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3일에 '단상(77) 니체를 헤아리며'라는 글을 올렸다. 그 글에서 “인간이 바라보는 세계란 이미 그 사람의 일부이다.”라는 니체의 문장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의 글을 넣었다. 

 

 

 

 

 

사람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렌즈처럼 앵글에 비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투과시키지 않는다. 가령 석양에 물든 산자락을 넋을 잃고 바라볼 때도 자연의 풍광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본인 스스로는 마음을 비우고 본다 생각할지라도, 실상은 바라보는 대상 위에 영혼의 얇은 막을 무의식적으로 덮어씌운다. 그 얇은 막이란 어느 사이엔가 성격이 되어버린 습관적인 감각, 찰나의 기분, 다양한 기억의 편린들이다. 풍경 위에 이러한 막을 얹고, 막 너머를 희미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즉 인간이 바라보는 세계란 이미 그 사람의 일부이다.

 

 

- <초역 니체의 말 2>, 21쪽.

 

 

 

 

그리고 위의 글을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설명한 게 있다.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인해 집을 팔고 작은 전셋집에서 살게 되고 게다가 남편은 중국에 가서 일하게 되어 부부가 따로 떨어져 살게 된 지인이 있다. 부부는 가난하지만 사이가 좋아서 아내는 남편을 그리워한다. 이 얘기를 듣고 어떤 이는 사이좋은 부부가 경제 사정으로 떨어져 살게 되었으니 불행한 부부라고 하고, 어떤 이는 그런 상황에서도 사이좋으니 행복한 부부라고 한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란 이미 그의 일부이다.”라고.

 

 

 

그리고 니체의 글 다음에 이렇게 덧붙였다.

 

 

 

“이 글을 기억해 두고 싶다. 그 이유는 어떤 일을 전해 들을 땐 누구의 말도 백 퍼센트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해 냈기 때문이다. 전해 주는 사람이 재해석하여 전해 줌으로써 사실이 왜곡될 수 있어서다.”라고.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해 보려고 이 글을 쓴다.

 

 

 

A라는 사람이 친구 B에게 전화를 걸어 C라는 친구의 안부를 묻는다.

 

 

 

A : “C는 요즘 어떻게 지내니?”

B : “걔, 경제 사정이 나빠져서 작은 전셋집으로 이사했고 남편마저 중국에 가서 일하게 되어 따로 떨어져 살고 있어. 부부 사이가 좋으면 뭐하니. 걔가 그렇게 불행해질 줄 몰랐어.”

 

 

 

같은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다.

 

 

 

A : “C는 요즘 어떻게 지내니?”

B : “걔, 경제 사정이 나빠져서 작은 전셋집으로 이사했고 남편마저 중국에 가서 일하게 되어 따로 떨어져 살고 있어. 하지만 여전히 부부 사이가 좋아. 그런 상황에서도 남편을 그리워하다니 참 행복한 부부야.

 

 

 

이렇게 같은 정보를 가지고도 사람에 따라서 정반대로 전할 수 있다. 이것은 전해 주는 사람이 재해석하여 전해 주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문학을 배울 때 독자에게 숟가락으로 떠먹이는 듯한 글을 쓰지 말라고 배웠다. 그것은 독자의 상상력을 차단시키기도 하고 독자의 수준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단다. 하지만 난 독자에게 숟가락으로 떠먹이는 글도 필요한 게 아닐까, 요즘 생각한다. 왜냐하면 도대체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쓴 것인지를 모르겠다고 느껴지는 소설을 읽을 때가 있어서다.

 

 

 

그래서 <싱거운 후기>를 써 봤다. 그야말로 영양가 없는 싱거운 후기다. 그렇지만 내 속은 시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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