인 이충연 씨는 참사 현장에서 아버지를 잃고, 홀로 살아남았다. 그래서 그들은 묻는다. 나 때문에 모두가 죽었을까? 내가 그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까?


그들은 차례로 고백한다. 예를 들어 생존자들 중에 한 명인 김주환 씨를 괴롭게 하는 기억은 경찰이 가깝게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시너를 뿌리던 기억이다. 내가 시너를 뿌리지 않았다면 피해가 적지 않았을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발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경찰과 검찰도 이를 정확하게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들의 기억은 분절되어 있고, 심지어는 없는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 그 순간 살기 위해 애쓰던 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 제목 '공동정범'은 중의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사건의 핵심, 그러니까 발화의 책임은 여전히 비어(空洞)있다.


이야기의 한 축이 이것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바로 그 '共同'이다. 너희 모두가 그 사건, 혹은 범죄에 책임이 있다는 것. 그러나 당연하게도 어떤 사건이든 책임은 모두에게 실질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 누군가는 억울하고, 누군가는 그 누군가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억울하다. 누군가는 사건 이후 서로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그보다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대립한다. 그들을 '공동정범'으로 만든 그 방식의 효과가 그대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그대로 보는 것은 힘들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감독은 다큐인 이 영화에 극영화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을 것이다.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가 주가 될 수밖에 없는 영화, 더구나 이러한 내용의 영화라면 그것을 계속 보고만 있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을테니. 그것을 일종의 플롯의 구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텐데, 주인공과 주인공에 대립되는 인물을 설정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플롯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식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인터뷰들을 이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며, 일종의 플롯을 만들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몇몇 장면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출소 이후 홀로 견디는 것의 어려움을 말하는 인터뷰 뒤에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충연 씨의 모습을 붙인다거나, 아니면 사건 현장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이가 누구인지 알지만 말할 수는 없다는 인터뷰 뒤에 붙는 장면들을 보면 마치 극 영화의 이야기 흐름을 보는 것 같다. (이는 사실 <두 개의 문>에서부터 이어진 기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예전에 썼던 <두 개의 문> 리뷰에서 이것의 어떤 위험성을 말한 바 있고, 이 <공동정범>에서도 여전히 몇몇 마음에 걸리는 장면들이 있지만, 반복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아마도 그렇게 해서라도 감독은 이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보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플롯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대립항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 있는 것들, 다시 말해서 링 위에서 싸우는 누군가가 아니라, 그들을 링 위로 올려놓은 자들. 그들의 싸움에 열광하는 군중들 뒤에서 거액의 파이트머니를 챙기는 프로모터들. 영화라는 것이 가치가 생기는 지점이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즉 영화는 당연히 그들의 싸움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링 가까이에서 즐기는 군중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카메라 안에서 즐기는 군중들은 적어도 그 순간에는 결코 프로모터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밖에 서 있는 우리들은 환호하는 군중의 얼굴을 봄으로써 그것이 상징하는 어떤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중의 하나는 환호하는 군중의 머릿수와 입장료를 곱한 거액의 파이트머니이고, 더 나아가 그 파이트머니의 상당수를 챙길 그 링에 그들을 올려보낸 프로모터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그 질문은 이렇다.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이면에 있는 욕망은 누가 보아줄 것인가.


용산에서 2009년 사람이 죽었고, 건물이 무너졌다. 버려진 공터는 한동안 주차장이 되었다가 이제는 쇼핑센터가 들어선다고 한다. 누군가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대통령이었던 누군가는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것으로는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여전히 그곳에는 공동(空洞)이 있고, 그 공동은 욕망들이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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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9-01-1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보기 힘든 영화일 것 같아요. 그래서 아직 보지 못했어요.

[두 개의 문]은 정말 괴로운 마음으로 보았어요.

역시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9-01-17 14:08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상으로 힘든 영화임은 틀림이 없죠. 그런데 단지 영화적으로만 말한다면 꽤 재미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의 구조를 잘 짜 놓았거든요. 물론 여기에 ‘재미‘라는 말을 써도 될지 매우 조심스럽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그래도 어떻게든 보아달라, 라는 메시지가 느껴졌어요.

2019-01-21 0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4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