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는 사실 조금 이상하다고 보일 수 있는 둘로 나뉜 듯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영화다. 영화 전반, 소희(김시은)를 둘러싼 주변을 무심하게 따라가던 영화는 소희의 죽음 후,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오유진 형사(배두나)가 소희가 죽은 어떤 일련의 메커니즘을 거슬러 올라가는 구조를 취한다. 그러니까 사실 주인공 중에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오유진 형사는 영화가 거의 1시간이 지나가서야 실질적으로 등장하며(그 전에 한 번 살짝 스치고 지나가기는 한다) 오유진 형사와 소희는 끝끝내 만나지 못한다. 오유진 형사가 대면하는 것은 이제 시신이 된 소희일 뿐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비극이 있다.


배두나가 '그알 유튜브'에서 말했듯이 사실 오유진은 형사라기보다는 사건의 메커니즘을 추적하는 시사고발 PD에 가깝다. 다만 '그알'과 이 영화가 다른 점은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그 당시의 소희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쩌면 (시사고발 다큐와 다른)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아닐까. 그러나 물론 이 영화 <다음 소희>의 파괴력이 단지 영화라는 매체의 힘에 기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한 평가가 될 것이다. 이 영화의 파괴력은, 혹은 힘은, 그러한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힘을 남용하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쉬운 선택은 이것들의 순서를 뒤바꾸는 것이다. 시간을 바꾸고 가장 자극적일 수 있는 장면, 예를 들어 소희의 죽음이라든가, 아니면 소희가 콜센터에서 고통의 시간을 겪는 것을 처음으로 돌리는 선택. 심지어는 '그알'과 같은 시사고발물도 이러한 선택을 즐겨 사용한다. 가장 자극적인 장면, 가장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장면을 시작부에 집어넣고, 우리는 '어우어우, 저 나쁜놈'하며 끝까지 화면에 눈길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소희>는 끝내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여학생 소희는 춤을 추고, 친구를 만나고, 학교 선생님의 추천에 따라 콜센터에 들어가고, 쉼 없이 콜을 받다가, 아니 욕설을 듣다가, 죽음을 선택한다. 그리고 형사 유진은 그런 소희를 시신으로 대면한 후, 그녀가 왜 죽음에 이르게 되었나를 생각하며 그 과정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소희는 절대 플래시백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가 등장하는 것은 영화의 가장 마지막 유진이 바라보고 있는 영상 속에서다. 다 지웠으면서도 남겨둔 자신의 춤추던 모습. 그녀가 우리에게 바라봐 주기를 바랐던 것은 그 영상이었다. 열심히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던 한 인간으로의 소희.


사실 영화에서 해결된 것은 없다. 결국 유진은 소희의 시신을 부모님에게 인계할 수 밖에 없었으며, 교육부에 이르기도 전에 높은 벽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이, 아니 영화가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롯이 그 켜켜이 쌓인 정직한 장면들의 힘이다. 무엇인가를 덧씌우기를 거부하고, 끝끝내 참으며 기다렸던 장면들의 힘 말이다. 말이 쉽지, 참으며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영화에 무엇인가를 덧붙이기는 쉬워도 참으며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정직하게 장면들을 쌓은 영화는 정직하고 명징한 질문을 남길 뿐이다.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덧. 

긴 시간을 출퇴근을 하면서 요새 지나간 드라마들을 보고 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나의 해방일지>. 이제 겨우 4화까지를 봤다. 4화의 그 유명한 '구씨'의 멀리뛰기씬. 어쩌면 별것도 아닌 이 장면이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3화까지 끈덕지게 캐릭터를 천천히 소개하며 버틴 작가의 힘일 것이다. 영화와 달리 여러 화로 구성된 드라마를 보다보니 어떤 작품이 이야기를 하게 되는 방식, 장면들을 전달하는 방식을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더 글로리>가 던질 것이라고 기대감을 주던 작은 카운터펀치들을 재빠르고 색다르게 던지며 쾌감을 쌓는 방식이라면, <나의 해방일지>는 느리게 캐릭터를 만든 다음, 그 캐릭터들이 (내 머리속에서) 헤엄치게 내버려 두는 방식이다. (물론 4화까지 본 것이니, 그 이후에는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어떤 게 더 좋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방식을 꿋꿋이 어쩌면 정직하게 지켜가는 그 자체에 이 작품들의 매력이 있다. 아마도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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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로 가는 길 - 운명을 거슬러 문을 열어젖힌 이방인
에이미 스탠리 지음, 유강은 옮김 / 생각의힘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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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물러서서 누군가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건 쉽다. 하지만 쓰네노가 에도로 가는 나카센도에서 자신의 앞날을 바라보는 건 쉬웠을까. 쓰네노가 행복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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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23-04-19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론 그런 쓰네노의 삶에 대해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에이미 스탠리의 공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가 그런 쓰네노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남긴 수많은 편지의 덕이었다. 쓰네노가 후대의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읽어내릴 수 있었던 것을 알면 소스라치게 놀랐을까, 아니면 좋아했을까. 세상 속에서 영생하는 길은 어쩌면 무엇인가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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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보다는 조금 더 길지 싶은데..] 혼돈 속에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쉬운 질서로 달려갈 것인가. 간단한 문제 같지만 간단하지가 않으며, 유혹은 얼마나 쉽게 악마의 웃음을 숨기며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가. 그럼에도 오늘도 버티고 있는 그 누군가들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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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23-04-19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책 시작부의 요란한 광고는 조금 빼는 게 더 나았으리라고 보지만..그래도 겨우 이런 얘기하실려고 했어요? 라는 그런 말에는 한마디 변명을.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보면 결국 뻔한 이야기만 남는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하는 방식의 문제 혹은 이야기를 하는 태도의 문제인 것.
 
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송태욱 옮김 / 체크포인트 찰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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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진짜 원점. 그가 그려왔던 것이 ‘하나의 인간‘ 그 자체였음을 다시 일깨워 준다. 이 책은 그의 영화를 닮았다. 아니 그의 영화들이 이 책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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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23-03-06 1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와 더불어 고레에다 히로카즈 에세이만 보고 그가 글은 못쓰네..라고 생각했던 거 반성. 역시 사람한테는 맞는 거를 시켜야 한다. 하..리뷰를 쓰고 싶은데 쓸 시간이 없다.

맥거핀 2023-03-06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오늘 같은 날 이 책 평을 남겨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서 한 마디. 며칠 전부터 이 책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나 짧은 평이라도 남겼더니 하필이면 오늘이네.

아무튼 방금 JTBC 뉴스를 보니 오늘의 이 ‘조치‘를 일본 정부가 ‘평가‘한단다. 하하 정말 뭐라 할 말이 없다.

2023-03-07 0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0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각종 자료나 보고서에 치이면서도, 보관리스트를 꾸준히 업데이트는 하고 있었는데 한동안은 리스트에 줄만한 맛깔나는 먹이들이 없어서 흐음..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11월 말에서 12월 사이에 그런 흐으음...이 무색해지게 구미를 당기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밑에 2권의 책이 일단 무작정 사고 볼 책이라면, 이 책들은 조금씩 조금씩 탑처럼 쌓아올려야 할 책들이다. (물론 '탑처럼 쌓아올린다'는 것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나는 어떻게 성형미인이 되었나,라는 지극히 밋밋한 제목과 달리 아주 흥미로워 보이는 책이다. 과학기술학 연구자가 강남 성형외과 코디로 3년간 일하면서 성형수술 당사자가 된 경험을 엮은 책이라니..이 끔찍한 혼종, 아니 이상한 조합은 뭐지?



말과 이미지에 민감한 사람들은 새로운 규칙과 새로운 사고를 만들어 낸다. 솔직히 거지같은 보고서들을 계속 읽다보면 그게 내 뇌세포를 잡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실제로 자료를 읽으면서 그런 이미지를 머리 속에 그리고 있다. 8비트 팩맨에 나오는 노란 먹깨비가 야들야들한 뇌세포를 잡아먹는 상상...) 이 책은 그런 뇌세포를 조금 더 맛있게 해줄 것 같다.



카메라와 스캐너의 알고리즘이 24시간 작동되는 재교육 수용소. 신장 위구르의 수용소에서 중국이 벌이는 "직업훈련 프로그램"의 먼 저편에는 실리콘 밸리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끔찍한 혼종"이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다.



존 스타인벡 글, 로버트 카파 사진. 뭐 사실 이것만으로도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 없는데, 이런 책을 읽으면 위의 책을 읽고난 후 조금은 힐링이 될 것 같아서 골라봤다. "사람들이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 저녁에는 무얼 먹는지, 러시아인들도 파티를 여는지, 파티에는 어떤 음식이 나오는지,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지, 또 어떻게 죽는지, 이들은 무엇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지, 이들은 춤을 추고, 노래하고, 여흥을 즐기는지, 애들은 학교에 가는지에 대해 쓴 사람은 없었다. 이런 것을 찾아내고, 사진을 찍으면 아주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의 사자성어가 '과이불개'라고 하던데, 올해의 키워드를 하나 뽑으라면 '반지성주의'아닐까. (비슷한 말로는 "그래서 어쩌라고.") 신앙적 확신, 성찰 불능, 적대적 표현. 강준만이 정의한 반지성주의의 3대 요소. 우리 누구도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


여러가지 쓰고 싶은 아이템을 몇 개 생각도 했었는데, 회사에 와서 여러 잡다한 것들을 보는 순간 머리 속이 싹 날아가 버린다. (이거 이상한 거 아니죠? 다들 그러시죠?) 월드컵 이란과 웨일즈전을 보면서 이런 나라들이 언제 또 만나서 축구 한 게임하겠나 싶어서 이란의 정치적 상황과 거의 60년만에 본선에 오른 웨일즈의 상황과 거기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매닉스까지(이 형님들의 웨일즈 축구팀 사랑은 찐이다. 웨일즈 국가대표팀 응원가까지 내신 분들이니) 곁들여서 잡담이나 쓰려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 버렸고...최근에는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진도준을 까는 글을 쓰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타이밍을 놓칠 것 같다. (그 글은 '진짜 도둑넘은 준이'라는 삼행시로 시작하려고 했는데 사실 안 쓰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월급도둑의 길은 가까우나, 내 의지력으로 향하는 길은 늘 멀다. 그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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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2-14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맥거핀 님 너무 오랜만입니다 ^^

맥거핀 2022-12-15 08:27   좋아요 0 | URL
너무 오랜만에 와서 민망할 지경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잊지 않고 와서 인사남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따뜻한 겨울 되세요. :)

희선 2022-12-16 0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이불개가 2022년 사자성어였군요 얼마전에 라디오 방송에서 들었어요 좋은 말인 듯한데 잘 모르기도 한 말이군요 잘못한 걸 알아도 잘 고치지 못하는 건 많은 사람이 그럴 듯합니다 저도 다르지 않군요

맥거핀 님 늘 건강하게 지내세요


희선

맥거핀 2022-12-19 11:07   좋아요 1 | URL
하도 오랜만의 알라딘 서재 방문이라 (민망해서) 글만 남기고 바로 사라질까 했는데 이렇게 인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지내고 계실까요? 말씀하신 대로 건강이 제일 중요한 건 맞지 싶습니다. 올해는 일도 바쁘기도 했고, 중간에 건강이 좀 안좋아지고 해서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었어요. 희선님은 아프시지 말고 행복하게 지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날씨가 많이 찹니다. 따뜻한 겨울 되시기를 바랍니다.

희선 2023-01-01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 많이 오고 추운 날이 오래 이어지기도 했는데, 며칠은 좀 따듯했네요 아직 눈 다 안 녹았어요 제가 사는 곳은 눈이 많이 와서... 이번 겨울에 볼 눈 다 본 걸지... 앞으로도 눈 조금 오면 좋겠네요 아직 겨울이니...

맥거핀 님 건강 안 좋을 때 있었군요 지금은 좋아지셨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2023년 좋은 해이길 바랍니다 가끔 소식 전해주세요


희선

맥거핀 2023-01-06 16:45   좋아요 0 | URL
답글이 많이 늦었습니다. 새해 인사도 늦었구요. 언젠가부터 날씨가 참 변덕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갑자기 추웠다가 갑자기 따듯해졌다가..세상 모든 것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생각인데, 날씨도 그런 걸까요?

희선님도 올해는 아프신 곳 없이 건강하게, 좋은 일들이 생기는 한해였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특별하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은 한해가 역설적으로 좋은 해인지도 모르겠고요. 나이가 들수록 점차 그런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도 물론 그렇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