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좋은 책(일단 길이로만 봐도 그렇다)은 심각한 오해를 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이글턴의 만담이 알아먹기 힘들다는 것(사실이다), 다음으로 하나마나한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이건 좀 생각해볼 문제다), 도움이 될지 불난 집에 석유를 들이붓는 일이 될 지는 모르지만 일단 양동이에 뭘 좀 담아서 부어보기로 했다.

첫장의 제목은 ˝질문들과 답변들˝인데 통상 강연의 마지막순서에 해당하는 Q&A를 앞자리에 놓음으로써 풋웃음을 유발하고, 여기서 진짜 문제는 질문들과 답들 그 자체라는 사실을 공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는 진짜 질문일까? 이글턴은 아닐 수도 있다고 답한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질문인 척하는 사이비 질문인데, 예를 들어, “너 진짜 죽고 싶니?” 라는 말이 예, 아니오의 대답을 요구하는 문장이 아니라는 맥락에서 그렇다.

대체로 이 질문은 “나 요즘 왜 사는지 모르겠다”와 같은 푸념에 가까운 표현으로, 철학의 영역에서는 늘상 존재했지만 늘상 같은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중세 시대에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보다 ‘누구’인가? 에 가까웠으며, (대체로 그 대답은 ‘신’이었다고 한다), 종교가 삶의 중요한 가치(헌신, 희생, 공감, 연대, 포용, 베풂, 실천)를 독점하던 시기에는 영토 분쟁이나 전쟁도 그러한 이유로 발생했다.

최근의 경향은 인생의 의미를 제공하던 공적 영역의 생산라인이 붕괴하여 사이언톨로지같은 유사 종교 불량품이 출하되거나 좀더 친근한 민속 종교의 형태를 띈 ‘축구’와 같은 공산품이 출시되기도 하는데, 이제 그것들은 누구나 뒤따라야 할 공공의 가치가 아닌 개인의 기호의 영역으로 찌그러 들고 있는 실정이다(맨유 팬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누구나 맨유의 팬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1,2차 대전, 핵무기 확산, 기상이변, 국가/민족 간 갈등, 자본주의 심화에 따른 빈부격차, 계층/인종/성별/성적 기호 등에 따른 갈등이 촉발하는 삶의 ‘위기’ 하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쏟아내는 집단적 푸념(왜 사는지 모르겠다) 의 일종이라는 게 이글턴의 주장.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저 질문의 해답을 구하려고 애쓰는 대신 저 질문이 성립하는 역사적 맥락을 다시 검토할 때에 제대로 ˝의미있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이니 그 다음 장의 제목들이 ˝의미의 문제˝와 ˝의미의 퇴색˝을 거쳐 ˝어떻게 살 것인가˝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귀결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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